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오의 나이는 17세였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였고, 그는 젊은 학자들을 가족 별장으로 초대해 6주간 머무르게 하며 연구를 지원했습니다. 아버지의 보조연구원 자격으로 별장을 방문한 24세 올리버가 엘리오가 사용하던 방을 쓰면서 두 남성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우정인가 했더니 감정의 결과는 사랑이었고, 둘은 깊은 사랑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별장을 떠난 올리버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길은 달라집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두 사람은 오래 전의 추억을 가슴에 담고 살아갑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줄거리입니다. 원작 소설의 제목도 <Call Me by Your Name>이지만 한국에선 <그해, 여름 손님>으로 출간됐습니다. 티모시 샬라메가 엘리오 역을 맡았고 오스카 4개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워낙 화제가 된 영화이기도 하지요. 이 작품은 그저 잘 만들어진 LGBTQ 영화로 오해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 이 영화는 동성애를 소재 삼았지만 동성애에 관한 작품이 아닙니다. 사랑에 관한 보편적 공감이 주제인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깊게 들어가 봅니다.
때는 1983년, 이탈리아 남부의 한 시골도시가 배경입니다. 소년 엘리오는 가족별장에서 여름의 열기를 견디는 중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보조연구원 자격으로 올리버가 이곳을 찾아옵니다. 엘리오는 올리버에 빠져들고, 여름의 열기는 두 사람 간 뜨거운 감정으로 변화합니다.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확립하지 못한 엘리오는 자신의 감정의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탐색을 시작하고, 올리버 역시 동성인 엘리오를 거부하다가 이내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집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처럼 한 소년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성장담으로 해석되지만 영화와 소설을 살펴보면 이 문제가 단순하지 않습니다. 철학적 사유가 가득하니까요. 우선 ‘살구’에 관한 대화를 기억해 봅니다. 영화에서, 엘리오의 아버지 펄만 교수는 보조연구원 올리버와 ‘살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albicocca의 어원에 관해 토론합니다. 펄만은 올리버에게 살구가 프랑스어로 apricot, 독일어로는 aprikose인데 이는 아랍어로부터 파생된 단어라고 설명합니다. alchemy(연금술), alcohol(알코올)처럼 유럽 언어에도 아랍어 접두사 al에서 파생된 단어가 적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 살구 albicocca의 어원이 바로 아랍어 albirquq였다고 자세히 설명하지요.
그러나 올리버는 선배 학자인 펄만에게 대놓고 반문합니다.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요. 올리버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살구의 어원은 아랍어 al-birquq와 연관되는 건 맞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일찍 익는다’는 뜻의 pre-cook, pre-coquere에서 온 praezoquum이란 단어가 존재했고, 이 단어가 praecox로 변형됐다가 prekokkia, berikokki로 다시 변했고, 이 단어가 아랍어 al-birquq로 바뀌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또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하지만 쉽게 말해서 펄만 교수는 아랍어(타자, 즉 원인)로부터 유럽언어(자아, 즉 결과)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는데, 올리버는 이미 아랍어(타자) 안에 유럽언어(자아)가 자리한다고 본 겁니다. 이는 곧 ‘사물과 언어의 모든 인과 관계는 일방향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쌍방향적이다’라는 명제를 결론화하는 대화인 것이지요. 이는 엘리오와 올리버에게 예고된 관계를 응축합니다.
왜 하필 두 사람의 논쟁의 대상이 살구인가에 관해서도 되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살구의 어원인 pre-cook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일찍(早) 익는다(熟)’는 뜻을 가졌습니다. 조숙함은 곧 올리버를 사랑하는 엘리오를 상징합니다. 원작 소설에서 엘리오는 올리버의 신체를 바라보며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살구 빛깔과 모양과 닮은 탄탄하고 동그란 엉덩이. 살구를 만지면 꼭 그를 만지는 기분이었다.’(51쪽) 살구는 단순한 과일이 아닌, 입체적인 상징을 가진 단어인 것이지요.
올리버가 단어 하나에서 인간이라는 우주를 간파해내는 존재라면, 엘리오는 음악의 선율로 사람의 관계를 파악하는 소년입니다. 영화에서 엘리오는 바흐의 곡을 리스트 버전, 부소니 버전으로 바꿔 연주합니다. 그러나 올리버는 바흐의 ‘원곡’을 들려달라고 요청하지요. 이는 극중 초반에 등장하는 장면으로, 엘리오는 올리버의 요청을 거부하다가 살짝 화를 내는 올리버에게 바흐 원곡을 연주해 결국 들려주며 화해에 이릅니다. 그런데 원작소설에 나오는 중요한 한 마디가 영화에는 삭제돼 있습니다.
