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나라에는 가양주(家釀酒)라는 고유의 문화가 있었다. 집에서 빚은 술이란 뜻으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그들 각자의 노하우와 레시피가 존재했다. 집에서 장이나 김치를 담그듯, 각자의 방식으로 술을 직접 빚어서 마셨고 오래된 조리서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 조리서인 <산가요록> <음식디미방> 등의 고서에는 술 빚는 방법과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오면 독막과 마포나루 부근에서 삼해주를 수천 독이나 빚었다는 내용을 통해 당시의 술 유통량이 상당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1930년대 이전에는 주점에서 막걸리를 직접 만들어 잔술로 팔던 문화가 성행했다. 그러다 1934년 가양주 제조면허가 폐지되면서 직접 술을 빚는 문화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시간을 2023년으로 돌려보면 최근 국내 탁주 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국세청 국세통계에 따르면 탁주 출고 금액은 10년 만에 5000억원을 넘어섰다고 전해진다. 전통주 교육기관은 술 빚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명 교육기관은 몇 개월 대기 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인기가 높다. 탁주 시장은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프리미엄화, 개성 있는 부재료의 사용, 실험적인 양조 방식 등 다양성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최근엔 가양주 문화가 전통주점과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다시 부활하는 현상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포착된다.
서울 통인동 고즈넉한 동네에 위치한 ‘통인소쥬방’은 최근 미식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전통주점이다. 소주방(燒廚房)은 궁궐의 부엌을 일컫는 옛 이름으로 격조 있는 음식과 우리 술, 풍류 문화가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국산콩으로 만든 고소한 모두부, 담백한 맛이 일품인 무전 등 식재료 본연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음식을 한옥 공간 안에서 즐길 수 있다. 직접 빚은 탁주, 송순주, 소주 등의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20년 가까이 전통주를 빚어오고 있어요. 매화꽃, 살구꽃, 복숭아꽃, 자두꽃처럼 계절감을 잘 살릴 수 있는 특별한 재료를 더해 술을 빚고 있어요. 통인양조장을 함께 운영하며 전통주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어요.” 박차원 통인소쥬방 대표가 설명한다.
해방촌의 미식 명소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윤주당’ 역시 밤엔 전통주점으로 운영하면서 다양한 술 빚기 클래스를 운영하며 가양주 문화를 되살려오고 있다. 장미, 허브, 솔잎, 벚꽃 등 계절감을 살린 매력적인 부재료를 더한 전통주 클래스를 개최하여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윤주당 의 윤나라 대표는 2019년부터 전통주점을 운영하며 자신만의 술을 만드는 것을 꿈처럼 생각해왔고, 마침내 ‘남산의 밤’이라는 크래프트 막걸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윤주당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주막이죠. 여기에 오면 달도 잘 보이고, 이런 지역성을 잘 살린 이름을 고민하다 단호박을 사용해 달빛의 색감을 살린 술을 직접 빚게 되었어요.”
윤 대표는 여러 해 걸쳐 다양한 레시피와 방식으로 술을 빚으며 소비자들이 어떤 맛을 더 선호하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초반에는 산미가 부각되는 방향으로 술을 빚었다면, 요즘엔 조금 더 드라이하고 묵직한 질감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윤주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술을 만들고 즐기는 방식을 고민하고 제안한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다양한 지역에 양조장과 전통주점을 겸하여 본인들이 만들 술과 잘 어울리는 음식 페어링을 함께 제안하는 공간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부산 광안리 해변가에 위치한 ‘꿀꺽하우스’는 브루어리와 펍을 합친 ‘브루펍’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흥미로운 가양주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마스브루어리’ 역시 수준 높은 술과 함께 전통주 오마카세를 선보이고 있다. 경남 통영시에 위치한 예약제 식당 ‘야소주반’은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로 유명한 박준우 대표와 그의 아내 김은하 대표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제철 해산물로 만든 기본기 탄탄한 음식과 함께 직접 빚은 막걸리를 페어링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악산 생막걸리’와 ‘과천미주’를 양조하고 있는 과천도가 양조장도 근거리에 ‘별주막’이라는 주점을 경영하며 지역과 공동체라는 가치를 담아내고자 노력해오고 있다.
녹사평역 근처에 위치한 ‘녹취록’은 조금 더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전통주점이다. 푸른 플랜테리어 속에서 근사한 녹사평 삼거리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면 2~3평 남짓의 아주 작은 양조장이 보인다. 녹취록은 ‘자아도취’라는 크래프트 막걸리를 직접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자아도취는 내추럴 와인처럼 산미와 당도가 좋고, 과실미도 풍부한 막걸리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탁주다. 이 술을 만든 녹취록의 양조사는 “막걸리에 일체 첨가물을 넣지 않고 자연 발효로 양조하기 때문에 내추럴 와인과 일부분 비슷한 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자아도취는 오양주로 빚는데 한 번에 빚어 완성하는 단양주와 비교해 더 긴 시간 발효와 숙성을 거치기 때문에 더욱 많은 공이 들어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과실미가 풍부하며 복합적인 맛과 향을 지녀 칵테일과 같은 뉘앙스를 연상시킨다. 장인정신과 도전, 모험, 창의성이 응축된 맛이다. 최근 전통주 신에는 이처럼 젊은 양조사들이 틀에 갇히지 않고 두려움 없이 자유로운 방식으로 만든 다양한 술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며 미감에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김아름 술 칼럼니스트
패션 매거진과 남성지 피처 에디터로 술과 음식에 대한 글을 써왔다. 현재는 낮에 콘텐츠 에디터로, 밤에는 바를 유랑하면서 미식과 다양한 주류를 탐닉하며 자유로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