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NCPAIN’.
브랜드명을 처음 접한 이라면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살짝 알고 있는 이라면 ‘블랑팡’을 논하며 톱 그레이드라 손꼽는다. 어떤 이는 “롤렉스보다 윗급”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는 “세계 3대 시계는 아니지만 명품 중의 명품”이라고 한다. 모두 온라인에 둥둥 떠다니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들 탓인데, 가장 확실한 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워치메이커’란 사실이다.
1735년 예한 자크 블랑팡이 스위스 빌레레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블랑팡은 올해 288살이 된 브랜드다. 당시 열쇠공, 염색공 등이 모여 살던 빌레레에서 겨울동안 할 일이 없던 장인들이 모여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크 블랑팡이 가족 농장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태어난 블랑팡은 이후 그의 7대손인 프레데렉 에밀 블랑팡이 타계한 1932년까지 가족경영을 이어왔다. 이후 블랑팡 장인과 전문가들이 기술력을 이어오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블랑팡은 그동안 1926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오토매틱 손목시계부터 모든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총망라한 6개의 걸작(Six Masterpieces) 등 시계 산업 역사를 뒤흔드는 최초의 기록을 이어갔다. 2004년에는 최초의 균시차 시계를, 2008년에는 최초의 원미닛 플라잉 카루셀(1분 만에 완전히 회전하는 케이지), 2008년에는 최초로 그레고리력(표준 달력)과 음력을 동시에 표시한 시계를 선보였다.
1984년 시계를 만들고 조립하기 위해 스위스 르 브라쉬에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를 마련한 블랑팡은 이곳에서 복잡한 기술력이 요구되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생산하고 있다. 2010년에 ‘프레데릭 피게(Frederic Piguet)’를 인수하며 운영하게 된 르 상티에 매뉴팩처에선 고가의 한정판 시계를 내놓는다.
르 브라쉬의 매뉴팩처는 지금까지도 현대적인 생산라인이 없다. 아주 작은 스프링부터 무브먼트까지 모든 부품을 100% 자체 생산한다. 그러니까 블랑팡은 부품 생산부터 조립까지 사람이 직접 손으로 작업하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다.
이러한 기술력을 논할 때 등장하는 시계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오토매틱 와인딩 손목시계’로 알려진 1735 모델이다. 이 시계엔 달의 기울기를 보여주는 문페이즈, 시간 거리 등을 측정하는 크로노그래프, 중력으로 인한 시간 오차를 줄여주는 투르비용, 시간을 소리로 알려주는 미닛리피터, 윤년 등을 자동으로 계산해주는 퍼페추얼 캘린더 등의 기능이 모두 담겨있다.
무려 6년간 3명의 워치메이커가 전담해 조립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는데, 조립 후 기능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 세계에 단 30피스만 한정판으로 생산된, 지금까지도 가장 혁신적인 시계로 손꼽히고 있다.
시계를 비롯한 럭셔리 업계의 전문가들은 명품의 조건으로 ‘역사와 전통’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브랜드의 아카이브에 차곡차곡 쌓인 제품이 또 다른 제품의 기반이 된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오래된 브랜드일수록 ‘헤리티지(Heritage·지금껏 만들어온 제품 등 유산)’를 첫 번째 덕목으로 내세운다.
이 덕목은 288년간 브랜드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블랑팡 입장에선 그만큼 재료가 풍부하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브랜드의 대표 모델인 빌레레 컬렉션이나 피프티 패텀즈가 같은 모델명으로 새로운 시계를 선보일 수 있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최근 공개된 새로운 다이빙 워치 ‘피프티 패덤즈 테크 곰베싸’는 피프티 패텀즈 탄생 70주년을 기념하는 또 다른 신제품이다. 다시 말해 블랑팡 헤리티지의 후속작인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블랑팡의 수장이었던 장 자크 피슈테르는 1950년대 초반 이미 잠수를 스포츠로 즐긴 선구자였다. 그는 자신의 물속 경험을 바탕으로 다이버의 생명이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는 타임키핑 장비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그런 장비가 아직은 시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는 블랑팡의 워치메이킹 팀에 물속에서도 제대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시계를 주문한다. 1953년 탄생한 최초의 모던 다이빙 워치 피프티 패덤즈는 당시 약 91m 깊이에서 높은 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강화 돔 크리스털이 탑재된 스틸 케이스 소재로 완성됐다.
