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쇼핑몰을 운영하는 30대 자영업자 A씨는 대금정산을 위해 은행을 찾았지만 계좌가 정지됐다는 답변을 들었다. 홈페이지 내 표시해둔 자신의 계좌로 누군가 30만원을 입금한 후 보이스피싱 피해를 신고한 것이 원인이었다. A씨는 은행에 지급정지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추가 피해자 확인 등에 2달 넘게 걸린다는 답변을 들었다. 발만 동동 구르던 A씨는 사기범으로부터 지급정지를 풀어줄 테니 300만원을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최근 B씨는 자신의 통장에 30만원이 입금된 것을 확인했다. 돈이 들어올 일이 없어 당황하던 B씨는 곧이어 계좌거래가 정지됐다는 은행의 통보를 받았다. ‘통장묶기’ 혹은 ‘핑돈’이라는 금융사기에 당한 것이다. 이에 은행 영업점에 찾아갔지만 B씨는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답변만 받았다. 이에 경찰서에 간 B씨는 피해를 호소했지만 “금융감독원 아니면 은행에서 상담해라”라는 말만 듣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인 ‘통장묶기·핑돈 사기’가 성행하면서 금융권과 정치권이 대응에 나선 분위기다. ‘통장묶기’란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돈을 제3자의 계좌에 소액 입금하고, 이를 근거로 금융기관에 신고해 해당 계좌를 거래정지시키는 수법이다.장묶기’란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돈을 제3자의 계좌에 소액 입금하고, 이를 근거로 금융기관에 신고해 해당 계좌를 거래정지시키는 수법이다.
이 사기 유형은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을 악용한 새로운 금융범죄 수법이다. 이 법에 따라 은행은 보이스피싱 신고가 접수되면 즉시 해당 계좌를 지급정지해야 한다. 물론 신고인(사기꾼)이 요청하면 지급정지를 바로 풀 수 있지만, 신고를 당한 피해자(제3자)가 지급정지를 바로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통장묶기’ 피해자가 동결된 계좌를 풀기 위해선 신원 미상의 송금인과 합의해야 한다. 하지만 송금인과 연락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계좌 정상화까지 대략 3개월이 걸린다.
결국 피해자는 금융당국에 피해를 신고하고 여러 절차를 거쳐서 구제 신청을 받을 수는 있지만, 이미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이고 그동안 겪게 되는 지급정지로 인한 피해는 가늠할 수 없다. 특히 당장 하루하루 금융거래가 급한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범죄 유형이다.
사기꾼들은 이 점을 이용해서 통장이 묶인 피해자에게 접근해 현금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면 신고를 취하해준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피해자는 수개월 동안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통장의 금융거래가 불가능해짐으로써 생기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최근에는 4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유명 유튜버도 ‘통장묶기’ 피해를 호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종 금융사기다 보니 통장묶기의 별도 통계는 아직 없다.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 이용계좌 지급정지 건수로 통장묶기 피해 건수를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급정지 건수는 2020년 2만191건, 2021년 2만6321건, 2022년 3만3897건, 지난해 상반기 1만8000건으로 계속 급증하고 있다.
다행히 이 같은 ‘통장묶기’ 사기에 대응하는 내용을 반영한 보이스피싱법(전기통신금융사기특별법) 개정안이 지난 2월 1일 국회를 통과했다. 계좌 지급정지를 당한 피해자가 해당 계좌는 보이스피싱에 이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객관적으로 소명하면 피해 의심 금액(사례의 3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거래를 풀어주도록한 것이다.
기존에는 다음과 같은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①피해자가 자신의 계좌 은행(A은행)에 자금 반환 의사를 전달하고 ②A은행은 송금 은행(B은행)에 자금 반환 의사를 표시한다. ③B은행은 송금인(보이스피싱 피해자)과 합의한 뒤 ④피해자로부터 돈을 받아 송금인에게 돌려준다. ⑤그 이후 송금인이 피싱 피해구제 신청을 취소해야 ⑥피해자의 지급정지가 해제된다.
