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자동차 기업이 올해 3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1954년 하동환자동차제작소로 시작해 1988년 이후 35년간 쌍용자동차라고 불렸던 이 기업은 ‘KG모빌리티’라는 사명으로 새 출발에 나섰다. 2025년까지 전기차 4종을 출시하고, 자율주행·소프트웨어 기술 개발 등에 집중해 미래지향적 기업으로 재탄생하겠다는 게 KG모빌리티의 각오다.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 쌍용차는 비운의 주인공이자 질긴 생명력의 상징으로 통한다. 반복된 자금난으로 회사의 주인이 수차례 바뀌었고,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두 차례 겪었다. 이 와중에도 쌍용차는 렉스턴, 티볼리, 토레스 등 인기 모델을 출시하면서 브랜드 명맥을 이어왔다. 새 주인 KG그룹의 품에 안겨 KG모빌리티로 개명한 쌍용차는 질곡의 역사를 끊어낼 수 있을까.
KG모빌리티라는 새 이름에는 쌍용차가 겪었던 수난시대와 결별하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쌍용차의 역사는 곧 자금난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故) 하동환 한원그룹 명예회장은 1954년 서울 마포구 창천동 소재 자신의 집 마당에 천막으로 된 공장에서 ‘드럼통 버스’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상용차 전문 기업을 일궜지만,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1986년 회사를 쌍용그룹에 매각했다.
쌍용그룹 시절 쌍용차는 무쏘(1993년), 이스타나(1995년), 체어맨(1997년) 등을 출시하며 라인업을 확대했지만, 외환위기를 맞아 1998년 대우그룹에 매각됐다. 이듬해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쌍용차는 5년간 채권단 체제로 운영됐다. 2004년 중국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된 뒤에는 최대주주로부터 별다른 투자 지원도 못 받고 기술 유출만 당했다는 ‘먹튀’ 논란에 휩싸이며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09년 인도 마힌드라에 인수된 뒤에도 2016년 한 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적자를 기록하다 또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KG그룹이 쌍용차의 최종 인수 예정자로 확정된 시점은 지난해 6월 말이다. 이로부터 2개월여 뒤인 9월 1일 곽재선 KG그룹 회장이 쌍용차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올해 3월 22일 정기주주총회에서 KG모빌리티로 사명 변경이 확정되면서 쌍용차라는 이름은 35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KG모빌리티가 내세우는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은 ‘Go Different. KG MOBILITY’다. 이 슬로건에는 독자 기술로 사륜구동차 시대를 열고, 국내 업계 최초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풀라인업 체계를 구축했던 역사에 이어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가 함축됐다.
단기 실적만 놓고 보면 현재까지 KG모빌리티의 재도약 계획은 순항하고 있다. 매출 1조339억원에 영업이익 41억원을 기록한 지난해 4분기 경영 실적이 단적인 사례다. 숫자만 놓고 보면 미미한 실적이라 볼 수 있지만, 이는 2016년 4분기(영업이익 101억원) 이후 24개 분기 만에 이룬 흑자 전환 사례라 의미가 크다.
KG모빌리티 실적 개선의 1등 공신은 중형 SUV 토레스가 꼽힌다. 지난해 7월 출시된 이후 토레스는 KG모빌리티 내 단일 모델 기준 월간 최다 판매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토레스가 출시되기 전까지 국내 시장에서 월간 최다 판매 기록을 보유한 모델은 2015년 10월 5237대 판매된 티볼리였다. 토레스는 올해 1월 국내에서 5444대가 팔리며 티볼리의 기록을 넘어섰고, 지난 3월에는 6595대로 판매량이 늘면서 자체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3월까지 토레스는 누적 3만9336대 팔렸다.
KG모빌리티는 올해 1~3월 국내외에서 총 3만4993대를 판매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50.9% 증가한 실적이다. 3개월간 국내 판매는 2만2819대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57.6% 증가했고, 해외 판매는 1만2294대로 37.9% 늘었다.
완성차 판매를 늘려나가는 것 외에도 KG모빌리티는 인증 중고차, 특장차 등 다양한 신규 사업도 꾀하고 있다. 인증 중고차 사업은 5년·10만㎞ 이내의 자사 브랜드 차량을 매입해 성능 검사와 수리를 거쳐 품질을 인증한 중고차를 판매하는 사업이다. KG모빌리티는 올해 상반기에 판매, 정비 조직, 체제 등 분야별 사업 준비를 마치고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인증 중고차 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또 KG모빌리티는 현재 판매하는 전동 사이드스텝과 데크톱(픽업트럭 적재함 덮개) 등 자동차 맞춤 제작 용품 사업 강화와 함께, 특수 목적용으로 쓰이는 특장차 제작·판매 등을 위한 별도 법인을 설립하고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KG모빌리티의 매출 실적은 국내 시장에 편중됐다. 지난해 매출 3조4233억원 중 2조2275억원(65%)이 국내에서 발생했다. KG모빌리티가 작년 국내 시장에서 판매한 자동차는 총 6만866대다. 이는 한국에 생산 공장 하나 없이 해외에서 제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주요 수입차 브랜드보다 낮은 실적이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가 수입차 브랜드별 신규 등록 대수를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메르세데스-벤츠는 8만976대, BMW는 7만8545대를 판매했다.
