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불행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 즉 자신의 영역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소설 <향수>의 한 문장입니다.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한 남성이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고자 ‘향기 사냥’에 나서는 이야기지요. 인류가 하찮게 여기던 후각을 통해 인간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이로써 온 세계를 홀리다 자신마저 파멸로 나아가는 이 독특한 내용의 소설은 1985년 발표 후 38년간 생명력을 유지할 정도로 여전히 문제작입니다.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이 분명한 소설 <향수>를 원작 삼은 2007년작 영화 <향수>도 16년간 적지 않은 관객과 만났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향합니다.
배경은 18세기 프랑스. 시체 냄새를 압도할 만큼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생선시장 땅바닥에서 한 사생아가 태어납니다. 생선칼로 자른 탯줄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저 핏덩이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보육원의 가이아르 부인에게 맡겨진 아이는 무두장이 그리말에게 팔려나가고 이어 향수 제조인 주세페 발디니의 제자로 들어갔다가 결국 ‘향기의 로마’인 소도시 그라스로 길을 떠납니다.
그르누이는 그곳에서 동물성 유지와 알코올을 활용해 향기를 액화하는 향기 추출법 냉침법(冷浸法)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르누이에겐 ‘향기의 소유’라는 원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 방법이 살인일지라도 말이지요. 그르누이는 냉침법으로 통정(通情)하지 않은 여성 13명(소설에선 24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시체에서 향기를 추출해 목적을 이룹니다.
역겹고 떨리는 줄거리지만 향기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광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한 데다 당대 냄새나는 파리 거리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실증이 뒷받침된 덕분에 <향수>는 소설과 영화 두 장르에서 모두 칭송을 받았습니다. 두 작품은 서로 길항하는 작품이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살인 묘사부터 그르누이의 내면이 다르게 표현되지요.
아시다시피 그르누이는 노란 자두를 파는 소녀의 황홀한 냄새를 뒤따르다 교살하고 맙니다. 영화에서 그르누이의 첫 번째 살인은 사고이자 실수였습니다. 무두질하던 억센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데, 소녀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뒤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지요. 심지어 영화 후반부에선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립니다.
소설의 그르누이는 다릅니다. 그는 반성 없는 악인입니다. 소녀를 죽인 그날 밤, 그르누이는 거대한 만족감에 웃음 짓습니다. ‘그날 밤 그르누이에게는 골방이 궁전이었고 널빤지로 만든 침대는 천국의 침대였다. 그는 행복으로 온몸이 떨렸으며, 다시 태어난 정도가 아니라 이제 처음으로 태어난 기분이었다’(소설 72쪽, 2020년 4월 출간된 열린책들 신판을 저본 삼았음). 그르누이에게 죄책감은 없습니다. 황홀한 향기를 처음으로 ‘경험’한 행복감에 도취된 악마지요.
불가피하게 여성을 희생양 삼는 영화 속 그르누이와 죄책감 없이 여성을 ‘사냥’하는 소설 속 그르누이는 다른 인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듭니다. 단지 소설의 그르누이가 태생적인 사이코패스로만 묘사됐다면 소설 <향수>가 40년 가까이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소설 <향수>에는 그르누이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도 죄악을 범할 정말 강력한 ‘살해 동기’가 있었습니다. 살해 동기가 분명해야 이 소설의 그르누이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가능할 테니까요. 이것이 영화와 소설의 결정적 차이점이기도 하지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설명됩니다.
소설은 먼저 ‘인간의 냄새’에 대해 사유합니다. 진하든 옅든 거북하든 황홀하든 ‘냄새’가 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소설에서 인간의 냄새는 ‘육욕의 냄새이자 죄악의 향기’로 묘사됩니다(소설 28쪽). 신이 만들어낸 인간의 냄새는 그르누이가 생각하건대 ‘기가 막힐 정도로 형편이 없는’ 악취의 세상일 뿐입니다(소설 243쪽).
