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롯데그룹의 유동성 리스크 우려가 불거졌다. 석유화학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이 수익성 악화로 2조원대 회사채를 갚아야 했다. 급한대로 롯데그룹은 롯데케미칼 회사채에 담보물로 롯데월드타워를 제공했다. 담보금액은 2조 682억원으로 롯데월드타워 담보한도는 여기에 120%에 해당하는 2조 4818억원이다.
이후 롯데그룹은 선택과 집중에 맞춰 사업구조 개선을 시작했다. 먼저 국내 렌터카 1위인 롯데렌탈을 홍콩계 PEF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어피니티PE)에 매각했다. 매각 대상은 롯데렌탈 경영권 지분 60.67%로 거래금액은 1조 5700억원 수준이다. 어피니티PE는 이미 지난해 상반기 렌터카 2위 업체인 SK렌터카를 8200억원에 인수했다. 롯데 입장에선 1조원이 넘는 현금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지만 외국계 사모펀드가 사실상 국내 렌터카 시장의 최대 운영자로 올라서게 됐다.
롯데그룹은 신성장 동력 중 사업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롯데헬스케어를 청산했다. 롯데지주로부터 700억원을 출자받아 법인을 설립한 지 약 3년 만이다. 편의점 세븐일레븐 운영사 코리아세븐은 금융자동화기기 전문업체인 한국전자금융에 ATM(자동입출금기) 사업부를 600억원대에 매각했다. 아울러 롯데케미칼은 재무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파키스탄 법인을 파키스탄계 사모펀드 투자회사인 API와 아랍에미리트 석유 유통회사에 매각해 약 1275억원을 확보했다.
비핵심 부동산 자산들도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다. 롯데그룹의 건설 계열사인 롯데건설은 서울 잠원동 본사사옥 및 용지, 지방 물류창고, 임대주택 리츠 지분 등에 대한 자산 효율화를 진행 중이다. 이들 자산에 대한 통매각, 자체 개발, 매각 후 재임대(세일앤리스백) 등 다양한 유동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시장에 내놓은 매물들이 모두 매각된다면 롯데건설은 총 1조원가량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최근엔 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경기도권 물류센터 2곳을 매물로 내놨다. 롯데물산은 안성시 서운면 현매리
229-3 일대에 위치한 안성 CDC 물류센터와 이천시 대월면 대대리 576에 있는 이천 대대리 물류센터 매각에 나섰다. 안성 CDC 물류센터는 지하 1층~지상 4층, 연면적 4만483㎡ 규모의 상·저온 복합 물류센터로 입지 조건이 우수해 우량 자산으로 꼽힌다. 롯데그룹의 종합식품회사인 롯데웰푸드가 임차한다. 매각에 성공하면 롯데물산은 2000억원 안팎의 현금을 쥐게 된다.
전사 차원의 리밸런싱을 진행하는 SK그룹도 비핵심 사업부 및 자산 매각에 열을 올리고 있다. SK그룹은 국내 대표 반도체 실리콘 웨이퍼 제조사인 SK실트론 매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각 대상은 SK㈜가 직접 보유한 지분 51%와 TRS(총수익스왑) 계약으로 묶여 있는 소수 지분 일부다. SK실트론의 기업가치가 5조원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이번 매각으로 SK그룹은 3조원 중반 정도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SK그룹은 현재 국내 주요 PEF들을 접촉하며 SK실트론 경영권 매각을 물밑에서 타진 중이다. 이중 국내 대형 PEF 중 하나인 한앤컴퍼니가 SK실트론의 유력 인수자로 점쳐진다. 한앤컴퍼니가 SK실트론을 인수하게 되면 10번째 SK 관련 거래를 진행하게 되는 셈이다. 2018년 SK그룹이 운영하던 SK엔카직영 사업부문 인수를 시작으로 SK해운, SK D&D, SK에코프라임, SK플라즈마 등의 지분을 사들였다. 지난 3월엔 반도체,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에 쓰이는 특수가스 생산 업체인 SK스폐셜티 지분 85%를 약 2조 6000억원에 사들였다. SK스폐셜티는 삼불화질소(NF3), 육불화텅스텐(WF6) 제조와 관련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SK그룹은 사업부 매각 외 내부적 리밸런싱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SK그룹은 SK머티리얼즈의 반도체 자회사 4곳을 SK에코플랜트에 편입시키고 SK C&C의 데이터센터를 SK브로드밴드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SK머티리얼즈와 SK C&C는 SK그룹 지주사 SK㈜의 사내독립기업이다. 이번 리밸런싱에 따라 SK㈜는 SK머티리얼즈 자회사 SK트리켐, SK레조낙, SK머티리얼즈제이엔씨 지분을 SK에코플랜트에 현물로 출자했다. 또한 지분 100%를 보유한 SK머티리얼즈퍼포먼스는 SK에코플랜트와 포괄적 주식교환을 진행한다.
