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장은 정부가 기관투자가의 참여를 지나치게 규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관투자가의 주식투자 비율이 보험은 4%에 불과하고 퇴직연금은 이보다 훨씬 낮아 0.4%밖에 안된다. 연기금은 조금 높아 16%다. 이렇게 주식투자 비율이 낮다보니 한국은 연기금의 소득대체율이 45~50%에 불과하다. OECD 국가들은 이 비율이 70% 이상이다. 이 문제는 국민들의 노후대책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이슈다. 연기금이나 공제회 등이 자본시장에 적극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은행에 자금이 몰려있는데 금융지주사들은 아직도 은행에만 돈을 쌓아두고 있다. 계열 증권사조차 활용하지 않으려면 지주사가 무슨 필요가 있나. 계열 금융기관을 적극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 4월 3일 매일경제가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개최한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에서 작심한 듯 그 동안 맺혔던 불만을 쏟아냈다. 정부의 잘못된 규제 때문에 국민들이 소득의 상당부분을 의무적으로 내고 있는 연금이 노후를 제대로 보장해 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정부가 국가 전체의 자원배분을 감안하지 않고 그때그때 정치적 목적이나 행정적 필요에 따라 만든 법으로 시중자금을 끌어가고 있어 전체 자금흐름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들은 이런 자금에 공무원 시각으로 ‘안전’만을 강조한 족쇄를 채워놓기 때문에 시장의 다른 부분을 극도로 위축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도 이 문제가 지금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시장에선) 업권 간 자본의 균형이 깨지고 보험사로 너무 많은 자금이 몰리고 있다. 지난 2012년 민간 보험사들은 130조원의 자금을 거뒀다. 개인가처분소득의 4분의 1을 보험사에 낸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금이 모두 국공채에만 묶여 있다. 활용도가 너무 낮다.”
신제윤
금융위원장
정부가 정책적인 필요 때문에 만든 즉시연금 바람을 타고 부자들이 뭉텅이 돈을 보험사에 집어넣었는데 이 자금이 경제 전체에 고르게 돌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많은 자금이 단기간이 아닌 장기간 묶여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험사의 비과세 혜택을 서민이 아닌 부자들이 주로 보기 때문에 계층 간 구조적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문제까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서민들의 호주머니에서 강제로 빼가는 자금 가운데 대표적인 게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이다. 이들 두 종류의 연금으로만 매년 50조원이 넘는 자금이 민간부문 다른 영역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국민연금 적립금은 2012년에 43조1000억원이 늘어난 데 이어 2013년에도 34조9869억원이 증가했다. 퇴직연금 적립금도 2012년에 17조4291억원이 늘어난 데 이어 2013년에 다시 16조9537억원이나 늘었다.
이들 연금처럼 강제로 만든 상품은 아니지만 보험권도 시중 자금을 끌어다 쌓아놓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보험사의 수신은 2012년 말 418조482억원이었던 것이 지난 연말엔 465조3256억원으로 1년 사이에 47조2774억원이나 늘었다.
이들 외에도 공무원연금이나 사학연금 우정사업본부 군인공제회 등 법의 힘을 빌려서 자산을 눈덩이처럼 불리는 기관들은 곳곳에 숨어 있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
족쇄 채워 놓은 자금 1000조원대
문제는 이들이 끌어가는 자금의 대부분은 주식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족쇄가 채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의 경우는 최근에 비교적 적극적인 주식투자를 하고 있지만 나머지 연기금은 대부분 주식을 멀리하고 있다. 위험자산으로 규정하고 아예 투자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허용했더라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퇴직연금은 완전 민간자산이면서도 이러한 굴레를 쓰고 있다.
정부는 근로자의 수급권을 내세워 초기엔 퇴직연금의 주식투자를 거의 금지하다가 최근 들어 예외적으로 일부만 허용하고 있다.
규제가 과도하다는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정부는 2011년부터 기업이 운용하는 확정급여형(DB형)의 주식투자 한도를 늘렸고 개인이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형)에도 주식이나 주식형펀드 투자를 허용하겠다고 여러 번 밝혔지만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 있다. 지난 2012년에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 개정됐으나 고용노동부가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난해 7월엔 퇴직연금 가입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표준약관을 만들어 근로자의 운용지시가 투자한도를 넘으면 연금사업자가 반드시 이를 거절해야 한다는 의무조항까지 신설해 주식투자를 엄격히 제한하도록 했다.
이처럼 주식투자 기회를 앞뒤로 철저히 봉쇄당한 퇴직연금은 국민연금에 비해 현격히 낮은 수익률을 내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주식투자에서 8.8%의 수익률을 올린 데 힘입어 채권 부문이 저조한 상황에서도 국채수익률보다 훨씬 높은 4.19%의 전체 자산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에 비해 퇴직연금 수익률은 업권에 따라 1.25%(손해보험 DC형)에서 3.86%(생명보험 DB형) 정도로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은행권의 퇴직연금만 떼어놓고 보아도 DB형 가운데 보장형이 3.78%였고 비보장형은 1.66%에 불과했다.
퇴직연금 수익률이 저조한 것은 저금리 국면이 이어지는데도 여전히 자산의 대부분을 은행 예금이나 보험 채권 등에 묶어놓은 규정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3년 말 퇴직연금은 84조2996억원이 적립됐으나 이중 주식이나 펀드 등 금융상품에 투자한 자금은 4조4358억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예금이나 국공채, 보험상품 등에 넣어둔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금융투자업계에선 퇴직연금은 출발부터 잘못됐다며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제약을 가하더라도 일단은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외에도 정부 각 부처가 개별적으로 운용하는 각종 중소형 기금들 역시 기금풀을 만들어 국민연금처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