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하다’는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상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 어떤 경계선 위에서 숨죽여 균형을 잡은 태도다. 이 말에는 삶을 읽는 감각과 사람의 품격, 그리고 세상을 재는 절도가 함께 녹아 있다.
하지만 적당함만큼 까다로운 덕목도 드물다. 무언가를 이루려는 마음이 앞서면 성급히 선을 넘기 일쑤다. 반대로 조심스레 발을 빼려 하면 어느새 중심을 잃고 미적지근해진다.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는 예민한 분별력과 오랜 훈련이 뒤따라야 한다. 감각을 벼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긴 수행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섬세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는 극단으로 치달으며 타협을 무기력의 다른 이름으로 여긴다. 토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혐오가 그 빈 공간을 차지했다. 부동산 정책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교육은 스펙 경쟁이라는 수렁에 빠져 아이들의 숨통을 조인다. 온라인 공간에는 자극적인 언어와 분노가 넘친다. 큰 소리만 살아남고, 조용한 균형은 자취를 감춘다. 사회 전체가 마치 너무 진하거나 너무 밋밋한 커피 같다. 향기는 날아가고 온기마저 식어버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덕목이 과도함과 부족함 사이 어딘가에 깃들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를 ‘메소테스’라 불렀다.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에서 피어나고, 절제는 방임과 억압 사이에서 꽃핀다는 것. 공자는 <논어>를 통해 중용을 실천하는 이가 드물다는 것을 간파했다. 적당하적당하게 행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적당함은 우유부단이나 대충 넘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예리한 분별력이자, 단단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절제의 힘이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부터 ‘적당함’의 미덕을 잃어버렸을까. ‘빨리, 세게, 확실하게’만을 외치는 사이에 ‘천천히, 적당히, 균형 있게’는 뒷전으로 밀려난 게 아닐까 싶다. 모든 사안이 진영 논리로 갈라지고, 성공은 오직 숫자와 속도로만 평가 받는다. 여유와 사색이 사라진 자리에서 균형은 무능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닌다. 그 사이에서 적당함은 점점 빛이 바래고 흐릿한 모호함으로 치부된다.
허나 실상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자극의 결핍이 아니라 균형의 실종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이제 다시 ‘적당히’를 화두로 삼아야 할 때다. 정책은 시장의 목소리와 공공의 가치를 적절히 조율하고, 교육은 경쟁과 창의, 공동체의 정신을 고르게 배합해야 한다. 정치는 이념과 실용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고, 미디어는 자극과 성찰 사이에서 적절한 온도를 맞춰야 한다.
‘적당하다’는 말은 자칫 ‘대충’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적당함은 어설픈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깊고 엄격한 분별력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안으로는 치열하되 밖으로는 담담한 태도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나 거센 구호가 아니라, 오래된 미덕 하나를 다시 꺼내서 닦아 쓰는 일일지 모른다. 적당히, 그러나 깊이 있게. 그 균형의 언어를 다시 마음에 새기고 살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