개정안은 또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간편송금 방식을 통해 이전시킴으로써 계좌의 추적을 어렵게 하는 지능적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해서도 금융회사-간편송금업자 간 계좌정보 공유를 의무화해 범인 계좌에 대한 신속한 지급정지 및 피해금 환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은행권도 빠르게 대응하는 분위기다. 특히 케이뱅크는 선제적으로 ‘통장묶기 즉시해제 제도’를 도입해 고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케이뱅크 관계자는 “통장묶기 즉시해제 수치를 밝힐 수는 없지만 고객들이 신청해 지급정지가 해제된 여러 사례가 있다”고 밝혔다.
케이뱅크는 피해자 계좌에 걸린 지급정지 조치를 해제하는 데 드는 시간을 1시간으로 줄였다. 고객이 지급정지 이의제기를 접수하면, 케이뱅크는 신속하게 검증절차를 진행한다. 범죄 혐의점이 없다고 판단되면 ‘통장묶기’를 위해 입금된 금액(통장)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통장)은 지급정지를 해제한다. 즉 범죄에 악용된 통장만 남기고 나머지 통장은 거래를 풀어주는 ‘부분해제’의 개념이다. 이때 피해자의 신원은 신분증, 영상 통화 등으로 인증한다. 실제 피싱범일 경우 스스로 신원을 밝히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을 활용해 범죄 혐의점 여부를 파악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계좌거래 내역 분석도 함께 진행한다. 필요 시 금융 유관기관과 협업해 추가 검증도 수행한다.
케이뱅크의 이 같은 조치는 모든 거래가 비대면으로만 이뤄지는 인터넷전문은행의 강점을 살렸다는 평가가 많다. 통상 시중은행의 경우 지급정지 해제를 하기 위해서는 고객이 신분증을 가지고, 가까운 은행 영업점을 방문해 취소신청서를 포함한 관련 자료를 모두 구비해 소명해야 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통장묶기 지급정지 해제를 도입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보이스피싱 계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는 8월 보이스피싱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인터넷은행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으로도 ‘통장묶기 즉시해제 제도’가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는 8월까지는 여전히 ‘통장묶기’ 범죄가 성행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자신의 계좌에 ‘핑돈’이 입금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핑돈’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입금된 돈을 의미한다. 핑돈은 언제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입금된 후 제대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핑돈 때문에 통장묶기 피해를 당한 경우 젊은 세대라면 범인을 찾아 나서려 할 가능성이 높다. 통장묶기로 협박하는 일당들은 입금자명을 자신들의 텔레그램 계정명으로 보낸다고 한다. 이는 피해자들이 텔레그램 ID를 검색해서 대화를 걸게 하려는 수법이라는 해석이 많다.
텔레그램 ID를 찾아서 피해자가 대화를 걸고, 계좌 지급정지를 풀어 달라고 요청하게 되면 피의자들은 돈을 요구한다. 답장을 하지 않으면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추가로 입금해서 계좌 정지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자들은 결국 계좌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돈을 보낼 수밖에 없다. 특히 생활비, 공과금, 등록금 등을 이체해야 하는 계좌가 막힌 경우 빨리 풀어야 한다는 마음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답답하겠지만 피해자가 직접 피의자를 접촉해 돈을 입금해선 안 된다.
피의자가 요구하는 돈을 보내는 것은 결코 올바른 핑돈 대처법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뜻대로 휘둘리는 것이다. 핵심은 가급적 피의자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 것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통장묶기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주면 동결을 풀어줄 수 있다는 식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것이 전형적이지만 동결을 풀기 위해선 반드시 피싱 피해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금전을 요구하는 피싱범에게 절대 돈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우선 피해자는 본인이 사용하는 계좌의 은행에 연락을 취해야 한다. 절대 금융사기에 연루된 계좌가 아니라는 점과 자신도 피해자라는 점을 말하며 해당 은행에 이의제기를 신청해야 한다. 물론 보이스피싱법 개정안 시행 전에는 계좌 정지가 신속하게 풀릴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통장묶기’ 피해 사례를 은행 측에서도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은행에 이의제기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금융사기 대응팀에게 상담받는 방법을 추천한다.
계좌번호와 연락처가 범죄집단에게 수집되지 않도록 개인적인 정보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통장묶기’ 피해 예방법이다. 금융당국도 ▲사기범은 지급정지 해제 권한이 없으므로 합의금을 절대 송금하지 말 것 ▲공개된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계좌번호를 노출하면 통장묶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주의할 것 ▲개정 법률 시행 이전까지는 통장 협박에 응하지 말고 합의중재를 은행에 요청할 것 등을 당부했다.
[김희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