SK㈜ 관계자는 “자회사들의 성과가 지주사 가치에 직결되는 만큼 중복 사업은 과감하게 통합하고 시너지를 도출해 지주사의 기업가치를 높이고자 한다”며 “앞으로도 자회사의 성장을 주도하고 재무건전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지주사 본연의 역할을 적극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롯데, SK그룹 외 다른 기업들도 현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LG화학은 수처리 전문사업부인 워터솔루션즈 부문을 국내 PEF 운용사 글랜우드프라이빗에쿼티(PE)에 매각한다. LG화학의 워터솔루션즈 부문은 RO멤브레인(역삼투막) 필터 부문 세계 2위 기업으로 매각 가격은 1조원대로 알려졌다. 글랜우드PE는 카브아웃(대기업 자회사 및 사업부 거래)에 특화된 PEF 운용사로 LG전자 수처리 자회사의 전신 테크로스를 지난해 인수하며 관련 사업에 진출했다. LG화학 워터솔루션즈의 지난해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은 600억~650억원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다.
애경그룹은 핵심 계열사인 애경산업을 매물로 내놨다. 매각 대상은 애경그룹의 지주사인 AK홀딩스와 애경자산관리 등이 보유한 애경산업 지분 약 63%다. AK홀딩스의 부채를 줄이기 위해 그룹의 모태인 생활용품·화장품 사업 정리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AK홀딩스의 부채 비율은 연결 기준 2020년 233.9%에서 2024년 328.7%로 뛰었다. AK홀딩스가 자회사에 대폭적으로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애경산업은 생활용품 브랜드 케라시스, 화장품 브랜드 루나로 유명하다. 희망 매각가는 약 6000억원으로 삼정KPMG가 매각 주관을 맡고 있다.
이와 함께 회원제 골프장인 중부CC에 대한 매각 작업도 진행 중이다.
최근 본입찰을 진행, 복수의 원매자가 중부CC에 대한 투자확약서(LOC)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에 있는 중부CC는 수도권 지역 입지로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다. 애경그룹의 매각 희망가는 2000억원으로 전해진다.
GS그룹의 건설 계열사인 GS건설도 현금 확보를 위해 자회사 매각을 추진 중이다. 앞서 지난해 10월 자회사인 GS엘리베이터(현 자이엘리베이터)와 자이에너지운영 지분을 국내 PEF 운용사 제네시스프라이빗에쿼티(제네시스PE)에 매각했다. GS건설은 이로써 약 136억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현재는 글로벌 수처리기업인 GS이니마 매각을 진행하고 있다. GS이니마는 GS건설이 2011년 인수한 곳으로 스페인, 브라질, 미국, 멕시코 등에서 상하수도 및 해수 담수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아랍에미리트(UAE) 에너지 국영기업인 타카(TAQA)가 GS이니마에 대한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타카는 UAE 정부가 지분 75.1%를 보유한 국영 에너지 회사로, GS건설과 UAE 수·전력공사가 발주한 9200억원 규모의 해수 담수화 사업을 함께 수주하기도 했다. 타카의 인수 제안 가격은 1조~2조원 사이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알짜 부동산을 팔아 현금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업들도 있다. 부동산을 팔아 마련한 재원으로 주력 사업을 확장하거나 신사업 투자에 나서겠다는 계획의 일환에서다. DL 그룹의 자회사인 글래드호텔앤리조트는 외국계 투자사인 싱가포르투자청(GIC)을 상대로 글래드 여의도, 강남 코엑스센터, 메종 글래드 제주 호텔에 대한 매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세 호텔의 합산 매매가는 6000억원 수준이다. 오라관광이 모태인 글래드호텔앤리조트는 1986년 삼호그룹과 함께 DL그룹에 편입됐다. DL그룹 내에서 호텔은 비주력 사업으로 꼽혔는데 이번 매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DL그룹은 주력 사업에 쓸 현금을 확보하게 될 예정이다.
KT는 약 20개의 부동산 매각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정KPMG, 컬리어스코리아, 에비슨영코리아 등의 자문사로부터 컨설팅을 받아 현재 매각할 부동산 자산들을 선별하고 있다. 본업인 통신과 IT에 집중하기 위해 부동산 자산 매각 검토에 나선 것인데, 검토 대상은 서울 내 호텔, 임대주택(코리빙), 지방 오피스 등이다. 이중 호텔 자산에 대한 매각이 유력시되고 있다. KT가 운영하고 있는 호텔은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 호텔&서비스드 레지던스 ▲안다즈 서울 강남 ▲신라스테이 역삼 ▲르메르디앙·목시 서울 명동 ▲노보텔 앰배서더 서울 동대문 호텔&레지던스 등이다. 5성급 호텔이 대부분이며 우량 호텔 인수를 희망하는 투자사들이 많은 만큼 인수가 결정되면 원매자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KT&G도 비핵심 자산 매각을 통한 현금 확보 기조로 부동산 실물자산 매각을 진행하고 있다. 신규 투자를 중단하고 저수익·금융자산을 재편해 약 1조원의 현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KT&G 분당타워를 매각한 데 이어 최근 서울 도심권역(CBD) 인근에 위치한 을지로타워에 대한 매각 입찰을 진행했다. 아울러 우량 호텔인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 매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은 2016년부터 KT&G가 100% 자회사인 상상스테이를 통해 운영 중이다. IB(투자은행) 업계에선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이 서울 지역 우량 물건인 점을 고려해 매각가를 1000억~2000억원대로 추정한다.
[홍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