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4월 15일부터 예정했던 대미 보복관세를 전격 보류했다.
집행위원회가 공표한 ‘이행법’은 7월 14 일까지 90일간 보복을 멈추는 대신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철강·알루미늄 상호관세를 90일 유예하겠다고 밝힌 데 대한 맞교환 카드다.
EU는 애초 3단계에 걸쳐 210억 유로 규모의 미국산 상품에 최대 25%의 추가 관세를 매길 계획이었지만, 일단 총구를 내렸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만족스러운 합의가 없으면 연기된 조치를 즉시 발동할 것”이라며 미국을 압박했다.
동시에 집행위는 “추가 대응 준비는 계속된다”라는 문구를 관보에 남겼다. 90일 유예는 휴전이 아니라 ‘조건부 정전’에 가깝다. 미국이 협상에서 관세 철회를 미루거나 추가 압박에 나설 경우, EU는 언제든 보복관세를 꺼낼 명분을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EU가 진짜로 바라는 것은 보복이 아니라 무역 다변화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중 ‘유럽 패싱’을 시도한 뒤, 브뤼셀은 안보에 이어 교역에서도 ‘脫美화’ 속도를 높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이 전한 내부 분위기는 명확하다. “설령 협상이 잘 끝나도, 예전처럼 미국 한 곳에 기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EU는 이미 UAE와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협상을 개시하기로 했다. 원래는 걸프협력이사회(GCC) 전체와 한꺼번에 협정 체결을 추진했지만, 시급성을 고려해 양자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계 10대 산유국이자 첨단 물류 허브인 UAE는 중동·아프리카 시장으로 가는 교두보다. EU 입장에선 미국 시장 공백을 메울 새 ‘수출 관문’을 확보하는 셈이다.
EU 내부의 판도도 달라지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농업 개방을 이유로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FTA에 반대해 왔지만, 트럼프 발 관세 충격 이후 “지금 이 협정이 필요하다”라고 입장을 바꿨다.
집행위는 올해 안에 메르코수르 협정 비준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다만 프랑스·폴란드처럼 농업보호를 중시하는 회원국이 여전히 신중해 ‘27개국 만장일치’라는 높은 문턱은 남아 있다.
개별 회원국도 발 빠르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베트남을 찾아 고속철·항만 프로젝트 협력을 제안했고, “무역전쟁은 모두를 패배자로 만든다”라며 아세안 과의 교역 확대 의지를 드러냈다.
EU는 또한 중국과 전기차 고율 관세 철회를 놓고 협상을 재개했다. 작년엔 ‘디리스킹(위험 축소)’을 외치며 최고 45% 관세를 부과했지만, “적이 아닌 시장”으로 다시 접근하는 모양새다.
코냑·브랜디에 대한 중국의 반덤핑 조사도 완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정책센터(EPC)의 바르그 포크만 분석가는 “미국 경제 규모를 단기간에 대체할 상대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회원국 이해가 충돌하는 탓에 FTA 비준 속도도 더딜 수밖에 없다.
특히 농업·환경 규제가 까다로운 프랑스는 메르코수르 협정에서 쇠고기 수입 증가를 우려한다. ‘단일 시장 vs. 국가 이익’이라는 EU의 오래된 딜레마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결국 열쇠는 ‘90일의 활용법’에 달렸다. EU가 미국과 관세 갈등을 봉합하면서 동시에 새 시장 개척에 성과를 내면, 글로벌 공급망에서 ‘균형추’ 역할을 강화할 수 있다.
반대로 협상 실패와 FTA 교착이 겹치면, 보복관세가 현실화돼 양측 모두 손해를 떠안게 된다.
EU가 택한 ‘숨 고르기’가 전략적 시간 벌기가 될지, 허송세월이 될지는 여름이 끝날 무렵 판가름 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