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디지털자산 시장의 흐름을 바꾸는 두 개의 큰 조각이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하나는 백악관이 발표한 ‘가상자산 정책보고서(Strengthening American Leadership in Digital Financial Technology)’, 다른 하나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 차원에서 제정된 스테이블코인 관련 기본법인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다. 이 두 문서는 각각 행정부와 입법부가 쥔 키이자, 규제의 공백 속에서 방황하던 디지털자산 시장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로드맵이다.
사실 디지털자산과 관련한 미국의 논의는 그동안 “무엇을 금지할 것인가”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올해의 정책 변화는 명백히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키워드는 ‘관리된 성장(Managed growth)’이다. 금지나 방치가 아닌, 제도적 장치 위에 시장의 잠재력을 얹겠다는 접근이다.
2025년 7월 말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와 재무부 주도하에 발간된 이 가상자산 정책보고서는 총 160쪽에 걸쳐 연방 정부가 디지털자산 시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제할 것인지에 대한 전방위적 청사진을 제시한다. 보고서는 디지털자산의 유통, 발행, 거래, 커스터디(보관), 청산까지 전 주기를 검토하며, 각 단계에서 필요로 하는 규제·면제 조항을 목적에 맞게(Fit-for-purpose) 정리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증권성과 무관한 거래의 허용’이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암호화폐가 증권인지 아닌지를 두고 오랜 시간 법정 다툼이 이어졌고, 이에 따라 수많은 프로젝트와 거래소가 위축됐다. 보고서는 이 문제를 제도적으로 우회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예컨대 일정 요건을 갖춘 초기 배포나 특정 NFT, 탈중앙 인프라 네트워크(DePIN)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면책제도(Safe Harbor)’를 운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SEC의 기존 견해와 상당히 다른 제안이며, 보고서는 이를 통해 “합법적 교차거래의 여지를 제도 안에서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변화는 2022년 바이든 행정부의 행정명령(EO14067)도 사실상 뒤엎은 것이다. 당시에는 불법 자금 흐름과 소비자 피해, 에너지 과소비가 주된 관심사였다면, 올해 1월 새로 발표된 행정명령(EO 14178)은 국제 금융 인프라 안에서 디지털 기술의 활용을 주제로 내세웠다. 미국은 이를 통해 디지털자산을 국채 수요 확대, 달러 결제 네트워크 강화, 기술 혁신 촉진의 수단으로 삼고자 한다.
7월 18일,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 스테이블코인 규제법인 ‘지니어스 액트’에 서명했다. 이로써 미국은 사상 처음으로 달러 연동형 디지털자산에 대한 전국 단위의 규제 틀을 갖추게 됐다. 법안은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또는 동등한 유동성 자산’으로 100% 담보하고, 발행자는 준비금 구성과 감사를 매월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또한 발행 주체는 연방 은행과 비은행 라이선스, 그리고 각 주(州) 라이선스를 인정하는 ‘듀얼 트랙’ 체계를 도입했다.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대형 은행들은 자체 디지털 코인 발행 또는 USDC 등 기존 민간 코인의 채택 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페이팔 등 빅테크 기업 역시 발행 주체로 나설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중요한 변화는 기술이 아니라 ‘감독 체계와 책임 구조’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이다. 단순히 블록체인을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발행자가 누군지, 준비금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 누가 감사를 하는지가 제도화의 기준이 된 것이다.
로이터는 법안 서명 직후 보도에서 “새 법은 스테이블코인이 반드시 유동성 자산으로 전액 담보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는 민간 발행 코인이 연준의 통제 없이 유사 통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최근의 규제 변화는 단절보다는 진화에 가깝다. 2022년 금융안정감독위원회(FSOC)는 디지털자산이 자산 가격의 급변, 레버리지, 거래소 파산 등을 통해 금융안정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2023년 백악관 경제보고서(ERP)에서는 “디지털자산은 전통 금융이 오래전에 학습한 교훈을 또다시 재현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효용보다 위험이 크다는 냉소적 평가였다.
하지만 2025년에 들어서는 이 같은 시각에 뚜렷한 전환이 감지된다. 먼저 올해 1월 백악관은 전임 행정명령을 공식 철회하면서 새로운 전략 우선순위를 설정했고, 이후 7월의 가상자산 정책보고서에서는 디지털자산이 ‘국가 전략 기술’로 포함됐다. 증권거래위원회(SEC) 역시 지난 7월 말 ‘프로젝트 크립토’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제도 개선 과제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토큰의 증권성 판단 기준, 커스터디 규정 정비, 혁신 프로젝트에 대한 일시적 면제 조치 등이 포함됐다.
한마디로 이제는 법정으로 가는 대신 규정으로 논의하자는 것이다.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규제당국의 재량 범위를 제도화하겠다는 흐름이 명확해졌다.
‘ERP 2023’에 담긴 말처럼 “많은 디지털자산 지지자들이, 과거 금융위기에서 얻었던 교훈을 어렵게 다시 배우고 있는 셈”이라면, 2025년의 변화는 그 교훈을 현실적 규칙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으로 읽힌다.
이번 제도화가 시장에 던지는 영향은 간단하지 않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테이블코인 담보 요건이 가져올 ‘달러 수요 확대’다. 발행자가 담보로 보유할 수 있는 자산은 주로 현금과 단기 국채다. 따라서 수천억달러 규모의 새로운 수요가 미국 국채 시장에 유입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는 금리가 유지되거나 높아지는 조건에서는 특히 매력적인 구조다. 정부 입장에서도 미국 국채에 대한 글로벌 수요를 견고히 할 수 있는 카드가 된다.
은행권의 입장도 예사롭지 않다. 이제 디지털자산이 제도 안으로 들어오는 만큼, 커스터디 서비스부터 온체인 결제망, 증권형 토큰화까지 다양한 사업이 새로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물론 자본 요건, 유동성 비율 규제 등은 여전히 부담이지만, 최소한 ‘불확실성’이라는 장벽은 점차 해소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금 이슈도 빼놓을 수 없다. 미 국세청(IRS)은 올해 6월 ‘디지털자산 브로커 거래 보고 규정(1099-DA)’의 최종안을 발표하며, 2025년 체결분부터 매각 금액(Gross Proceeds) 보고를 의무화한다고 밝혔다. 또 2026년부터는 자산의 기준가(Basis)까지 보고 대상에 포함된다. 유예 조치와 과도기 조항이 일부 적용되지만, 시장의 회색지대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IRS는 이와 관련해 “2025년 1월 1일 이후 체결되는 거래부터 브로커는 매각 금액을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이 역시 합법적 자산 거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자산 산업의 내부 회계와 백오피스 운영 체계를 근본부터 재정비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0호 (2025년 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