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상 효과와 인플레이션 부담으로 가계부채가 급등하고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자 급성장한 전기차 시장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국제 유가 인상에 대한 반사효과로 전기차 수요가 급등하는 등 최근 몇 년간 호황기를 누렸던 전기차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격 인하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몰두 중이다.
급성장하는 전기차 시장에 대한 기대와 별개로 살아남기 위한 전기차 기업들의 ‘치킨게임’이 가속화되면서 강한 자만 살아남는 무한경쟁이 예상된다. 치킨게임의 주도권은 강자가 가져간다. 1위 기업이 얼마나 제살을 깎아가며 버텨내느냐가 치킨게임이 얼마나 길어지는지 결정한다. 전기차 시장의 압도적 리더는 현재로선 테슬라다. 테슬라를 대체할 전기차 기업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GM과 포드가 타도 테슬라를 외치며 전기차 경쟁력 확대에 나서지만 여전히 시장 주도권은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가 쥐고 있다.
테슬라는 지난해 전기차 수요가 급증하자 자사 전기차 가격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각광받으며 없어서 못 파는 차가 된 것이 이유다. 실제 대기기간은 1년 이상으로 늘어났고 웃돈을 얹어 차를 사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국제 유가 급등으로 갤런당 휘발유 가격이 4~5달러를 넘어선 미국 입장에선 내연기관차를 벗어나 전기차를 사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게다가 중국의 테슬라 공장인 기가팩토리 상하이가 코로나19 셧다운으로 인해 운영이 중단되면서 이러한 공급 부족 사태가 장기화됐다. 생산 차질로 인한 피해를 차치하고서라도 넘치는 자동차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상황은 삽시간에 역전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급격한 금리 인상의 충격파를 시장이 흡수하지 못했다. 금리는 연일 높아졌고 거시경제의 위기 가능성은 나날이 높아졌다. 결국 두 손 두 발 든 미국은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생필품 가격까지 급등하며 미국 소비자들은 아끼고 또 아끼는 데 집중했고 전기차를 사는 것에 대한 부담은 크게 늘었다. 역으로 국제유가가 안정화되면서 내연기관 자동차에 대한 수요 역시 자연스레 늘어났다. 결국 가격을 올렸던 테슬라는 다시 가격을 낮추는 것을 택했다.
CEO 리스크도 컸다. 일론 머스크의 무리한 트위터 인수로 테슬라의 기업 가치가 크게 피해를 입었다. 주식 시장 전반이 좋지 않았던 것과 함께 기업의 CEO 리스크가 더해져 테슬라 주가는 바닥없이 무너졌다. 결국 테슬라는 주요 모델 가격의 20%가량을 인하하는 조치를 올해 1월 단행했다.
고급 모델인 모델 Y는 최대 1만3000달러나 인하하며 큰 폭으로 가격을 낮췄다. 이는 세액공제 요건을 맞추기 위한 꼼수로 보인다. 모델 Y는 올해 SUV형 전기차에서 세단형 전기차로 재분류됐다. 현재 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까지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 미국은 외국산 자동차와의 차별을 통해 미국산 전기차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특히 세단형 전기차는 5만5000달러 미만, SUV 전기차는 8만달러 미만이어야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만큼 모델 Y의 가격을 대폭 낮춰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테슬라에 이어 미국 시장 점유율 2위를 달리고 있는 포드 역시 이에 맞대응을 했다. 포드는 머스탱 마하-E 모델의 가격을 최대 8.8% 인하했다. 포드 역시 수요 급증과 원자재 및 인건비 급등을 이유로 가격을 올린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가격을 재차 내린 셈이다. 이 역시 다분히 테슬라를 의식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전기차계의 신성으로 불리는 루시드 역시 최근 8만달러가 넘는 자사 제품에 7500달러를 지원금으로 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며 사실상 차량 인하 효과를 내도록 했다.
아예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저렴한 전기차도 선보이고 있다. GM의 SUV 차량 이쿼녹스 전기차는 최근 가격 인하를 통해 3만달러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휘발유 모델이 2만6600달러인 것에 비하면 불과 3000달러가량 비싸다. 전기차 보조금을 감안하면 결국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가격이 싼 셈이다. 통상적으로 원자재 가격의 차이로 인해 같은 성능이면 전기차의 가격이 더 비쌀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이제 내연기관차보다 더 싸게 살 수 있는 전기차까지 등장하며 전기차 치킨게임을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테슬라 대표모델 모델3 역시 세액공제 전 가격은 4만3500달러로 경쟁차종인 BMW 3시리즈의 북미 가격보다 300달러가량 저렴하게 책정됐다. 전기차 세액공제까지 적용하면 훨씬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 역시 이러한 전기차들의 가격 하락이 내연기관차의 퇴출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통상 1만~2만달러 비싸던 전기차가 사실상 내연기관차보다 싼 시대가 열리면서 전기차의 치킨게임뿐 아니라 내연기관차와의 진검승부도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 기사에서 “이제 전기차 일반 모델이 내연기관차보다 더 저렴해지는 시대가 열린다”라며 “전기차의 경쟁력이 내연기관차보다 훨씬 높아진 상황이다”라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자동차의 평균 가격을 살펴봐도 전기차의 경쟁력이 우수하다. 전기차의 평균 판매가격은 6만1488달러로 모든 승용차와 트럭차의 평균인 4만9507달러보다 1만1981달러가량 비싼 상태다. 이에 세액공제 효과와 최근 가격 인하 효과까지 감안하면 앞으로 이러한 가격 경쟁력은 더욱 커진다는 의미다.
