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일이 뜻대로 안 풀리거나, 큰 좌절을 겪고 다시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적잖은 위안을 주는 말이다. 무수한 실패를 딛고, 방황의 날을 이겨내고, 눈물과 땀을 누적해 이룩한 성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 같아서 경탄과 찬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끝없이 의심한다. 어릴 때 자기 재능을 알아내 젊어서 재능을 꽃피우는 게 더 좋아서이기도 하고, 느리게 재능을 꽃피우는 건 너무 힘들어서이기도 하다. 『판단력 비판』에서 이마누엘 칸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천재란 어떠한 특정한 규칙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내는 재능이다. 그것은 어떤 규칙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숙련의 소질이 아니다.” 창조는 숙련과 상관없다. 천재란 하늘에서 떨어진 듯 갑자기 나타나 낡아빠진 우리 인식을 뒤흔들고 세상을 뒤바꾸는 괴물 같은 존재의 이름이다.
조직과 집단이 겨루는 정치나 사업 같은 영역에선 혹여 만년에 큰 성취를 이루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쌓인 경험과 숙련된 운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디어나 재능이 중요한 문학이나 예술 같은 분야에서도 대기만성이 가능할까. 대부분 헛된 시도만 반복하다 외롭고 쓸쓸히 삶을 끝맺지 않을까. 그렇다면 불굴의 의지와 끈질긴 노력으로 뒤늦은 성취라도 이루려는 마음은 재능 없는 자를 위한 위안에 불과할까.
『천재와 거장』(글항아리)에서 데이비드 갤런슨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는 예술 영역에서도 늦게 이루어지는 큰 그릇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예술가를 천재와 거장으로 나눈다. 천재는 젊은 나이에 눈부시게 등장해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들로, 대개 30대 전후에 이미 예술적 성취의 정점에 오른다.
거장은 정반대다. 이들은 나이 들수록 작품이 개성을 얻어가면서 노년에야 비로소 걸작을 남긴다.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T. 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오슨 웰스 등이 천재에 속한다면, 폴 세잔, 마크 로스코, 로버트 프로스트, 찰스 디킨스, 알프레드 히치콕 등은 거장에 속한다.
경제학자답게 갤런슨은 이 불멸의 예술가들 작품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대신 계량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작품의 경매 가격 변화에 중점을 두고, 교과서 수록 작품 숫자, 미술관 소장 작품 숫자를 장기적으로 추적 조사함으로써 한 작가의 창작 방법과 경제적 가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천재들은 어린 나이에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을 발표하나, 거장들은 나이 먹고 경력이 쌓이면서 점차 작품 가치가 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천재의 그릇은 한순간에 완성되나, 거장의 그릇은 평생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다. 이 창조적인 두 집단의 차이를 낳는 것은 예술가의 태도와 창작 방법이다.
갤런슨에 따르면, 예술 작품 창작은 계획, 실행, 마침의 세 단계를 거친다. 이를 수행할 때 천재들은 ‘개념적 혁신’을 택한다. 이들은 기존 예술을 뒤집거나 뒤틀어 보면서 기발하고 엉뚱하며 새로운 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낯설게 보기가 이들의 주요 방법이다. 따라서 이들은 창작의 첫 단계인 계획 과정에 많은 공을 들인다. 실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다채로운 사고 실험을 거친다.
가령, 피카소는 작품을 그리기 전에 사고 과정을 반복한다. 사전 연구 항목만 400가지에 이를 정도였다. 그는 철저한 계획을 바탕으로 혁신적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실제로 붓을 들 땐 이미 작품을 대체로 완성한 상태였다. 피카소가 입체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나이는 고작 스물여섯 살이었다.
워홀에겐 아이디어가 더더욱 중요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들을 독특한 관점과 기법으로 다루어 예술 작품으로 변형하는 팝아트의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광고 디자이너로 일했던 워홀은 서른여섯 살 때 자신의 최고 걸작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을 그렸다.
피카소나 워홀 같은 천재들은 예술 작품의 세계에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인’ 창조성을 던져 넣는다. 이들 개념적 혁신가는 등장하자마자 예술의 물줄기를 이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굽이쳐 흐르게 한다. 조숙한 천재들의 청년 시절 작품은 노년의 작품보다 값지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40년 후인 67세에 그린 같은 크기 작품보다 네 배나 비쌌다.
거장들은 실험적 혁신의 길을 간다. 실험실의 과학자가 가설을 세운 후, 관찰과 실험을 반복해 원하는 결과를 얻듯, 이들은 예술적 실험을 거듭하고 노력을 덧대가며 조금씩 완성도를 높여간다. 피카소와 달리, 세잔에게 예술은 오랜 노력 끝에 힘겹게 얻은 것이었다. 피카소는 30대에 이미 대가가 되었으나, 같은 나이 때 세잔은 인상파의 둔재답게 어떻게 그려야 할지 잘 몰랐다.
그러나 세잔은 열정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그림을 그리면서 독창적 기법을 찾아 나섰다. 숱한 시행착오와 함께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작품을 수없이 남기면서도 세잔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경험이 쌓이면서 세잔의 작품은 점차 완성도가 높아졌다. 따라서 67세 때 그림의 경매 가격이 26세 때 그림보다 15배가량 높은 건 당연했다. 로스코도 마찬가지였다. 시도와 실패를 반복한 끝에 그는 40대 중반 이후에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세상에내보냈다. 로스코의 작품 중 가장 비싼 <주황, 빨강, 노랑>은 58세에 간신히 완성됐다.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경로를 밟아 창의성에 도달한다. 영감이 넘치고 아이디어가 샘솟는 천재형 혁신가는 청년 시절에 위대한 창조성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른 성취는 이들을 ‘작가의 벽’ 앞으로 몰아가곤 한다. 초기 성취에 매달려 더 이상 창의적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하거나, 틀에 박힌 사고를 반복하면서 자기 작품 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심하면 두려움과 불안 탓에 아예 작품을 못 쓰는 일도 벌어진다. 새뮤얼 콜리지, 클로드 모네, 잭슨 폴록 등은 오랫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이들은 이전의 혁신을 활용할 수 없도록 끝없이 새로운 문제에 도전해야 창조성을 지킬 수 있다.
거장형 혁신가는 창의성 발현에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들에겐 끈질긴 인내와 노력에 못지않게 지인들의 응원과 도움이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나친 완벽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자기 눈에는 충분치 않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이라면 일단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칭찬이든 비판이든 판단을 받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작품을 감추기보다 발표하면서 느리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지, 자칫 완성에 이르기도 전에 건강이 악화하고 돈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작품을 지속할 수 없어진다. 창조성을 발휘하고 싶다면, 자신이 어떤 유형의 혁신가인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인지, 끈질긴 노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인지에 따라 혁신의 길이 달라진다. 빠르냐 느리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목표에 도달한다면, 위대함을 얻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