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반도체’란 별칭이 젊은 세대에게 생소할 수 있지만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회장의 이력서는 화려함 그 자체다. 세계 최초로 16MB, 256MB 디램(DRAM) 개발을 이끌며 삼성 반도체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수년간 국내외 언론지상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전자를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한국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다.
삼성전자를 떠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도 각종 언론은 물론 국내외 학계에서는 반도체 관련 의견을 묻기 위해 진 회장을 찾는다.
퇴임 이후 그는 멈추지 않고 일명 ‘진대제 펀드’를 조성해 사모펀드(PEF) 운용사를 이끄는 투자자로 변신했다. 현재 스카이레이크는 국내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AI 반도체, 2차전지 등 기술 기업들을 비롯해 다양한 섹터에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사무실에서 진대제 회장을 만났다.
서울대 전자공학 학·석사, 매사추세츠주립대 전자공학 석사를 거쳐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IBM왓슨 연구원 생활 후 삼성전자로 입사해 국내 척박했던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초석을 다지며 황금기를 이끌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요직을 거쳐, 디지털미디어 총괄대표 이사를 지낸 후 정부 관료로 진출해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진대제 펀드를 조성해 현재의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Q 과거 경력을 살려서 반도체와 신사업 분야에 대해 투자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A 기술 기업에 대한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AI 반도체 기업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투자를 해왔다. 점점 2차전지 산업이 커지면 자연스레 거기에 사용되는 전지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솔루스첨단소재를 인수하게 된 이유다. 반도체 관련 기업에도 투자를 더 늘릴 생각이다.
Q 반도체 어떤 분야에 투자를 늘릴 생각인가?
A 7~8년 전부터 반도체 패키징 관련 산업을 살펴보고 괜찮은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한국은 거의 대비를 하지 못해 불모지와 다름없는 산업이지만 앞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분야다. 최근에도 대만 기업을 만나 인수 의향을 물었는데 거절당했다. 최근에는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기술 유출과 산업경쟁력 약화를 우려해 막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Q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다른 분야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A 요새 언론에서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나 AI 반도체 분야에서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들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파운드리의 경우 경쟁사인 삼성에게 선뜻 일을 맡기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높은 점유율을 가져가며 잘해 나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패키징 관련 분야는 사실(반도체 산업 전체에서) 구멍이 나 있다고 할 수 있다. SFA 같은 기업이 잘하고 있지만 패키징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도 아니고 몇조 단위 케파의 기업이 나와야 한다.
Q 최근 반도체 공급 과잉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A AI 반도체의 경우 실상 엔비디아의 GPU를 설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시설과 그에 맞는 수율을 올리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미 경쟁사들이 이미 비슷하거나 일부 항목에서는 더 나은 칩을 설계해 내년이면 시장에 많이 깔릴 것이다.
Q 완전히 같은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96년 당시 16M 메모리가 PC 수요에 따라가지 못해 공급 부족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후 공급이 해소되며 반도체 산업이 침체 사이클로 가기도 했었는데?
A 16M 반도체 역시 당시 제조원가의 10배의 가격에 팔렸다. 현재의 일시적 공급 부족이 해소되면 엔비디아 GPU의 가격은 내려갈 것이다. 주가도 일부 조정받을 수 있다.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애플과 그 부품을 공급하는 회사의 시가총액이 뒤바뀐다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 반도체 사이클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시장이 예상하는 AI 거품론과 연관시키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시장이 더욱 커지는 과정에서(가격이 조정된) GPU 생산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Q 현재 AI 산업을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시작과 비교하는 시각이 많은데?
A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다. 챗GPT를 필두로 초기에 서비스 수요가 발생하고 보니 일시적으로 반도체와 데이터센터가 그걸 감당을 못해 가격 상승이 생기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이나 이동통신 산업이 시작될 당시 통신장비 회사들의 주가도 엄청나게 높았다. 시스코 왕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누가 인터넷 장비 회사에 투자를 하나? 인공지능도 그렇게 초기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칩 수요가 줄어들면 시들해질 수 있다.
Q 다소 추상적이지만 AI의 진화 방향이나 그 후는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보는가?
A AI보다 진화된 다른 이름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이란 물결 속에 본격적으로 AI란 이름이 소비된 지 이제 내년이면 10년째에 접어든다. 인공지능 다음으로 또 지능화 시대, 혹은 AI와 디지털 전환을 결합한 새로운 물결이 나올 때가 됐다.
