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하다’ ‘우람하다’ ‘꽉 찬다’ ‘근육질이다’….
‘공간이 충분하다’ ‘3열에 앉아도 편하다’ ‘골프백 5개는 거뜬하다’ ‘넓고 안락하다’….
최근 수년간 출시된 국산·수입 SUV에 대한 한 줄 평가다. 언론보도에도 자주 인용되는 이 문구들은 모두 ‘크고’ ‘넓고’ ‘높은’ 차체와 공간에 대한 안락함, 편안함을 표현하고 있다. 당연히 도로 풍경도 달라졌다. 미니밴보다 큰 SUV나 픽업트럭을 보는 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모델들이 이젠 아파트 주차장에도 즐비하다.
생각보다 큰 차들이 많다 보니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종종 발생한다. 높이 제한에 걸려 지하주차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SUV부터 어렵게 주차는 했으나 하차 공간이 부족해 본의 아니게 차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여기서 잠깐, 도대체 왜 이리 큰 차가 많아진 걸까.
지난 2월 17일, 서울 성수동에 자리한 대여스튜디오 레이어41에 검은 정장 차림의 보안요원들이 분주하다. 스마트폰과 스마트워치, 노트북 등 촬영이나 녹음, 전송에 관련된 기기를 모두 맡기고 입장하니 두 대의 SUV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새로운 전동화 SUV ‘EV9’의 디자인이 공개된 이날, 기아 측은 약 한 달 뒤인 3월 15일을 엠바고 기간으로 통보했다. 일주일, 아니 길어도 열흘 남짓했던 엠바고가 무려 한 달이라니.
이러한 의문은 EV9이 지닌 상징성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차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기반으로 완성된 순수전기차이자 기아 SUV 라인업 중 가장 큰 플래그십 모델이다. 한 해 농사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을 공개하며 단 한 번 번쩍하는 스포트라이트 대신 긴 여운을 택한 셈이다. EV9을 “EV6에 이어 E-GMP 플랫폼으로 완성된 기아의 두 번째 모델”이라고 소개한 카림 하비브 기아 디자인센터장(부사장)은 “3열 SUV인 이 차량은 꼿꼿하고 성능적으로 뛰어나고 견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고, 동시에 전기차인 만큼 공기역학적 효율성과 내부 공간성에도 중점을 뒀다”라고 설명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EV9은 우선 크고 웅장했다. 곳곳에 미래지향적인 요소가 적용된 외관은 다양한 LED 램프가 더해지며 고급스러움을 담아냈다. 실내로 들어서니 긴 휠베이스 덕에 ‘카니발’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탁 트인 것 같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3열에 앉아보니 여느 3열 SUV와 달리 장거리 운행에도 어울릴 만큼 안락하다. 2열 좌석을 앞뒤로 돌릴 수 있어 3열과 마주보게 배열할 수도 있다. 기아 라인업 최초로 시동 버튼이 통합된 컬럼 타입 전자식 변속 레버(SBW·Shift By Wire)가 적용돼 보다 직관적이고 간결한 조작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 차, 실제로 얼마나 큰 걸까. 행사장에서 기아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가장 크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직 제원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히 밝힐 순 없지만 카니발보다 길고 웅장합니다. 주차요? 이젠 아파트 주차장의 면적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잠시 답을 찾아보자. 주차할 공간도 만만치 않은데 세단과 SUV 등 승용차가 점점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소비자가 대형차를 선호한다. 안전하고 고급진 ‘큰 차’에 대한 선호도는 세단과 SUV의 판매 비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의 자료를 살펴보면 국내 시장에서 SUV 점유율은 2021년 52%로 집계되며 이후 대세로 자리 잡았다. 2021년 승용차 판매가 전년 대비 9.2% 감소했지만 대형 SUV는 차종 중 유일하게 5.4%나 성장했다.
