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들을 냄새로 기억한다. 페이지 사이에 코를 대면 다양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소설의 한 구절이면서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눈을 감고 떠올려 보자. 오래된 헌책방, 낡은 학교 도서관에 들어설 때, 모여있는 책들이 내뿜는 감성 한움큼. 스치는 추억들. 그런데, 책에서 나는 냄새, 요즘 표현대로 F를 넘어 꽤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나무향에 가까운 냄새 리그닌(Lignin), 계피같이 따뜻한 벤즈알데하이드, 신맛이 섞인 푸석한 아세트산과 같은 물질이 혼합돼 나는 냄새라고 한다. 시간과 함께 원인물질의 향도 깊어지는 것이다. 책에서 나는 냄새, 특히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기를 사랑하는 감각을 일컬어, 비블리오스미아(Bibilosmia)라고 한다. 프랑스는 비블리오스미아를 즐길 수 있는 천국이다.
우리 국민들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 이용하는 관문, 샤를드골 공항에서 북쪽으로 차로 30분 거리에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오를레앙 가문의 고성, 샹띠이성이 있다. 007시리즈 ‘A View to Kill’에서 악당 맥스 조린의 저택으로 등장해 유명한 이 성은 프라푸치노 위에 올라가는 휘핑크림이 처음 만들어진 곳으로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샤또(Château, 성)중 하나다. 이 샹띠이성의 백미, 비블리오스미아를 위한 천국, 바로 ‘콩데 도서관(Bibliothèque du Duc d’Aumale)’이다. 약 6만 권의 도서와 1만 3000점의 필사본 및 고문서가 보존된 이 도서관은 유럽 귀족 문화의 정수로 꼽힌다. 검은 브라운 계열의 목재 서가와 천장화, 붉은 양장의 책들, 그리고 세월의 깊이를 더하는 책의 체취. 이게 귀족의 삶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길 꿈꾸는 그런 공간이다. 하지만 이 도서관의 역사, 프랑스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길지 않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흩어진 왕실 컬렉션을 되찾기 위해 오말 공작(Louis d’Orléans, duc d’ Aumale)에 의해 설립된 게 19세기 중반이다. 마치 왕정복고처럼, 프랑스 혁명 반작용의 산물로 설립된 도서관인 것이다. 궁금해진다. 프랑스혁명 기간 도서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귀족들의 반동이 생겨난 걸까?
오늘의 주제다.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가장 위대한 성과, 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가치. 바로 혁명이 민중에게 헌정한 공공도서관의 출범이 그것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정조대왕이 설치한 규장각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지식을 모아 놓은 서고는 왕족이나 귀족, 또는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책이 보다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일반 대중은 여전히 축적된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고, 책이 주는 감성의 추억을 맛볼 수 없었다. “도서관은 국민 모두의 것이다” 혁명가들은 외쳤다.
1794년 국민공회는 귀족과 성직자로부터 몰수한 도서를 바탕으로 주요 도시에 ‘문학 저장소(dépôts littéraires)’라는 이름의 공공도서관을 설립하는 법안을 제정했고, 1368년 샤를 5세에 의해 루브르궁에 설치되어 납본 제도(Dépôt légal, 발간되는 모든 출판물 1부를 도서관에 제출하는 제도)를 통해 400년 이상 위상을 뽐내 온 왕립도서관을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BnF)으로 공식 전환한다. 단순한 책의 저장소를 넘어, 지식의 보존·전달·확산을 통한 인류 문명의 진화와 깊이 연결된 도서관이 비로소 신분의 차이 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보장된 열린 공간으로 승화한 것이다. 혁명이 귀족의 양식을 대중의 요리로 바꾼 것처럼, 국립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은 귀족의 마음의 양식을 대중의 지식으로 전환시켰고, 근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 민주주의와 철학, 문학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토대를 마련케 했다고 본다. 그로부터 230여 년, 바야흐로 AI의 시대다.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만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 정보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전쟁을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전쟁의 미디어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시대. 정리된 지식의 서고에서 공들여 찾아낸 정보가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발췌된 정보를 소비하는 시대. 그런 시대가 보편화되고 있다. 도서관의 공공성을 선도했던 프랑스는 정보에 대한 판단력과 선택 능력이 저하되는 현실을 어떤 방향에서 타개하려 노력하고 있을까?
소개한다. 프랑스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 갈리카(Gallica). 전 세계 누구나 https://gallica.bnf.fr를 통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2024년 기준 약 900만 건 이상의 디지털 자료가 등재되어 있으며, BnF는 2026년까지 약 5000만 개의 이미지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2차대전 참전군인의 두려움에 찬 얼굴에서 샹띠이 성 콩데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는 마치 우리의 의궤와 같이 중세 유럽의 생활상을 정밀하게 필사한 <베리 공작의 매우 화려한 기도서> 까지 한 두번의 클릭으로 엄청난 이미지 정보에 접근이 가능하다. 자료의 배치는 AI 기술을 적용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보에 접근해 나가는 방식이 전통적이면서 레트로 감성처럼 느껴져 친근하다.
그런데 살짝 부족하다. 분명 책은 정보의 보고뿐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비블리오스미아가 함께해야 진정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디지털이 줄 수 없는 감성.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일까? 2025년 4월 14일 파리 제7구센 강변에 위치한 프랑스 의회(하원) 도서관이 230년 만에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5개의 돔으로 이어진 약 400m²의 천장에 외젠 들라크루아의 고풍스러운 벽화가 펼쳐진 이 도서관은 약 70만 권의 도서 외에도 명저의 사본 약 1900권도 소장하고 있다. 루소의 ‘고백록’, ‘공포 정치’를 주도한 로베스피에르가 주석을 단 헌법 초본, 대혁명의 시작을 알린 ‘테니스 코트의 선서’까지. 도서관이 줄 수 있는 감성의 끝판왕이다. 도서의 공공성을 주장한 혁명의 지도자들이 남몰래 귀족처럼 배타적으로 운용했던 도서관이 대중에게 열린다는 점에서 AI 시대를 여는 혁명의 정신 같다. 프랑스를 여행한다면 혹은 온라인으로 프랑스를 찾아본다면 도서관을 대하는 프랑스인들의 진심을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책의 천국이 선물하는 향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