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출산율 문제가 심각한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저출산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출산율은 2000년 1.48에서 2023년 0.72로 절반 넘게 하락했다. 지난해 새로 태어난 아이 숫자는 약 23만 명으로 사망자보다 12만 2800명가량 적었다. 매년 제천시나 통영시 같은 도시가 하나씩 사라지는 셈이다.
저출생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고, 빈곤 문제와 보건 위생 문제가 일정 정도 해결된 대다수 선진국에서 출산율은 떨어진다. 가족노동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던 농경사회와는 달리, 양육의 여러 가지 양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중요하지 않다’(눌민)에서 세계적 인류학자인 로버트 러바인과 세라 러바인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인류의 역사에서 부모 역할이 세 번의 큰 변화를 겪어왔다고 말한다. 첫 번째 변화는 약 1만 1000년 전, 농업과 목축의 발명과 함께 시작됐다. 이때부터 인류의 양육 기준이 농사짓고 목축하는 가족에 맞추어졌다. 부모들은 가내 식량 생산 단위에서 아이들 일을 감독하고, 그들을 한몫하는 작은 일꾼처럼 길렀다.
약 250년 전, 산업혁명과 함께 두 번째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증기기관이 도입되면서 공장과 시장이 들어서고, 국가 관료 시스템이 생겨났다. 가족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출퇴근이 일상화하고, 생산은 대부분 집 밖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관료적 보건 시스템이 도입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의무 교육을 받았다. 이 변화는 대다수 국가에서 아직 진행 중이다.
세 번째 변화는 20세기 후반 ‘인구학적 전이’와 함께 일어났다. 사회 경제적 발전과 의료 기술의 혁신 덕택에 영유아 사망률이 감소하고, 뒤이어 출산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식이 절대 죽지 않으리라 믿기에 대다수 부모는 아이를 한둘만 두려 한다. 또한 이들은 과거보다 나이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상태에서 가정을 꾸렸기에 아이들이 어릴 때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 사회는 완연히 세 번째 변화 단계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자녀 양육을 둘러싼 부모들의 강박적 공포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우리 사회가 아이를 제대로 기르기에 너무 힘들고 위험하다거나, 자기 능력이 아이에게 충분한 기회를 부여하기엔 부족하다거나, 아이에 얽매여 자기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등의 인식이 만연한 것이다. 이를 해소하려면 물론 사회 경제적 해결책이 우선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양육을 극단적 고통으로 여기는 이러한 태도나 문화는 장기적으로 사회 유지에 치명적 영향을 끼친다. 우리 사회의 파멸적 출산율은 그 선연한 증거다.
러바인 교수 부부에 따르면, 현대사회 부모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집 밖 일터에서 바쁘게 일하면서도 오히려 양육 부담을 크게 늘리는 쪽으로 행동해 왔다. 자녀 발달에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부모가 더 많은 관심과 생각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양육을 정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모들에게 양육은 알아서 자라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경험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희생을 거듭해야 하는 헌신적 경험, 엄청난 능력자나 잘할 수 있는 기적처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파멸적 경쟁체제가 그 원인 중 하나이다. 많은 부모는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매우 경쟁적이라 보고, 맹렬한 양육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탓에 아이의 삶에서 학습과 공부의 비중이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다. 부모들은 청소, 설거지, 요리, 동생 보기 등 과거에 아이가 해냈던 집안일을 대신하고, 시간을 쪼개 아이들 공부를 봐주거나 학원에 보내는 걸 당연시한다. 이는 가뜩이나 바쁜 부모 시간을 빼앗고, 노후 대비에 필요한 경제력을 고갈시킨다.
또한 부모들은 자식에게 닥칠 각종 불행이나 위험 요소를 신경증적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실제로 아이가 다치거나 죽을 위험은 극적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너무 많이 아는 게 병이 되었다. 아동 성추행, 놀이터 사고, 위험한 백신(?)이나 약물, 괴롭힘이나 따돌림 등 아무튼 아이들에게 해로울 듯한 끔찍한 정보가 수시로 부모들 마음에 공포의 폭탄을 심어놓는다. 아이들의 회복 탄력성은 쉽게 무시되고, 평생의 트라우마 같은 잘못된 상식은 널리 수용된다. 그 탓에 오늘날 육아는 미션 임파서블, 쏟아지는 위험을 요리조리 피해서 무사히 생존해야 하는 불가능한 경험으로 인식된다. 현대사회 중산층 부모들의 과도하고 자멸적인 양육 태도를 ‘헬리콥터 양육, 집중 양육, 편집증적 양육’이라고 한다. 이는 ‘노예가 된 부모’를 낳는다. 아이 기르는 일이 부모 인생 전체와 맞바꾸는 제로섬 게임처럼 변한 것이다. 청년 부부들 상당수가 양육을 막대한 짐으로 끌어안거나, 양육을 완전히 거부하고 아이 없이 사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러한 강박적 양육 태도의 밑바탕엔 지난 수십 년 동안 영향력을 키워온 이른바 ‘아동 전문가’의 협박적인 충고, 특히 아동 발달에 대한 부모 책임을 과장하는 아동 심리학의 편향이 놓여 있다. 이들은 모두 ‘양육가설’에 의존해 사고한다. 양육가설이란, ‘유전적 요인을 제외하면 부모가 아이를 기르는 방식이 아동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심리학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이김)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아동 발달에 미치는 부모 영향력은 완전히 과장돼 있다. 아이 성장과 성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또래 집단이다. 다섯살때까지 유아기 아동의 행동은 확실히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아이의 세계가 넓어짐에 따라 아이는 점차 우정과 사랑, 다툼과 경쟁 등 또래와의 삶에서 영향을 받는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이른 나이에 부모로부터 받았던 여러 경험은 사회적 정체성에 밀려 거의 희미해진다. 아이의 일생에서 부모의 영향은 장기적이지 않다. 러바인 부부 역시 성장 초기에 부모가 보내는 사랑에 아이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애착 이론’을 비판한다. 아이를 외롭게 방치하거나 엄격한 권위로 짓누르면, 트라우마가 되어 장기적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다. 부모가 아이에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아이는 온갖 역경을 잘 이겨내고 스스로 성장하는 힘, 즉 회복 탄력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걸 쏟아부어야 아이를 제대로 기를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그보다 부모로서의 짐을 내려놓고 품이 덜 드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기름으로써 양육과 일, 다른 활동 등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거짓된 육아 정보에 휘둘려서 자신을 강박적으로 몰아가고 수시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육아 방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아이 일생에서 부모는 미디어가 과장해서 퍼뜨리는 강박적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 무거운 육아에서 가벼운 육아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