둘째, 국내외 완성차 업체들의 기술 경쟁 가속화가 원인 중 하나다. 공간이 넉넉할수록 자율주행을 비롯해 각종 편의사양, 안전사양을 차곡차곡 탑재할 수 있다. 성능이 높을수록 편하고 안전하다. 소비자가 대형차를 선호하는 이유와도 맞아떨어진다. 셋째, 다재다능한 차량의 인기가 높아진 점도 대형화 추세에 한몫하고 있다. 단순히 이동 목적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짐을 싣거나 끌 수 있는(높은 견인력), 혹은 하루 이틀 차박도 거뜬한 다목적 차량이 각광받고 있다. 차가 세컨드하우스란 인식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 이러한 움직임의 시작은 현대차의 ‘팰리세이드’였다. 2018년 12월 출시 당시 팰리세이드에 대한 대중의 평가 중 하나는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괜한 기우에 불과했다. 덩치도 크고 3열도 고만고만하고 무엇보다 3000만원 중반부터 시작하는 가격이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큰 차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졌다.
팰리세이드의 성공에 경쟁 브랜드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쉐보레는 ‘트래버스’로 맞불을 놨고 포드는 미드 속 그 차 ‘익스플로러’를 내놨다. 트래버스의 3열은 공간이 꽤 넉넉했다. 성인이 타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자연스레 크기보다 편의성과 성능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덩치가 크다는 건 이제 더 이상 부담스럽거나 꺼려지는 조건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준대형 SUV에 집중하던 벤츠, BMW 등 독일 완성차도 좀 더 크고 넓은 SUV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BMW의 ‘X5’나 메르세데스-벤츠의 ‘GLE’가 전통적인 강자였던 시장에 BMW ‘X7’이 등장한 이유다. X7은 X5보다 크고 고급스러운 3열 SUV다. X5보다 260㎜나 긴, 전장이 무려 5m가 넘는 대형 SUV다. 높이도 X5보다 90㎜, 휠베이스도 3105㎜나 된다. 확실히 체급이 달라졌다.
여기에 시트에 적용된 인디비주얼 메리노 가죽부터 럭셔리한 향기가 물씬 풍긴다. 3.0ℓ 직렬 6기통 쿼드터보 디젤 엔진이 탑재된 ‘X7 m50d’는 이게 대형 SUV인가 싶을 만큼 민첩하게 반응한다. 성능도 담보된 것이다.
BMW는 올해 고성능 브랜드 M의 PHEV 모델 ‘XM’을 출시할 예정이다. 올해 창립 50주년이 된 BMW M의 야심작이다. 새롭게 개발된 M하이브리드 드라이브 시스템이 적용됐다. 메르세데스-벤츠 ‘GLS’도 3세대로 진화하며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전장은 5220㎜, 휠베이스는 이전 모델보다 60㎜나 길어졌다. 자동차에서 수㎜의 차이는 공간과 성능의 차이와 직결된다. 그만큼 첨단산업이란 방증이다.
벤츠는 3세대 GLS를 ‘S클래스 같은 SUV’라고 포장했다. 더구나 GLS는 벤츠의 하이엔드 브랜드 ‘마이바흐’와도 연결됐다. 지난해 마이바흐는 국내 시장에서 총 1961대가 판매됐다.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수입차 시장을 선도하는 브랜드가 대형 SUV의 라인업을 확장하자 2열이 아닌 3열 SUV의 수는 더 늘었다. 북미 시장에서 활약하던 미국의 전통적인 대형 SUV들이 국내 시장에 본격 수입되며 시장은 좀 더 치열해졌다.
‘큰 차’가 주름잡는 시장은 역시 미국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캐딜락의 ‘에스컬레이드’다. ‘미국 대통령이 타는 차’란 점을 앞세운 에스컬레이드의 전장은 5380㎜, 이보다 공간을 대폭 확장한 ‘에스컬레이드 ESV’는 5765㎜로 6m에 육박한다. 운전석과 3열 승객이 대화하려면 후석마이크를 켜야 할 만큼 공간이 넓고 고급스럽다. 이제 이런 대형 SUV가 통하는 시장이 됐다.