피프티 패텀즈란 모델명은 피슈테르가 직접 명명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The Tempest·폭풍)>에 나오는 아리엘의 노래에서 차용했다는데, 아리엘은 “5패덤(1패덤=1.83m) 깊이의 물속에 그대의 아버지가 누워 있네, 그의 뼈는 산호가 되었고”라고 노래하고 있다. 사실 스쿠버다이빙이 막 시작됐을 당시에는 다이버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수심을 50패덤즈라 여겼다.
새롭게 태어난 신형 테크 곰베싸는 해양연구가인 곰베싸 팀과 오랜 기간 협력하며 완성한 모델이다. 1953년의 피프티 패덤즈는 그 당시 다이버들의 욕구는 충족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다이빙 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잠수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달라진 환경에 걸맞은 다이버 워치가 필요했다. 마크 하이에크 현 블랑팡 회장은 이 같은 흐름을 파악하고 신세대 다이빙 워치 설계에 착수한다. 또한 장시간 심해 잠수를 통해 연구를 수행하는 곰베싸 엑스페디션 원정대와 손을 잡았다.
곰베싸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서식하는 큰 귀상어의 생태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다. 연구원들은 랑기로아에서 다이빙을 통해 큰 귀상어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관찰했다. 이들은 해양 생태계를 연구하는 한편 다이버 시계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시제품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다이버들은 수심 120m에서 약 50일 동안 4개의 시제품을 번갈아가며 착용했다.
테크 곰베싸는 심해에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기능을 더했다. 케이스는 강한 수압을 견딜 수 있는 약 300m 수준의 방수 기능을 자랑한다. 최대 3시간의 테크니컬 다이빙 또는 포화 시스템 종료 시간을 측정하도록 설계됐다. 베젤은 3시간에 한 바퀴 회전하는 특수 핸드와 연결되어 있고, 13P8 셀프 와인딩 무브먼트가 탑재됐다.
전문 다이버 시계에 필수적인 헬륨 밸브도 빼놓을 수 없다. 심해 탐사를 위한 감압실에서 헬륨 가스를 견디고 빼낼 수 있는 장치다. 감압 단계에서 밸브를 풀면 시계에 가득 찬 헬륨 가스를 배출한다. 이용자 편의성을 고려해 다이빙 수트 위에 시계를 고정할 수 있는 스트랩도 제공한다.
블랑팡은 1992년에 스와치그룹의 일원이 됐다. 스와치그룹은 그 자체가 스위스 시계 산업이라 할 만큼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시계 그룹이다. 하이예크 스와치 회장의 스토리가 곧 스와치그룹의 역사이자 동시에 20세기 스위스 시계 산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 들어 스와치그룹코리아는 국내 시장에서 전개하는 자사 브랜드의 가격을 줄줄이 인상했다. 환율 변동과 원가 상승 요인으로 가격을 올린다는 설명이다. 블랑팡도 고객 안내문을 통해 “이번 가격 인상에 대한 고객들의 깊은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앞으로도 블랑팡은 특별한 브랜드 경험과 가치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구체적인 인상 폭은 밝히지 않았다.
한편 브레게, 오메가, 블랑팡, 글라슈테 오리지널, 티쏘, 라도 등을 운영하는 스와치그룹코리아는 2021년에 매출 3530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2294억원 대비 약 53% 상승한 수치다. 영업이익은 456억원으로 전년 동기 95억원 대비 380%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