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소설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Traumnovelle)>(1926)는 100년 가까이 지난 고전이면서 동시에 현대에도 익숙한 작품입니다. 할리우드 스타 톰크루즈와 니콜 키드먼 주연, 영화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의 원작이 바로 <꿈의 노벨레>입니다.
큐브릭 감독이 이 영화를 완성한 뒤 일주일 만에 사망해 그의 유작으로 남았고,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실제 부부였던 시절 ‘부부의 은폐된 욕망’을 주제로 촬영한 뒤 결국 이혼하면서 더 유명해진 묘한 작품입니다. 왜 이 작품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살아남았고, 또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을까요. 몽환과 욕망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꿈의 노벨레>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남편 프리돌린과 아내 알베르티네(영화에선 남편 윌리엄과 아내 앨리스)가 침실에서 전날 동행했던 가면무도회를 회상합니다. 무도회에서 부부는 처음 본 이성에게 각각 유혹을 받았습니다. 프리돌린은 망토식 가면을 착용한 여성과 잠자리를 가질 뻔했고 알베르티네도 이국적으로 생긴 최상류층 남성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는 배우자의 투정 섞인 질투에 자신은 절대 외도를 하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오리발을 내밉니다. ‘그들은 무도회에서 만난 이름 모를 파트너가 발산했던 매력의 정도를 짐짓 과장했고, 상대방이 드러낸 질투 섞인 흥분을 비웃으며 자신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16쪽) 그러나 가벼운 농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둘은 숨겨진 욕망을 발설하고야 맙니다. 지난해 덴마크로 떠난 휴가에서, 알베르티네는 한 남성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한다면 프리돌린과 딸을 버리고 그 남자품에 안겼으리라고 고백합니다. 프리돌린도 덴마크 해변의 한 탈의실에서 실수로 15세 소녀의 나체를 본 뒤 쓰러질 뻔한 욕망을 느꼈다고 털어놓습니다. 열어선 안 될 부부 사이의 ‘판도라의 상자’가 개봉됐습니다.
대화 직후 프리돌린의 하룻밤 여정이 시작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 나흐티갈은 새벽 2시 열리는 비밀 연회의 입장 암호를 프리돌린에게 알려줍니다. 검은 가면과 수도승 복장을 대여한 프리돌린은 연회장에 몰래 침입해 집단 성교 파티를 구경하다 결국 발각되어 쫓겨납니다. 새벽 4시, 집에 돌아오자 알베르티네가 “무서운 꿈을 꾸었다”라며 울먹 입니다. 온몸이 꽁꽁 묶인 프리돌린 눈앞에서 알베르티네가 다른 남성들과 나체로 성교하는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프리돌린은 발각 자체만으로 죽을 수 있던 나체 연회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고(꿈같은 현실), 알베르티네는 숨겨야 할 꿈 얘기를 왜 울부짖으며 프리돌린에게 말한 걸까요(현실 같은 꿈).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을 본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이 작품은 정말 아슬아슬할 정도로 외설적입니다. 실현되진 않지만 끊임없이 다른 여성을 탐하는 남편 윌리엄(소설의 프리돌린)의 욕망, 현실은 아닐지언정 꿈에서 결국 다른 남성과 불륜관계를 갖는 아내 앨리스(알베르티네)의 욕망이 뒤섞이면서 ‘위험한 영화’라는 생각도 품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아이즈 와이드 셧>과 <꿈의 노벨레>의 본질적인 주제는 단지 성욕의 솔직한 노출과 그로 인한 파국이 아니라 규 범적 세계와 욕망의 세계의 긴장과 화해를 이야기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프리돌린이 알베르티네에게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느끼는 건 사실입니다. (영화에선 해군장교와 잠자리를 갖는 앨리스의 모습이 윌리엄의 상상 속에서 반복되지요.) 프리돌린은 생각합니다. ‘이 여자야말로 자신의 꿈을 통해 폭로된 그대로였다. 정조도 없고, 잔혹하고, 배신행위를 밥 먹듯 하는 그런 여자였다.’(115쪽) 그러나 동시에 프리돌린은 사랑도 느낍니다. ‘증오하기로 작정한 것만큼이나 변함없는, 단 지 좀 더 마음 아픈 애정’을 독백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프리돌린은 잠든 아내를 보며 ‘우리 사이의 한 자루의 칼’이라는 두 사람 사이의 은유를 혼자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살의(殺意)를 품을 정도의 원수 같은 배우자이면서 동시에 같은 장소에 나란히 누워 사랑을 도모하는 애인이란 이중성. 그것의 이름이 바로 부부일 겁니다.
