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선 모든 여성무용수를 ‘발레리나’라고 하지 않는다. 최고의 위치에 있는 단 한명의 솔로를 ‘발레리나’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발레리나 역할을 꼽는다면, 단연 <백조의 호수>의 우아한 ‘오데트’일 것이다. 발레 <백조의 호수>는 악마의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살아야하고 밤에만 사람으로 변하는 오데트 공주와 지그프리드 왕자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이다.
▶신비로운 백조 이야기는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청혼을 거절당한 사악한 마법사 로트바르트의 저주 때문에 오데트 공주와 그녀의 시녀들은 인적이 드문 밤에만 본 모습으로 돌아온다. 달빛이 그윽하게 비치는 호수에 사냥을 나온 왕자는 백조들이 사람으로 변하는 기이한 모습에 할 말을 잃는다. 만인 앞에서 왕자가 오데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 저주가 풀린다는 것을 알게 된 왕자는 기꺼이 다음 날 있을 무도회에서 그녀에게 청혼하고 백년해로할 것을 다짐한다.
무도회 날, 왕자는 검은 의상을 입은 오데트를 발견하고는 기쁜 나머지 이내 그녀와 결혼할 것을 선포해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오데트로 변신한 로르바르트의 딸 오딜이었다. 오딜은 흑조(黑鳥), 오데트는 백조(白鳥)로 구분하는데 보통 한 발레리나가 두 역할을 함께 맡는다. <백조의 호수>를 발레리나의 최고봉으로 꼽는 이유도 선과 악으로 상반된 두 백조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야하기 때문이다. 발레리나는 슬픔을 머금은 표정으로 가녀린 손짓을 고혹하게 선보이는 ‘부드러운 백조 오데트’와 32회전 ‘푸에테’를 비롯한 고난이도 기계적 테크닉을 연속적으로 보여야하는 ‘당당한 흑조 오딜’의 양면을 한 무대에서 펼쳐야 한다.
계략에 속았다는 것을 직감한 왕자는 오데트를 찾아 호수로 달려가고 이들의 가슴 아픈 사랑은 다시금 악마 로트바르트와 맞서게 된다. 이윽고 그들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백조의 호수>의 결말은 극단과 안무가의 해석에 따라 여러 버전으로 각양각색이다. 오데트와 왕자 그리고 로트바르트까지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있는 반면, 로트바르트만 처단되는 반전의 해피엔딩도 있다. 마법을 풀지 못해 오데트는 계속 백조로 남아있어야 하기도 하고, 왕자와 오데트가 모두 백조가 되는 버전도 있다. 지금은 자율적인 버전으로 공연하지만, 소비에트 시기에는 인민들에게 좌절감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볼쇼이, 마린스키 발레단 모두 행복한 결말로 사랑의 결실을 맺으며 정부방침을 따랐던 시절도 있었다.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예견된 발레 작곡
어린 시절부터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움직이는 동작에 어울리는 음악적 리듬과 선율을 터득했고, 자연스럽게 춤추고 싶게 만드는 천부적인 음악 감각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정적인 기악곡이나 성악곡을 작곡하면서 틈틈이 조카들을 위해 ‘러시아판 선녀와 나무꾼’인 백조 전설에 독일작가 무제우스의 동화를 섞어 발레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장 베기체프가 발레신작을 차이코프스키에게 의뢰했고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1877년, 4막 29장 36곡의 대규모 낭만발레 <백조의 호수>가 세상에 나왔으나 볼쇼이 극장의 초연은 관객의 조롱과 야유만이 가득했다. 직접 대본을 집필했던 극장장 베기체프는 안무자를 변경해 3년 뒤 다시 야심차게 무대에 올렸으나 이는 초연보다 더욱 참담한 패배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음악이 시원찮아서가 아니라 주옥같이 너무나도 출중해서였다. 당시 발레음악은 극진행과 인물에 방해되지 않도록 병풍처럼 나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져야 했다. 허나 <백조의 호수>는 안무와 음악이 극적인 혼연일체를 이루어 극을 압도했다. 이에 적응이 안된 관객들은 음악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서서히 관객의 성향도 변화되어 차이코프스키의 후속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 <호두까기인형(1892)>은 성공가도를 달린다. <백조의 호수>는 차이코프스키 추모공연 레퍼토리로 선정되고서야 다시 수면위로 오른다. 당대 최고의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와 레프 이바노프(1834~1901)가 공동 안무한 버전은 불멸의 명작으로 이어져 한 세기가 넘게 흘러도 이들의 안무 초안은 클래식 발레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영국의 매튜 본이 근육질의 남성무용수들로 재창작한 <백조의 호수(1995)>, 남아공의 다다 마질로가 아프리카민속춤을 혼합해 안무한 <백조의 호수(2010)> 각기 다른 상황으로 재해석된 작품들이 차이코프스키의 선율 아래에서 다채롭게 연출되고 있다.
▶거니는 정도의 사교춤이 예술적 발레가 되기까지
발레는 15세기 르네상스시대를 연 이탈리아 메디치가문의 ‘우아한 행진’ 정도의 사교춤에서 시작한다. 어원도 이탈리아어 ‘춤추다’라는 의미의 발라레(Ballare)에서 유래한다. 1533년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느가 프랑스의 앙리 2세에게 시집가면서 프랑스 왕실에 발레를 소개했다. 1572년, 그녀는 샤를 9세의 모후로서 한 달 동안 수만 명의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는 씻을 수 없는 역사의 과오가 있다. 뒤이어 차남 앙리 3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메디치가문의 후예답게 이 핏자국을 예술적으로 상쇄하려 노력했다. 1581년 그녀는 이탈리아 발레교사 발사르 보주아예의 ‘여왕의 바렐 코미크’를 적극 후원하며 역사상 최초의 발레작품이 세상에 나오도록 만들었다. 이후 17세기 국가와 본인을 동일시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발레를 통치수단으로 삼자, 발레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본격적인 무대예술장르로 자리 잡는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가 세계적인 안무가들을 적극초빙하자 발레의 주무대는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기존 2인무(그랑 파드되), 내용과 상관없는 군무의 향연(디베르티스망)등 클래식발레가 러시아에서 꽃피운다. 기존 낭만발레의 다리를 덮는 긴 의상은 고난도 테크닉을 구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짧은 투투(Tutu·여성이 입는 발레의상)가 유행한다. <백조의 호수>도 초연 때는 긴 의상으로 환상적인 내용을 강조했지만, 이후 버전에서는 치마를 짧게 만들어 정교한 다리 각과 선이 유연한 팔 동작과 절묘하게 대칭되도록 연출했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시어터(St Petersburg Ballet Theatre, SPBT)가 프리마 발레리나 이리나 코레스니코바와 처음으로 한국무대를 찾는다. SPBT는 전 세계에서 연간 최대 250회에 달하는 공연을 거의 매진으로 올리며 국가보조금 및 민간후원에 의존하지 않는 혁신적인 순수예술단체로 정평이 났다. 작품성과 대중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SPBT의 매진 레퍼토리 <백조의 호수>에 유독 눈길이 가는 이유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시어터의
<백조의 호수> 140분(인터미션 20분 포함)
·공연일시 : 2019년 8월 28일(수)~9월 1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