소설 속 엘리오는 연주 후 올리버에게 이런 내면적인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인간은 하나의 악기만을 위한 곡으로 쓰이지 않았어요. 나도, 당신도.’(23쪽)
엘리오의 한 마디는 중요한 의미망을 형성합니다. 인간은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즉 이성을 좋아하는 방식을 선으로 여기지만 엘리오에게 사랑은 한 가지 방식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사랑의 형태가 가능함’을 간파한 것이지요. 바흐의 원곡과 이 원곡을 변형한 여러 버전의 연주처럼 인간의 사랑에는 ‘원형(原形)’이라는 형태가 없으며, 사랑은 여러 변주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정상성과 비정상성이란 얼마나 인간이 규정한 잣대일 뿐인지를 엘리오는 바흐, 리스트, 부소니 버전의 선율을 통해 올리버에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만 추가된 상징적인 부분도 다수입니다. 영화는 오래된 청동상 사진을 비추며 시작됩니다. 또 펄만 교수와 올리버, 엘리오는 1827년 수장된 청동상 손을 호수에서 발견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소설에선 펄만의 직업이 문헌학자인 반면, 영화에선 고고학자로 나오기에 저 청동상의 발견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데 이 역시 거대한 상징체계를 관객에게 선사합니다. 그리스의 청동상은 신체적으로 완벽함을 지향합니다. 완전한 조형으로서의 청동상은, 시간이 흘러 녹이 슬어 빛이 바랬더라도 과거의 완벽한 신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지요.
엘리오와 올리버의 관계도 호수에서 발견된 청동상처럼 ‘불멸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형성합니다. 영화에서 엘리오와 올리버는 수영장이나 호수 등 물속을 자세히 관찰하는 장면이 여럿 나오는데 호수에서 발견된 오래된 청동상은 ‘기억 속에서 변함없이 존재하는, 살다가 어느 날 깊은 심연에서 발견되고야 마는 과거의 그‘와 연결됩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두 사람은 함께 통화하면서(소설에서는 15년 만에 올리버의 강의실에서 재회합니다) 오래 전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해냅니다. 인간의 심연에는 사랑의 감정이 영원히 남는다는 주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흔적이란 측면에서, 한 가지 중요한 상징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바로 ’산클레멘테 신드롬‘입니다. 영화에는 완전히 생략된 부분인데 이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의 제3장 제목이 ’산클레멘테 신드롬‘입니다.
산클레멘테 대성당은 로마에 위치한 고대 유적으로 이곳엔 12세기쯤 지어진 대성당(Basilica di San Clemente al Laterano)이 위치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대성당 아랫 부분에는 4세기에 지어진 다른 대성당이 있고, 또 그 아래에는 로마 시대인 2세기에 지어진 미트라교 신전이 발견 됐습니다. 겹겹의 층위로 이뤄진 이 장소는 인간의 기억과 등가를 이룹니다.
산클레멘테 신드롬은 기억과 시간이 겹쳐지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마음도 산클레멘테 대성당의 건축 구조와 흡사하지 않던가요. 우리는 살면서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다가도 언젠가는 이별하기 마련이며,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어렵게 사랑을 재개한 뒤 또 다시 그 장소를 폐허로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폐허 위에서, 민들레 한 송이 틔우는 마음으로 작은 정원을 가꾸기 시작해 자기만의 궁전을 지었다가, 다시 그 궁전을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폐허로 만든 뒤 또 다시 사랑을 반복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나 폐허 위에 건축된 감정이더라도, 이전의 폐허가 중요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복구된 폐허 위에서만 재건이 가능합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은 이처럼 상징적 요소로 가득합니다. 두 사람이 유대인이란 사실도 중요하지요. 유대인은 세계사에서 언제나 소수자의 위치였으며 한때 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발설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대인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은 이들이 성적으로도 소수자라는 사실을 환기하지요. 엘리오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다윗의 별’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올리버를 보면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타는 자전거도 깊게 살펴야 합니다. 둘이 타는 자전거의 거리는 탐색, 동행, 멀어짐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올리버가 별장 도착 후 이튿날 첫 아침식사에서 왜 달걀을 택했는지, 연약하지만 유혹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달걀은 올리버와 엘리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인지도 심오한 물음이 됩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처럼 감각적인 은유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는 걸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