규범의 세계에서 불륜과 욕망은 불허됩니다. 그와 동시에, 욕망을 삶의 기저에 품은 인간으로서는 규범의 세계를 이탈 하려 합니다. <아이즈 와이드 셧>과 <꿈의 노벨레>는 단지 저 욕망이 유발하는 이중성의 폭로극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성숙한 남녀 관계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마지막 장의 대화에서 알베르티네(앨리스)는 프리돌린의 미숙함을 넘어섭니다. 알베르티네는 프리돌린에게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감사해야 한다”라고, “우리는 그 깊은 모험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깨어났군요.”(163쪽)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기 안의 괴물 같은 욕망에 대해 두 사람이 공히 인정하고(욕망의 긍정), 그 욕망의 괴물을 제3자로서 객관화하여 멀리 떠나보냄으로써 두 사람은 하룻밤 욕망의 모험극에서 이탈해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단지 욕망의 고통이 아니라, 욕망을 공유함으로써 떠나보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아이즈 와이드 셧> 첫 장면에서 윌리엄과 앨리스의 딸 헬레나는 엄마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봐도 되느냐고 물어봅니다. 하룻밤 벌어질 심연의 모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이 영화 전체가 몽환의 활극임을 이미 선언하고 있습니다.
<꿈의 노벨레>는 100년 전 소설이지만 2010년 문학동네 판, 2020년 문학과지성사판(개정판)으로 출간되어 서점에서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1997년 문학과지 성사 초판을 저본 삼았습니다.) 170쪽짜리 중편이어서 밑줄 그으며 공들여 읽어도 세 시간이면 완독 가능합니다. <아이즈 와이드 셧>에는 원작에 나오지 않는 몇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앨리스가 자신을 유혹하는 바람둥이 산도르 사보스트와 함께 라틴 시인 오비드의 명저 <사랑의 기술>을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앨리스는 자신을 유혹하려는 사보스트에게 “(<사랑의 기술>을 쓴 라틴 시인 오비드는) 혼자 울면서 외톨이가 된 사람”이라고 말하고, 사보스트는 “그러나 그(오비드)는 그 전에 아주 좋은 시절을 보냈다”라고 항변합니다. 오비드는 <변신 이야기>로 유명한 오비디우스(B.C.43~A. D.17)를 뜻하는데 그의 대표작 <사랑의 기술>은 남녀가 이성을 유혹하는 구체적인 방법, 그리고 이별의 슬픔을 치유하는 방법 등을 기술한 3권짜리 책입니다. (일종의 연애 지침서이지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사랑의 기술>을 영화에서 언급한 건 아무래도 ‘욕망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이야기하려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자아의 욕망은 결국 외톨이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임을 영화는 친절하게 은유하고 있습니다.
영화에만 나오는 또 다른 지점은 바로 윌리엄이 비밀연회에 들어가며 말하는 암호 ‘피델리오(Fidelio)’입니다.
소설의 암호는 ‘덴마크(앞에서 설명했지만 덴마크는 소설에서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 부부가 외딴 욕망을 품었던 장소이지요)’였지만 영화에선 암호가 ‘피델리오’로 바뀌었습니다. <피델리오>는 베토벤이 남긴 유일한 오페라입니다. 아내 피델리오가 남장을 하고 교도관 조수 피델리오가 되어 감옥에 갇힌 사랑하는 남편 플로레스탄을 구출하는 내용을 담은 오페라입니다. 2년간 불법으로 투옥됐던 플로레스탄 이 죽음에 직면하자 레오노레는 그제야 가면을 벗고 자신이 플레스테안의 부인인 피델리오임을 선언합니다.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피델리오’가 암호명으로 사용된 건 굉장한 함의를 지닙니다. 영화에서 윌리엄은 그 장소에 몰래 숨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죽을 수도 있었지만 가면을 쓴 한 여성의 희생으로 구출됩니다. 훗날 윌리엄은 그 여성이 결국 자신의 아내였던 앨리스와 동일인물이었음을 확인합니다. (앨리스가 어떻게 연회에 참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어차피 윌리엄의 몽환에서 이뤄진 초현실 속 이야기이니까요.) 앨리스는 윌리엄의 꿈에 동참해 윌리엄을 구출한 뒤 자신의 숨겨졌던 욕망까지 고백한 겁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확인한 뒤 “모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윌리엄이 “피델리오”를 외치며 비밀의 성에 입장하는 건 자신을 구해줄 운명은 결국 단 한 사람, 자신의 아내였음을 무의식적으로 선언한 행위와 같습니다. 매번 이탈하려는 자기 내면의 욕망과 그 대척점에 선 규범 사이에서 인간은 규범을 선택할 때 자신의 욕망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욕망을 품는 나약함이 또 인간 본연의 모습이겠지요.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의 긴장과 화해, 그게 바로 ‘한 자루의 칼’을 사이에 두고 누운 남녀의 영원한 초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