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3일, 미국에서는 인공지능(AI) 모델을 훈련할 때 저자의 허락 없이 책을 활용해도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기업들이 무단으로 저작물을 활용한 것은 맞지만 저작물을 허락 없이 합법 이용할 수 있는 ‘공정 이용’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은 AI 모델을 둘러싼 첫 저작권 판결 사례로 AI 업계가 일제히 주목한 사건이었다. AI 모델을 개발하는 빅테크 기업들과 작가, 언론사, 스톡 이미지 기업처럼 원본 콘텐츠를 보유한 기업 간의 저작권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소송을 진행 중인 AI 기업들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번 판례가 향후 소송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로이터 통신은 공정 이용의 개념을 생성형 AI 분야에 적용한 것은 이번 판결이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AI를 둘러싼 저작권 회색지대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수많은 기업이 법적 소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 외에 AI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대해서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올 초 국내에서도 열풍이 불었던 ‘챗GPT로 지브리풍 이미지 만들기’와 관련해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림체를 무단으로 따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공정 이용 해당… 원본 재현하지 않아.” 앤스로픽의 소송은 지난해 안드레아 바츠, 찰스 그레이버, 커크 일리스 존슨 등 작가 3명이 앤스로픽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 시작이었다. 앤스로픽은 오픈AI의 경쟁사 중 하나로 꼽히는 AI 기업으로, 자체 챗봇 ‘클로드’를 개발한다. 작가 3명은 앤스로픽이 클로드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책을 무단 사용해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윌리엄 알섭 샌프란시스코 연방 판사는 “공정 이용에 해당한다”며 앤스로픽의 손을 들어줬다. 공정 이용은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도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소송 판결문을 살펴보면, 앤스로픽이 책의 인쇄본을 디지털 형식으로 변환해 저장한 다음 이를 복사해 거대언어모델(LLM) 훈련에 활용했다. 알섭 판사는 이 과정이 “매우 변형적(Exceedingly Transformative)”이라며, AI 모델이 학습한 책을 그대로 복제해 재현하지 않기에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것이 책을 그대로 베끼기 위함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변형적으로 저작물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어 알섭 판사는 “작가가 되기를 바라는 독자와 마찬가지로, 앤스로픽의 LLM은 저작물을 복제하기 위해 훈련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인간도 읽고 쓰는 것을 배우기 위해 다른 저작물들을 읽으며 학습하는 것과 유사하다며 인간이 읽었던 내용을 떠올릴 때마다 책의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만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논리로 법원은 앤스로픽이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AI에 학습시키기 위해 디지털로 변환해 저장한 다음 모델 훈련을 진행한 과정이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봤다. 다만 앤스로픽은 돈을 지불해 구매한 책들 외에도 수백만권의 책들을 불법다운로드 사이트에서 내려받아 활용했는데, 법원은 이 같은 행위는 저작권 침해라고 말했다. 알섭 판사는 “합법적으로 구매하거나 접근할 수 있었던 원본 사본을 해적(불법) 사이트에서 다운 받는 것이 ‘공정 이용’에 왜 필요했는지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 같은 행위가 용인될 경우 출판 시장이 파괴될 수 있다며 해당 행위가 야기한 피해에 대해서는 별도 재판을 열고 앤스로픽이 지불해야 할 배상액을 결정할 것이라 예고했다.
앤스로픽에 이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메타도 유사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이 13명의 작가가 메타를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에서 메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해당 판결 또한 앤스로픽의 사례와 유사하게 “AI 훈련은 원작을 단순히 복제한 것이 아니라 변형적 사용에 해당한다”며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AI 업계의 대표 주자군에 속하는 앤스로픽과 메타가 잇따라 승소하면서 AI 기업에 유리한 판례가 적립되는 분위기다. 한 AI 업계 관계자는 일련의 판결에 대해 “AI 기술 발전은 궁극적으로 저작권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창작과 표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인류에게 새로운 가치를 줄 수 있는 AI 학습이 공정 이용으로 인정됐다는 점은 모두에게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며 AI와 저작권자가 갈등하는 구도를 넘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고 전했다. 