또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효과는 미국 생산 전기차의 경쟁력을 한층 더 높이는 분위기다. 외국 생산 해외 전기차에 대한 세액공제 효과를 없애면서 사실상 미국산 자동차의 가격 인하 효과가 더욱 커지고 있다. 현대차, BMW, 폭스바겐 그룹 등 미국 기준 외국산 전기차 업체에겐 위기지만 미국 자동차 기업엔 호재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이러한 가격 인하는 자국 완성차 기업의 경쟁력 확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물론 압도적 1위, 테슬라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2021년 미국의 전기차 신차 판매량 점유율은 72%에 달했지만 1년이 지난 2022년엔 65%로 떨어졌다. 1년 새 7%p가량 떨어진 것이다. 압도적 1위였던 과거와 달리 현재 모든 완성차 기업들이 타도 테슬라를 외치며 공격적으로 전기차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는 여전히 전기차 판매 순이익이 한 대당 9500달러에 달해 압도적으로 높다. 시장 지배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데다 높은 영업마진이란 결정적 무기를 갖고 있는 만큼 향후 시장 지배력 확대를 위해 모든 수를 쓸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제한된 모델이지만 소품종 대량생산 전략을 통해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데 적합한 생산 공정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술경쟁력과 생산 효율성을 바탕으로 향후 끊임없이 경쟁사를 압박하는 가격 전략과 마케팅 전략을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후발주자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와 기술경쟁력에서 더 나은 성과와 더 많은 영업이익을 남길 방법이란 전무하다. 그런 만큼 더 낮은 가격과 더 많은 판매를 해야 하는 GM과 포드, 그리고 현대차 같은 기업들은 고뇌에 빠져있다. 현대차의 경우 잘 성장해온 전기차 시장이 IRA의 여파로 한풀 꺾일 수 있단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대차는 2025년 조지아 공장에서 직접 생산하는 전기차가 나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최대 관건이다. 외국 기업이라도 미국 생산 전기차의 경우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만큼 앞으로 2년간의 시간이 현대차에겐 결정적 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포드는 아예 가격을 더욱 절감하도록 결단을 내렸다. 포드는 최근 세계 1위 배터리 제조사 CATL과 손을 잡았다. 중국 기업인 CATL과 포드는 미국 미시간주에 합작공장을 설립해 포드의 전기차에 직탑재하는 배터리를 생산해 나갈 방침이다. 포드는 이를 위해 35억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해 합작 법인을 만들었다. 이 공장을 통해 전체 생산 자동차의 70%의 배터리를 공수하고 테슬라와 경쟁할 방침이다. 미시간 공장에서는 1년에 40만 대 분량의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협업에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K-배터리 기업 SK온이다. 포드와 협력관계를 공고히 해왔던 SK온은 최근 튀르키예에 합작법인을 설립하려던 계획이 백지화됐다. 뿐만 아니라 최근 포드는 배터리 문제로 전기차 생산을 일시 중단했는데 해당 모델의 배터리가 바로 SK온이 제작한 배터리다. 결국 중단 이유는 원인 불명의 화재인 것으로 확인됐지만 미국 진출을 위해 애써온 K-배터리 기업들에겐 분명히 악재가 발생한 셈이다. CATL의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가격경쟁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만큼 포드는 CATL과의 협력을 통해 가격경쟁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내심을 드러낸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K-배터리 기업에겐 위기가 찾아왔지만 반대로 낙수효과를 누리는 국내 기업도 있다. 테슬라발 치킨게임으로 전장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삼성전기에겐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기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해당 부품은 전기차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핵심 부품으로 전자제품 회로에 전류가 안정적으로 흐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전자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이 부품의 수요는 전기차 판매량이 늘어날수록 증가하는 구조다. 현재 세계 5위인 4%의 점유율을 갖고 있는 삼성전기 입장에서 치킨게임은 시장 점유율 확대의 기회로 불리고 있다. 내연기관차와 달리 전기차는 해당 부품이 3배가량 더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전히 전기차 시장의 확대는 우려보다 기대가 큰 상황이다. 이번 치킨게임이 과거 반도체 시장을 휩쓸었던 상황과 유사할지, 다른 판도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예상이 쉽지 않다. 다만 위기 속에 기회는 항상 반복되는 경향을 띤다. 이번 위기에서 어떤 기업이 기회를 잡을지 또는 어떤 기업이 기회를 놓칠지는 향후 시간이 지나면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전기차업계 관계자는 “결국 치킨게임도 시장을 키우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며 “전기차 시장에 새바람이 불고 많은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춰야 스케일업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추동훈 매일경제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