한국 자동차 시장 규모가 점진적으로 커지고는 있지만 KG모빌리티가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넓지 않다. 국내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 완성차 업체들은 지난해 국내에서 총 139만5111대를 판매했다. 현대자동차(68만8743대)와 기아(54만1068대)의 합산 점유율은 88%에 이른다. 나머지 시장을 놓고 KG모빌리티, 한국GM, 르노코리아자동차 등이 경쟁하고 있다.
국내 수입차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도 KG모빌리티에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25개 수입차 브랜드의 신차 판매량은 28만3435대에 이른다. 여기에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가 집계한 테슬라 차량 신규 등록 대수 1만4571대를 합산하면 총 29만8006대 규모다. 국내 수입차 시장 규모는 2012년 13만858대에서 10년 만에 약 2.3배 커졌다. 수입차 업계는 고가의 차량들뿐 아니라 낮은 가격을 무기로 삼는 모델들도 국내 시장에 내놓고 있다.
KG모빌리티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정공법뿐이다. 우선, 토레스를 비롯한 주력 모델을 국내 시장에 안착시켜 연간 내수 판매 10만 대 선을 회복하는 게 1차 목표다. 올해 1분기에 나타난 실적 개선의 분위기를 연말까지 끌고 간다면 내수 판매 10만 대 회복이라는 목표 달성에는 큰 문제가 없다.
여기에 KG모빌리티는 수출 확대를 위해 글로벌 시장 공략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미 완성차 업체들 간 경쟁이 치열한 미국·유럽 등 선진 시장보다는 아프리카·남미·동남아 등 신흥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겠다는 것이 KG모빌리티의 구상이다. 한국 브랜드에 대한 높은 신뢰도를 보이는 시장에서 ‘한국 프리미엄’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올해 4월 4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KG모빌리티 비전 테크 데이’에서 곽재선 KG그룹 회장은 이 같은 계획을 밝혔다. 곽 회장은 “자동차 시장은 매우 크다. 규모는 작을지라도 아프리카·남미에서도 자동차는 필요하다”라며 “한 우물을 깊게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넓게 파는 것도 중요하다. KG모빌리티는 능력에 맞는 새로운 전략으로 넓은 시장을 공략할 것”이라고 말했다.
KG모빌리티가 사명을 바꾸고 나서 첫째로 뛰어든 해외 신시장은 베트남이다. KG모빌리티는 지난 3월 말 베트남 푸타그룹의 킴롱모터와 KD(현지조립형 반제품) 수출 계약을 맺었다. 킴롱모터는 현재 베트남 다낭 인근 산업단지에 KG모빌리티 전용 KD공장을 건설 중이다. 수출 물량은 내년 1만5000대를 시작으로 2029년까지 6만 대 등 총 21만 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될 경우 베트남 KD 수출로 KG모빌리티가 일으키는 매출은 6년간 총 6조원에 달한다.
이에 앞서 KG모빌리티는 지난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 KD 파트너사인 SNAM과 사업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SNAM은 사우디에 자동차 조립 공장을 세워 렉스턴 스포츠&칸, 렉스턴 등을 생산할 계획이다. 올해 1월에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차량 유통기업 NGT와 올해 7000대를 시작으로 향후 1만 대 수준으로 물량을 확대하는 수출 계약을 맺었다. NGT 임원진은 지난 2월 13~14일 1박 2일 일정으로 KG모빌리티를 방문해 토레스와 코란도가 생산되는 평택공장 조립 1라인과 섀시 라인을 둘러보고 토레스 등 차량을 시승했다.
KG모빌리티는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KG모빌리티의 전동화 계획은 오는 2025년까지 전기차 4종을 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최근 공개한 ‘토레스 EVX’를 비롯해 내연기관차 기반의 전기차 ‘O100’(이하 프로젝트명)과 ‘KR10’,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적용한 ‘F100’ 등의 출시가 예고된 상태다.
앞으로 KG모빌리티는 전동화, SDV(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자율주행, 클라우드 기반의 인공지능(AI) 시스템 등 4가지 분야에 기술 개발 역량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앞서 현대차그룹, 토요타그룹, 폭스바겐그룹, 메르세데스-벤츠그룹 등 주요 완성차 그룹들이 발표한 중장기 전략을 종합한 계획에 가깝긴 하다. 그동안 법정관리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상 유지만으로도 벅찼던 KG모빌리티가 늦게나마 미래 기술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KG모빌리티가 청사진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직 투자 규모도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비전 테크 데이에서 곽 회장은 “투자 금액이 문제가 아니고 발생하는 이익이 먼저다”라며 “투자 금액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생각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KG모빌리티는 쌍용차 시절 손 놓고 있던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지난해 KG모빌리티의 연구·개발(R&D) 비용은 총 1561억원으로 2012년 1312억원과 비교할 때 최근 10년간 19% 늘어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현대차의 R&D 비용은 1조6316억원에서 3조3405억원으로 105% 증가했다.
관건은 새로운 리더십의 지원이다. 앞으로 KG모빌리티의 R&D 인력이 얼마나 늘어나고, 관련 투자가 얼마만큼 확대되는지가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곽 회장은 “과거 쌍용차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는 직원들의 능력·의지 문제가 아니라 리더십 부재 때문”이라며 “앞으로는 새로운 모빌리티 회사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광민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