다만 두 판결로 인해 AI 기업들이 무단으로 학습하는 것이 모두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메타 사건을 담당했던 빈스 차브리아 판사는 “이 판결이 메타의 모든 AI 훈련이 합법이라는 뜻은 아니며, 원고 측이 핵심 쟁점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 주요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저작권자들과 원천 콘텐츠 제작사들은 생성형 AI 서비스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며 강력히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들로서는 AI 기업들이 자사 콘텐츠를 동의없이 무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꼴이며 나아가 무단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AI가 생성하는 콘텐츠들이 역으로 원저작물이 거래되는 시장을 침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뉴스 기사를 학습한 AI가 검색 결과에 언론사 기사 등을 요약해 제공하면, 이용자는 AI가 제공하는 뉴스 요약만 보게 됨으로써 언론사 사이트로의 유입은 감소하게 된다. 게티이미지와 같은 이미지 뱅크의 이미지들을 학습한 이미지 생성 AI로 인해 이미지 뱅크의 수요가 줄어드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들뿐만 아니라 언론사들도 적극 대응하는 중이다. 대부분의 생성형 AI 기업들은 언론사로부터 저작권 침해로 고소를 당한 상황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023년 오픈AI가 뉴스 기사를 무단으로 AI 학습에 사용했다며 소송을 걸었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퍼플렉시티를 상대로 유사한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도 유사한 상황이다. 지상파 3사가 올 초 네이버가 AI 학습에 뉴스 콘텐츠를 무단 활용했다며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고, 한국신문협회도 4월 비슷한 맥락으로 네이버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책과 같은 텍스트의 영역에서는 앤스로픽 재판과 같은 판례가 나왔지만, 이미지 생성이나 음악의 영역에서도 저작권 침해로 인한 문제가 진행 중이다. 음악에서는 지난해 글로벌 음반사인 소니 뮤직, 유니버설 뮤직, 워너 뮤직 등이 음악을 생성하는 AI 서비스를 개발한 수노 AI와 유디오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해당 서비스들이 저작권이 있는 음원들을 무단으로 활용해 AI를 훈련시켰다는 주장이다. 한편, 영화 제작사 디즈니와 유니버설 픽처스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AI 서비스 ‘미드저니’가 자사 캐릭터 이미지를 무단으로 생성하고 있다며 지난 6월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AI에 ‘슈렉’ ‘심슨’ 등 고유 IP(지식재산권)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더니 해당 캐릭터들을 저작권자 동의 없이 무단으로 생성함으로써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미지 뱅크 기업인 게티이미지도 일찌감치 스태빌리티AI, 미드저니와 같은 이미지 생성 AI 기업들을 소송한 상태다. AI 기술 발전이 제도적인 측면보다 빠르게 이루어지다 보니, 아직 이 같은 분쟁에 있어 명확한 답이 있는 상황은 아니다. AI 관련 제도 마련에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유럽연합(EU)의 경우 AI 법의 행동 강령을 통해 불법 복제가 아닌 합법적으로 수집한 데이터만 사용하도록 규정했으며, 저작권자들이 자신들의 저작물이 무단 사용됐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신고할 수 있도록 AI 기업들로 하여금 공식 창구를 마련하도록 했다.
생성형 AI 기업들은 법적 소송을 이어가는 대신, 언론사 등에 콘텐츠 사용료를 지급하는 등 개별 협상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오픈AI의 경우 월스트리트저널, 뉴욕포스트, 워싱턴포스트 등과 콘텐츠를 제휴하고 정식으로 각 언론사의 기사를 활용하고 있다.
앤스로픽과 메타의 재판과 같은 판례가 쌓이고 제도적인 미비점이 보완되면 AI와 저작권을 둘러싼 갈등도 조금씩 해소될 전망이다. 생성형 AI를 활용해 제작한 창작물의 저작권을 어디까지 인정할지도 회색지대다. 그림이나 음악처럼 전문가가 아니면 창작하기 어려웠던 영역도 이제는 누구나 생성형 AI로 쉽게 만들 수 있게 되면서, AI를 활용한 저작물도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공모전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한 작품이 우승하거나, 음악 공모전에서 AI 음원이 상을 탄 경우도 있었다. 지난 2022년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박람회 미술대회에서 디지털 아트 부문 1위를 차지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라는 작품이 생성형 AI를 활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저작권법 제2조 제1호에 따라 저작물을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생성형 AI가 기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은 저작물의 성립 요건을 갖추지 못해 저작권 등록이 어렵지만, 인간이 생성형 AI를 도구로 활용하면서 창작적 기여가 인정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경우 저작물로 인정한다. 예를들어 생성형 AI를 통해 작품을 만들었을 때, 인간이 추가적으로 개입해 작업한 부분에 대해 창작적인 기여를 인정할 수 있다면 저작권 등록이 가능하다. 다만 단순히 생성된 이미지 2장을 합성하거나 색상 변경 등은 창작적 기여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창작적 기여’의 여부는 인간의 개입 정도와 표현 여부, 표현의 구체적인 창작성 등을 기반으로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다만 이러한 기준들은 국가마다 상이해 아직은 과도기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롬프트를 AI에 입력해 이미지를 생성했을 때,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것이 창작적 기여인지에 대해서도 국가마다 입장에 차이가 있다. 미국은 프롬프트만으로는 사용자를 저작자로 만드는 데 충분한 인간 통제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보는 데 반해, 일본은 프롬프트의 분량이나 내용, 생성 시도 횟수 등을 고려해야 창작적 기여가 인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