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는 이탈리어어로 ‘동정·연민·슬픔’이란 의미이다. 어머니가 아픈 자식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아이가 아프면 어머니도 아프고 아이가 기쁘면 어머니도 기쁘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처음 만나는 존재인 어머니는 바로 ‘피에타’의 화신이다. ‘피에타’는 인간이 접하는 최고의 감정이며 이 감정을 통해 어린아이는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집트 신화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우리에게 알려진 ‘피에타’의 원형이다. 이집트 이시스 여신(이집트어로는 아세트)은 처음에는 중요한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집트 왕좌를 보호하는 여신으로 ‘왕권’의 화신이다. 이시스는 항상 머리 위에 왕좌를 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집트가 기원전 27세기 고왕국시대에 진입하면서 이집트 종교가 혁신적으로 변한다. ‘영생’이 이전에는 파라오만의 특권이었다가 정교한 의례를 행하는 자에 대한 신으로부터의 선물이 됐다. 이시스 여신은 바로 이 이집트 종교의 혁신적인 변화에 가장 중요한 신으로 자리 잡는다.
로마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화에 의하면 이집트의 첫 번째 신이자 왕인 오시리스가 인간에게 법률과 농업을 소개했다.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오시리스를 시기하는 그의 동생인 혼돈의 신 세트는 잔치를 열어 신들을 초대했다. 세트는 모든 신들이 소유하기를 가장 흠모하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든 관을 하나 준비했다. 이 관은 세트가 자신의 형 오시리스 몰래 그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해 만든 것이었다. 세트는 이 백향나무 관과 정확히 몸의 크기가 일치하는 신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한다. 여러 신들이 그 목관에 들어가 보았지만 크기가 맞지 않았다. 마침내 오시리스가 들어가니 꼭 맞았다. 그 순간 세트의 부하들이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 나일 강에 띄워 보냈다.
오시리스를 실은 관이 흘러 지중해로 진입해 레바논의 비블로스 항구에 떠밀려 도착했다. 오시리스의 시신이 담긴 관 주위에 커다란 백향목이 자랐다. 비블로스의 왕은 그 나무를 잘라 자신의 궁궐을 만드는 기둥으로 삼았다. 이시스는 마술의 신 토트의 도움을 받아 오시리스의 시신이 있는 관을 백향나무 안에서 꺼냈다. 시기에 불타는 세트는 다시 오시리스의 시신을 훔쳐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그 후 이시스는 다시 기적적으로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아 부활시켰다. 이시스는 마술적으로 죽은 오시리스의 시신을 통해 임신한다. 임신한 이시스는 세트를 피해 이집트 삼각주의 갈대밭에서 태양신인 호루스를 잉태해 키운다. 마술의 여신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부활시키고 호루스를 처녀 잉태한 이집트 최고의 신으로 등극한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등장하면서 이시스 숭배가 이집트 전역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문화와 그리스 헬레니즘을 하나로 엮을 종교제의를 찾았다. 프톨레미 소테르왕은 이시스 신앙을 그리스-로마사회에 접목시킨다. 오시리스는 ‘세라피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하데스로, 이시스는 그리스의 데메테르와 아프로디테로 동일시됐다. 이시스, 오시리스, 그리고 호루스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세 명의 거룩한 세 신들’ Holy Trinity로 신앙의 대상이 됐다.
이 세 명의 신들 중 가장 중요한 신은 바로 이시스이다. 이시스는 재생의 신이자 가난하고 병든 자의 신으로 자리 잡는다. 이시스가 처녀 잉태한 호루스를 젖 먹이는 동상은 이시스 신앙이 로마제국 안에 퍼지면서 가장 익숙한 종교 아이콘이 됐다. 특히 기원후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의 관계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형성에, 이시스의 호루스 처녀 잉태는 예수의 탄생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피에타’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에 대한 세 가지 예술적인 표현들 중 하나였다. 다른 두 가지 표현은 ‘마테르 돌로로사(슬픔의 어머니)’와 ‘스타바트 마테르(어머니가 여기 서있다)’이다. ‘피에타’는 독일에서 1300년경부터 ‘베스페르빌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베스페르빌트’란 저녁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그림이나 조각을 의미한다. 이 예술품을 보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찢겨진 몸을 자신의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한다. 이전의 유사한 이집트 이시스-호루스 동상이나 초기 그리스도교 마리아-아기예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들이 있다. 이전의 조각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만 ‘피에타’의 예수는 죽은 모습으로 절망과 슬픔을 묘사한다.
‘피에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킨 최고의 조각가는 미켈란젤로이다. 이탈리아 카프레세에서 1475년 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나 1년 후 회화를 그만두고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는 예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메디치가의 로렌조 집안에서 기거하면서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가 23세가 되던 해 로마에 파견된 프랑스 추기경이었던 장 빌에르 드 라그롤라는 그의 무덤에 배치할 조각품을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한다. 그는 거의 2년 동안 커다란 대리석판을 자르고, 갈고, 광을 내 이전 북유럽 스타일과 다른 ‘피에타’를 조각한다. 북유럽 조각가들은 과장된 몸짓, 상처, 표현으로 슬픔을 표현하려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시도했다.
마리아는 순결한 여인으로 똑바로 앉아 예수를 그녀의 무릎 위에 안고 있다. 여기에는 과장이 없고 예수의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몸에서는 죽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탄력이 있다.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깨우면 금방 일어날 것 같은 모습이다.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과 몸짓은 영광스러운 자기희생의 미션을 마친 아들을 위로한다.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젊은 여인으로 묘사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인 ‘피에타’는 동서고금을 통해 창조적으로 재생산된 인간이 갈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배철현 교수
고대오리엔트 언어들에 매료되어 하버드대 고대근동학과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언어문명 주임교수이다.
주요 관심사는 고대오리엔트 문명인 후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주요 저서로는 <타르굼옹켈로스 창세기> <타르굼아람어문법>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그리다> 등이 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창간 제25호(2012년 10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