이 때문에 그르누이는 (영화엔 통째로 생략돼 있지만) 먼저 인간의 냄새부터 재현하려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자 그는 이제 신의 냄새, 아니 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냄새가 담긴 향수를 만들고자 하고 결국 목표를 달성합니다. ‘그 스스로가 정말로 신이었다. 교회에 있는 그 역한 냄새의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신이었다’(소설 367쪽). 소설의 그르누이에겐 죄책감보다 인간을 초월하는 목표가 더 강력한 동인으로 남아있던 것이지요.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영화에서 그르누이의 살해 동기는 후각이 주는 쾌(快)입니다. 그러니 그 쾌의 공허감을 느꼈을 때 후회가 밀려오지요. 그러나 소설의 살해 동기는 신의 권능을 향한 도전으로 격상됩니다. 인간의 몸에 흐르는 기름기에서 냄새를 빨아들이고, 이를 알코올에 세척해 신조차 만들 수 없는 향기를 만드는 것. 마치 죽은 자의 유령이 나타난 것처럼 불사(不死)의 향기를 소유하는 것. 그것이 소설 속 그르누이의 목표가 되고, 이 목적엔 공허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죄책감이 끼어들 틈이 없지요.
앞서 기술한 대로, 소설의 그르누이가 먼저 집착한 건 인간의 냄새입니다. 남들의 몸에서 나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그르누이에게선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등에서도 머리칼에서도 땀구멍에서도 그르누이는 사람이라면 응당 나기 마련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그는 무취(無臭)의 인간이지요. 영화 <향수>가 소설 <향수>보다 완성도가 낮다고 평가되는 건 그르누이 신체의 무취 현상과 그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왜 무취이며, 또 그 무취의 의미가 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동굴 속 그르누이가 빗물로 몸을 씻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정도로요.
그르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냄새가 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주 버림받았습니다(“이 사생아 몸뚱어리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니까요.” 소설 20쪽, 생 드니 거리의 유모 잔 뷔시의 말). 그런데 이 냄새 없는 아기는 마치 타인의 냄새를 ‘평가’하듯이 콧구멍을 자주 벌렁거립니다(‘이 아이는 자신의 피부 속까지 뚫고 들어와 뱃속 가장 깊은 곳의 냄새까지 맡고 있었다. 가장 부드러운 감정, 가장 추악한 생각들까지 이 집요한 작은 코 앞에서는 완전히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소설 30쪽)
자신은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타인의 냄새를 심부까지 맡아버리는 아기…. 어쩐지 기시감이 들지 않나요. 인간의 냄새는 죄악의 증거라고 저자 쥐스킨트는 소설에 여러 차례 서술했습니다. 서구사에서 죄악(원죄) 없이 태어난 아기는 오직 한 명뿐이었습니다. 타인의 죄악을 평가(심판)하러 온 이도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바로 나사렛의 예수입니다.
저자 쥐스킨트가 그르누이를 예수의 현시(現示)인 양 묘사한 부분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르누이는 최후의 장면에서 거리의 부랑자들이 자신을 ‘뜯어먹도록’ 몸을 내어주지요. 그의 신체는 서른 조각으로 잘리고 사람들은 그르누이의 몸을 ‘섭취’한 뒤 풍족한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자기의 살을 내주는 신이란 모티브는 성경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르누이가 극 중 ‘X자 십자가형’을 언도받았다는 점, 주교조차 무릎을 꿇고 그르누이를 받아들이며 메시아로 모신다는 점, 그의 이름 밥티스트(Baptist)의 뜻이 ‘세례를 주는 사람’이란 점 등 소설 <향수>가 신약성경의 패러디라는 증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그르누이가 출생한 생선좌판대 밑은 곧 천한 마구간 구유와 같으며, 그가 마차를 타고 등장한 사형집행장은 예수가 나귀를 타고 입성한 예루살렘성이 됩니다. 마가복음에선 예수에게 겉옷을 벗어 드리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영화 <향수>의 그르누이도 푸른색 정복으로 갈아입지요. 천국과 구원은 높은 곳이 아닌, 코끝의 냄새에 있던 걸까요.
종교적인 해석 너머에서 <향수>의 또 다른 성취는 중세 합리주의와 종교적 신성을 무참하게 희화화했다는 점입니다. 그르누이의 연쇄살인이 그라스의 공기를 뒤흔들자 부집정관과 주교는 이 사건을 이성적으로 해결할 것인지 종교적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놓고 충돌합니다. 부집정관은 합리주의를, 주교는 종교적 신성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이성의 합리주의도 신성의 종교도 인간의 욕망(후각)을 통제할 수 없음이 증명되고, 이후 관객도 독자도 끔찍하고 역겨운 연쇄살인마 그르누이를 통해 일종의 영웅적 면모까지 감지해내지요. 이 영웅은 인간의 만들어낸 통제 수단을 동시에 배격합니다. 이성과 종교를 뛰어넘는 ‘영웅’ 그르누이가 만드는 향수에도 ‘공식’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