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알루미늄 등에 높은 관세를 매기면서 촉발된 무역 전쟁은 호주 정치와 경제에 예기치 않은 파장을 가져왔다.
미국으로부터 ‘관세 면제’ 가능성이 흘러나오다가 갑작스레 부과로 돌아서며 정치, 경제적 파급력이 커지고 있는 모습이다.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가 이끄는 호주 노동당 정부는 이에 강력 반발하며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덕분에 여론은 점차 노동당을 향해 기울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는 5월 총선을 앞두고 더욱 뚜렷해졌다는 게 주요 외신과 호주 현지 언론의 공통된 평가다.
특히 노동당 지지율이 야당인 자유당·국민당 연합을 근소하게나마 앞서는 조사들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총선 판도 자체가 흔들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발표된 여러 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동당 지지율은 지난주보다 1%포인트 상승한 52%를 기록하면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반면 자유당·국민당 연합은 48%로 한 계단 내려섰다.
사실 지난 몇 개월만 해도 야당이 한동안 우세했던 흐름이 이어졌으나, 트럼프 관세 이슈가 부각되기 시작하자 판세가 묘하게 변하고 있다.
노동당의 상승세는 정책적인 측면뿐 아니라 ‘반(反)트럼프 정서’를 교묘히 활용한 측면도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여론조사에서 호주 국민 절반 이상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답했는데, 총리가 이에 호응하며 “관세 부과가 오랜 동맹에 어긋나는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앨버니지 총리는 관세 발표 직후 미국산 대신 호주산 구매를 권장하는 등 자국 우선 정책에 나섰다.
공무원 감원을 추진하고 재택근무를 제한하려던 야당 자유당·국민당 연합을 겨냥해 “트럼프 행정부와 다를 게 없다”라며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유당·국민당 연합이 곧바로 “공무원 재택근무 금지” 공약을 철회한 사실은 노동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존 정책이 국민 생활 안정에는 맞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자, 야당 대표 피터 더튼이 직접 사과하며 한발 물러선 셈이다.
이런 전개는 호주의 전통적인 정치 지형을 단숨에 뒤흔들었다. 공무원 복지를 축소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보수 세력의 근본 원칙이 휘청이자, 중도층이나 부동층 유권자들이 노동당 쪽으로 기울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 지형 못지않게 경제 상황도 긴박하다. 미국의 상호 관세 발표 후, 4월 7일 호주 증시를 대표하는 ASX200 지수는 장 중 최대 6.5% 폭락했다.
이는 2020년 3월 코로나19 사태 초기 이후 최대 낙폭이다. 장 마감 무렵 낙폭이 일부 줄긴 했으나, 여전히 금융시장이 받는 충격은 적지 않다.
호주 달러 가치 역시 미국 달러 대비 큰 변동성을 보이면서, 경기 둔화 우려가 커졌다.
시장에서는 호주중앙은행(RBA)이 기준금리를 조속히 인하해 경제 충격을 최소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한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34% 보복 관세 역시 불씨다. 호주 수출 시장이 중국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이 결국 호주 경제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앨버니지 총리는 미국 측과 관세 협상을 재개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이 호주 수입품에 매긴 관세가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지만, 문제는 앞으로 양국 간 분쟁이 격화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호주가 대미 무역 적자 국가라는 점을 들어 미국이 “상호관세”라는 명목을 내세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하지만 이 같은 사태가 오히려 호주 정치권에는 일종의 국익 결집 계기가 되었다. 여론은 총리를 비롯한 정부가 ‘대외 협상’에서 국가 이익을 지켜야 한다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호주가 무역 동반자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호주 산업 구조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여러 서방 국가들과 잇달아 충돌하면서, 캐나다나 뉴질랜드 등 주변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주목된다.
캐나다는 트럼프의 관세 위협 이후 역풍으로 집권당 지지율이 반등했고, 뉴질랜드 주식시장도 비슷한 이유로 급격한 낙폭을 보이다가 정부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트럼프 관세’를 둘러싼 찬반 대립이 정치권에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가올 호주 총선에서는 이러한 무역 갈등이 표심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가 관전 요소다.
한편, 관세가 일으킨 파장은 단지 수출입 품목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서, 호주 정치권이 국민에게 어떻게 ‘국가 자존심’을 보여주느냐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앨버니지 총리의 강경 대응과 상승세에 오른 노동당 지지율을 놓고 보면, 호주 국민은 무역 전쟁과 경제 위기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호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제는 향후 미국과 협상을 어떻게 타결하느냐다.
호주 경제가 미국과 중국 모두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역 분쟁이 장기화할 경우 국내 산업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럴수록 호주 유권자들은 대외적 자주성을 강조하는 지도부를 지지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트럼프 관세 조치로 인해 촉발된 이번 갈등은 호주 사회에 정치·경제적 변화를 동시에 몰고 왔다.
5월 총선이 임박한 지금, 노동당의 지지율 상승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과연 앨버니지 총리가 호주를 다시 안정궤도로 이끌 수 있을지, 그리고 관세 협상이 어떤 형태로 마무리될지가 호주 미래에 큰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