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에 소재한 서원밸리CC 최등규 회장과 골프를 하면 카트를 타지 못한다. 친한 사람끼리 가벼운 내기라도 붙었을 때 이동 중 카트에 타면 벌금으로 1만원을 내야 한다. 필자도 서두르는 터에 모르고 탔다가 몇 차례 벌금을 낸 적도 있다.
“골프는 원래 걷는 게 기본이죠. 진행에 차질을 주지 않는 한 굳이 카트로 이동할 이유가 없어요. 저는 원래 카트를 타지 않습니다.” 최 회장은 특별히 몸이 불편하거나 나이 많은 동반자가 아니라면 ‘노 카트 탑승’을 룰로 정한다.
“18홀 내내 카트만 타고 다니면 뭔가 허전하고 아깝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간혹 골프 스코어보다 온종일 걸었다는 점이 더 뿌듯해요.” 입시설명회 일타 강사였던 필자의 고교 선배는 걷기 예찬론자다. 골프를 하면서 몸이 불편하거나 진행상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그가 카트에 앉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동반자들이 티샷을 끝내면 바로 페어웨이로 걸어 나간다. 롱 홀에선 최소 클럽 2개 이상을 갖고 간다. 우드와 롱 아이언, 그리고 웨지다 .공이 위치한 라인에 카트보다 늦게 도착하지만 실제 진행 속도는 그가 빠르다. 항상 본인과 동반자 샷이 끝나면 언제 이동했는가 싶을 정도로 신속하게 본인이 다음 샷을 할 장소에 도착해 있다.
경기 진행에 전혀 차질을 주지 않는다. 캐디에게서 클럽을 건네받지 않고 거리도 본인이 직접 측정기로 잰 다음 미리 가져간 클럽으로 샷에 바로 들어간다.
그린 주변에선 공을 떨어뜨릴 지점을 가늠하려고 반드시 그린까지 갔다가 공 위치로 되돌아온다. 공이 떨어지는 지점에서 핀까지 굴러갈 거리를 머릿속에 넣는다. 보통 걸어가기 귀찮고 번거로워 핀까지 거리만 확인하고 웨지로 샷을 한다. 그는 그린 주변까지 걸어가서 확인하는 수고로움을 절대 마다하지 않는다.
웨지로 핀에 공을 붙이는 탁월함은 그의 스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고를 마다 않는 발품 덕분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굳이 감수한 덕분에 그에겐 ‘어프로치 귀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렇다고 경기 진행이 느린 것도 아니다.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어 동료보다 진행이 원활해 흐름을 리드한다. 진행을 고려해 처음엔 카트 탈 것을 요청하던 캐디도 한두 홀 지나면 그의 행보에 입을 다문다.
그린에서도 그의 걷기는 계속된다. 유심히 살펴보면 그는 핀을 중심으로 공 맞은편 방향에서 주로 그린에 올라온다. 이미 라인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후 시계 방향이나 반 시계방향으로 돌아 공 위치에 다가가 직접 마크하고 공을 들어올린다. 본인이 라인 읽기를 주도하고 처음 가는 골프장에선 캐디에게 방향만 물어본다.
그는 10여 년 전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높다는 종합검진 결과를 받아 좋아하는 골프를 통해 걷기에 들어갔다. 평소에도 하루 1만 보 걷기를 생활화한다. 허벅지를 만져보니 돌처럼 단단했다.
“일반 골퍼들이 전장 6.5㎞ 전후의 코스를 걸으면 1만 보가 나옵니다. 소화작용과 스트레스 해소, 심폐 기능, 신진대사에 두루 좋아요.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걷기를 추천합니다.”
오재근 한국체대 운동건강관리학과 교수는 골프에서 걷기를 일관성 있게 하면 혈압과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고 강조한다. 카트만 타고 다니면서 클럽만 휘두른다면 운동이라고 보기 힘들다.
굴곡이 심한 산악형 한국 골프장에서 계속 걷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5시간 정도 계속 걸으면 유산소 운동으로 심신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오 교수는 단정한다.
18홀을 걸으면 1000~1500㎉를 소모해 심혈관 기능이 좋아지고 필드의 초록색은 안구를 정화한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골프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신체 균형이 양호하다.
김기현 현정신과의원 원장도 골프장에서 걸으면 우울증과 불안 증세를 보이는 환자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설명한다. 햇볕과 신선한 공기 속에 초록의 자연을 보면서 5시간 걸으면 밤에 이만한 수면제가 없다고 김 원장은 역설한다.
종일 걸은 후 욕실에서 2~3㎏ 빠진 것을 확인하고 과식해서 귀가하면 체중이 원위치되거나 늘어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맛있다고 양껏 먹거나 마시면 애써 줄인 체중을 허무하게 날린다.
골프에서 걷기가 권장되면서 골프부킹업체인 XGOLF가 언젠가 가을에 걷기 좋은 골프장을 소개한 적이 있다. 수도권 골프장으론 푸른솔포천과 필로스CC가 꼽혔다.
충청권에선 백제와 떼제베, 강원권 파가니카도 걷기 좋은 골프장으로 소개됐다. 전라도엔 고창과 파인힐스, 경상도에선 거제뷰가 선정됐다. 이용자 후기를 반영한 데이터베이스와 골프장 관계자 의견을 취합해 선정했다고 조성준 XGOLF 대표는 밝혔다.
골프장 코스를 걸으면서 꼭 유의할 점이 있다. 빨리 이동하려고 티샷을 한 뒤 먼저 도로에 나가 있는 경우다. 다음 순서 동반자 플레이에 방해되는 데다 본인이 다칠 위험도 있다.
마지막 플레이어가 샷을 마친 후 나가야 한다. 물론 홀 간 이동거리가 길거나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면 카트를 이용하는 게 낫다.
골프를 하는 시간의 70% 이상 엉덩이를 카트 좌석에 붙이고 있으면 비치된 과자나 음료수만 축낼 확률도 높아진다. 걷기 골프를 하면 3타 정도 덜 나온다는 미국의 헬스·스포츠사이언스 보고서도 있다.
뇌피셜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스윙 리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린피에는 자연을 즐기고 아름다운 코스를 걷는 비용도 포함돼 있다.
카트를 탄 채로 쌩하고 지나가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인프라다. 공을 멋지게 날려 놓고 양탄자 같은 잔디 위를 걷는 즐거움을 어디에 견줄까. 걷는 것은 또 다른 명상이다.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 (장 폴 사르트르)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