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차명이 예언이 될 때가 있다. 어쩌면 ‘필랑트(FILANTE)’도 그중 하나다. 프랑스어로 별똥별(e‘ toile filante)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단어는 순간적인 섬광 혹은 잔상, 어딘가를 향한 질주를 함축하고 있다. 르노가새 차에 이 단어를 꺼내 든 건 우연이 아니다. 1956년 본 빌 소금사막에서 세계 최고속도를 경신한 ‘에투알 필랑트’의 영광을, 2025년 모로코의 광활한 트랙에서 87kWh 배터리 하나로 1008㎞를 재충전 없이 주파한 전기 데모카 ‘필랑트 레코드 2025’의 도전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선언이다. 또 하나, 필랑트는 르노그룹의 ‘인터내셔널 게임 플랜 2027’(2024년부터 2027년까지 유럽 외 시장에 8개의 신차를 투입하고, 글로벌 판매의 3분의 1을 하이브리드 또는 전기차로 채우겠다는 로드맵)의 핵심 퍼즐이자 르노코리아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올 1월 프랑스 본사 경영진이 방한해 서울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진행한 사실이 그 상징성을 증명한다. 르노코리아는 이 자리에서 프리미엄 수요를 정조준했다. ‘SM6’ ‘SM7’으로 대표되던 준대형 세단 수요가 크로스오버와 하이브리드로 이동하는 흐름을 필랑트의 진입 근거로 삼았다. 세단의 우아함과 SUV의 실용성을 결합하되, 순수 전기차가 아닌 하이브리드라는 선택은 충전 인프라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감이 여전한 현실에서 설득력 있는 포지셔닝이다. 실제 도로에서 마주한 필랑트의 성능은 꽤 만족스러웠다. 눈길을 끄는 디자인부터 고속도로에서 차고 나가는 주행 퍼포먼스, 18.5㎞/ℓ까지 치솟는 연비까지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첫인상은 평범하지 않다. 전장 4915㎜, 전폭 1890㎜, 전고 1635㎜. 수치만 보면 E-세그먼트 SUV의 체급이지만 두툼한 어깨 대신 수려한 쿠페의 실루엣을 갖추고 있다. 덕분에 꽤 든든한 덩치가 부담스럽지 않다. 전면부에는 일루미네이티드 시그니처 로장주 로고가 입체적인 발광 구조물로 재해석돼 그릴 중앙에 자리하고, 그 주변을 감싸는 LED 라이팅이 차체 색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르노 테크노센터(프랑스)와 르노 디자인 센터 서울이 협업해 완성한 이 디자인은 오로라 프로젝트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그랑 콜레오스’가 서막이었다면 필랑트는 2막의 주인공이다. 연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두 차종 모두 부산 공장에서 생산된다.) 쿠페형 크로스오버란 수식어는 후면 디자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코너에 배치된 LED 테일램프가 테일게이트를 가로질러 수평으로 연결되고, 리어 윈도 상단의 루프 스포일러가 공기저항 감소와 시각적 긴장감을동시에 수행한다.
실내는 좀 더 흥미롭다. 대시보드를 가로질러 펼쳐진 세 개의 12.3인치 디스플레이(openR 파노라마 스크린)는 꽤 유용하다. 운전자 입장에선 25.6인치 증강현실(AR) 헤드업 디스플레이까지 더해져 시선을 고정한 채 내비게이션, 속도, 안전 경고를 모두 소화할 수 있고, 조수석에선 다양한 영상을 즐길 수 있다. 언뜻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던 헤드레스트 일체형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 시트는 오히려 강점으로 다가왔다. 이 시트, 고속 운전에선 몸을 꽉 잡아준다. 게다가 열선, 통풍, 메모리 기능은 기본, 8방향 전동 조절도 지원한다. 2열에 앉으면 1.1㎡의 대형 고정식 파노라믹 글라스 루프가 이채롭다. 컨버터블 부럽지 않은 개방감이다. 고성능 태양열 필터링 기술이 더해졌다는데, 한여름에는….
하이브리드 E-Tech 시스템으로 완성된 파워트레인은 최고출력 150ps(110kW), 최대토크 250Nm를 발휘하는 1.5ℓ 터보 직분사 가솔린 엔진에 3단 멀티모드 오토 변속기에 통합된 2개의 전기모터가 결합해 최대 250ps의 복합출력을 구현했다. 숫자보다 중요한 건 이 수치가 구현되는 방식인데, E-Tech 하이브리드는 외부 충전 없이 도심 주행의 최대 75%를 전기 모드로 소화할 수 있게 설계됐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도심 저속 구간에선 전기모터가 주도권을 잡고, 중간 가속 영역에선 엔진과 모터의 협업이, 고속도로에선 엔진이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게 지속적으로 개입한다. 실제로 시승차에 올라 확인한 주행가능거리는 950여㎞. 서울 도심에서 두어 시간 남짓 주행한 후 확인한 주행가능거리는 915㎞였다. 공인 복합연비는 15.1㎞/ℓ, 고속도로에선 18~19㎞/ℓ를 오갔다. 안전 사양도 이례적일 만큼 꽤 촘촘하다. 34개의 첨단 안전 기능이 전 트림에 기본 탑재된다. 5개 레이더와 전면 카메라 기반의 SAE 레벨 2 자율주행 보조 시스템도 기본 사양이다. 가격은 4500만~5400만원이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