익스플로러보다 체급을 높인 포드의 ‘익스페디션’도 크기 면에선 빼놓을 수 없는 대형 SUV다. 전장은 5335㎜, 전폭도 2075㎜로 2m를 가뿐히 넘는다. 물론 덩치가 커지니 엔진도 묵직해졌다. V6 3.5ℓ 에코부스트 엔진이 탑재돼 최고출력 405마력, 최대토크 66㎏·m의 성능을 발휘한다.
링컨의 ‘네비게이터’도 대형 SUV 대열에 합류했다. 익스페디션의 고급 버전이다. 무엇보다 실내 인테리어가 안락하다. 푹신하고 질 좋은 가죽 시트가 이 차의 프리미엄 성향을 증명한다. 스피커 20개가 배치된 울티마 오디오 시스템도 빼놓으면 섭섭한 기능이다.
올해 국내 수입차 시장엔 새로운 SUV 브랜드도 합류한다. 영국의 ‘이네오스 오토모티브’가 그 주인공이다.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인데, 이네오스의 첫 번째 모델인 정통 오프로더 ‘그레나디어’는 영국의 디자인에 독일의 엔지니어링이 결합된 사륜구동 SUV다. 사다리꼴 프레임 섀시,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 최대 3개의 로킹 디퍼렌셜, 솔리드 빔 액슬 등이 특징이다. 올 상반기부터 차량이 공급될 예정이다.
SUV의 대형화가 시장의 트렌드로 정착하자 ‘코란도 스포츠’가 장악하고 있던 픽업트럭 시장에 미국산 픽업트럭이 명함을 내밀었다. 가장 발 빠르게 쉐보레가 ‘콜로라도’를 수입했고, 포드 ‘레인저’나 지프 ‘글래디에이터’ 역시 라인업을 확장했다. 과거 한국 시장은 해치백과 픽업트럭의 무덤이란 말도 있었지만 하나둘 차종이 늘고 시장이 형성되니 관심도 늘었다.
여기에 GM이 불을 붙인다. GM은 자사의 픽업트럭 브랜드 ‘GMC’의 한국 진출을 이끌며 대형 픽업트럭 ‘시에라’를 출시했다. 이 차의 전장은 무려 5890㎜다. 픽업트럭이지만 1열만큼 2열도 안락하다. 그만큼 고급스럽다. 지난해 6월 GM브랜드데이에서 카를로스 미네르트 한국지엠 영업·서비스·마케팅 부문 부사장은 “GMC는 쉐보레, 캐딜락과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며 한국 시장에서 멀티브랜드 전략을 수행할 핵심 브랜드”라며 “이를 통해 GM은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한국 소비자들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고 자동차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1902년 출범한 GMC는 SUV와 픽업트럭을 주력으로 하는 프리미엄 레저용차량(RV) 전문 브랜드다. 시에라는 북미에서 판매 중인 5세대 모델로 GMC를 대표하는 대형 픽업트럭이다. 국내 시장에는 시에라의 최고 트림인 ‘드날리(Denali)’가 출시됐다.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쉐보레 ‘타호’와 동일한 플랫폼을 공유하는 차량이다. 파워트레인은 420마력급 6.2ℓ 자연흡기 V8 가솔린 엔진과 10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했고, 실내는 원목 트림과 스티치 장식, 스웨이드 천장, 전동 스티어링 칼럼, 보스 프리미엄 오디오, 15인치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등 최상위 트림에 걸맞은 최고급 소재와 편의사양을 갖추고 있다.
국내 자동차 업계에선 올 초 시에라의 출시 이후 픽업트럭 시장의 확대를 점치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판매된 픽업트럭은 3만1543대. 쌍용차의 중형 픽업트럭 ‘렉스턴 스포츠’가 전체 시장의 약 80%를 점유한 가운데 앞서 나열한 픽업트럭이 자웅을 겨루고 있다.
업계 일각에선 “시에라가 현재 픽업트럭군에 포함되기보단 차박 수요자 등을 흡수하며 럭셔리 픽업군을 새롭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카를로스 미네르트 한국지엠 부사장은 “GMC를 통해 국내 GM 산하 글로벌 브랜드와 제품 포트폴리오는 한층 확대될 것이며, 이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말했다.
[안재형 기자] [사진 각 브랜드]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51호 (2023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