Q 미 대선을 앞두고 중국에 대한 견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경제 블록화 현상이 더 강해지고 있는데, 한국 산업경쟁력을 위해 어떤 조처가 필요할까?
A 예전처럼 미·중 줄타기 외교를 통해서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시대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2015년부터 추진 중인 ‘중국제조 2025’ 계획의 하나로 한국이 그동안 강점이 있던 자동차, 조선, 반도체 산업을 비롯해 제조업 경쟁을 크게 끌어 올렸다. 실질적으로 ‘경제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이 중국의 전기차에 규제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중국을 피해서 잘 할 수 있는 산업을 찾아야 한다.
Q 중국을 비롯해 유럽 등도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단행으로 인해 숨통은 트였지만 미국을 포함한 글로벌 경기 침체 가능성은 없다고 보나?
A 유럽에 가보면 실제로 침체가 많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처럼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관광에만 의지하고 있다. 중국 역시 침체에 들어갔지만, 미국은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잠재 성장률이 2.5%가량인데 규모를 생각하면 엄청난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6~7% 성장하는 것과 체감상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국가별로 경기 순환 사이클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예측하기 어렵다. 코로나19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터졌고 현재 지정학적 위기 역시 하나의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를 예로 들 수 있을까?
A 중국이 10년 전부터 감춰왔던 ‘Made In China’ 상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점차 품질 경쟁력을 높여 좋은 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브랜드화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부족한 분야는 바이오, 식품, 화장품, 자동차 등이다. 저가 공세를 펼쳐도 아직 중국산 약을 믿고 먹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있지 않나? 안전과 연계된 자동차 분야도 더 잘해나가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회도 10년 정도이지 않나 생각한다.
Q 기존 한국이 강점이 있는 자동차, 반도체, 조선산업 등의 비전은 어떤가?
A 우리가 잘해왔던 반도체 자동차 등은 아직 경쟁력이 있는 만큼 더 잘해 나가야 한다. 특히 자동차는 도심항공교통(UAM) 분야로 진화할 수 있다. 중국이 세계 최대의 드론회사인 DJI를 보유하고 있는데 한국은 이에 뒤처진 게 사실이다. 한국의 지형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 UAM을 보급해 앞서 나갈 필요가 있다.
Q 도심에 아파트 거주 문화가 정착해 있고 소음에 민감한 사람들의 특성상 UAM 도입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A 한국에 도입하기에 더 유리하다. UAM의 문제로 지적되는 가장 큰 요소가 분진과 소음인데 최근 기술이 발전하며 많이 줄여나가고 있다. 한국의 아파트 옥상은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어 더 유리하다. 마당이 있는 일반 주택이 많은 국가에서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상 비용 측면에서 더 불리하다.
Q 최근 방송에 출연해 앞으로 개인의 기획력과 창업가 정신이 생존과 직결될 것이란 이야기를 하셨는데?
A 앞으로 대기업들의 채용인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 한국은 미국처럼 지속해서 혁신기업이 탄생해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는 환경도 아니다. 오히려 비용을 위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고 로봇 도입률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개인의 기획력과 창업가 정신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Q AI 신기술의 발전과 효율성을 강조한 플랫폼이 오히려 신규 고용을 늘린다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A 동네에 슈퍼마켓이 하나 생기면 구멍가게 3곳이 문을 닫고, 할인점이 생기면 슈퍼마켓 10곳이 문을 닫게 된다. 새로운 기술이 창출하는 고용과 줄어드는 일자리 수를 계량하기보다는 이제 스스로 소기업을 창업하거나 1인 기업으로 성장해야 하는 환경이 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직장에서도 자기만의 기획력과 기업가 정신을 갖춰야 살아남는 세상이 찾아오고 있다.
Q 마지막으로 직장인과 창업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덕목이 있을까?
A 창업가 정신과 자신만의 기획력 외에 소통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아이디어나 추진력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기의 주장을 펼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창출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요한 합리적인 사고력은 언제나 필수다. 국내 교육환경이 토론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는 데 다소 부족한 측면이 있는 만큼 꾸준한 사고와 훈련과정을 통해 성장한다면 충분히 강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박지훈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9호 (2024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