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엔 제발 평안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바란다. 누구에게나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를 빈다.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아도 우리들의 생존은 이미 불안한 토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을 기약 없이 멈춘 나라의 국민이다. 대한민국은 언제 휴전상태가 전쟁 상태로 바뀔지 모르는 나라다. 전쟁이 무언가. 삶과 죽음,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는 모든 것들과의 날벼락 같은 이별이나 해체를 의미하는 단어다. 그러니 우리들은 불안의 토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은 아이를 미국에 가서 낳을까. 더군다나 누군가 목청을 돋워 평화통일을 말하면 ‘좌빨’인가, 조롱과 경계심을 가지고 의심하며 적을 물리쳐야 한다면 혹시 극우 ‘가스통’인가 의심하게 된다. 이렇듯 바탕으로부터 상대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멸시하고 경멸하게 되는 환멸의 국민정서를 생산하는 조건을 갖춘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 며칠 전 30대 중반의 여성과 김신조 루트를 걷다가 북한이나 간첩 빨갱이 등의 의미를 물었더니 자기들은 전쟁경험 세대들과 같지는 않다고 했다. 요즘 학생들은 태반이 8·15와 6·25, 그리고 4·19와 5·18 같은 숫자의 역사적 의미를 헷갈리거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고 없어지거나 달라지는 건 아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적대적인 마음이 일상화되어서 사람을 믿을 수 없다. 누가 주는 음식을 함부로 받아먹지 못한다. 대개 ‘천사’ 같은 아름다운 단어를 간판에 달고 어려운 어린이들과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훌륭한 분들의 ‘선행사업’ 중엔 파렴치의 교본 같은 행태를 보이는 이들이 있어서 진절머리를 내게 한다. 대학이 인격을 수양하는 곳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교수의 제자 성희롱이나 성폭행은 물론 학자들의 자존심인 연구 실적일 논문이 대리 집필, 표절이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손으로 꼽자면 한이 없을 이런 작태도 우리들의 정신적 안식을 파괴한다.
그 깊은 내막과 사정을 제대로 알 길은 없지만, 뉴스로 보게 되는 정치가들의 정치행위는 참 우습다. 정치가가 혁명가도 아니고 성인은 더더욱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어쩌면 그리도 뻔뻔할까. 자기 일자리 구하기 위해 사람 다니는 길목마다 서서 허리 굽히다가 일단 원하던 자리에 앉으면 아, 그 오만함이며 이기적인 작태란! 환멸의 교과서가 따로 없다. 환멸을 확인하기 위해 세금 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다 듣고 사는 게 보통국민이란 팔잔가보다, 이런 생각도 든다. 요즘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이 먹는 게 싫지 않다고 한다. 이런 마음이 일반화 되어가는 국민구성원을 둔 국가의 미래를 상상해 보라. 자기 존재의 생기(生氣)를 존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란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나를 누군가 ‘불안신경증’ 환자라고 비웃어주길 바란다. 그 비웃음이 이치에 닿아서 생각을 바꿀 수 있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
물건을 사러 상가에 가면 나 같은 노인의 감각에 확 끼쳐오는 어두운 기운이 있다. 흥분과 거짓말이 뒤엉켜서 자아내는 야릇한 분위기 말이다. 소비자본주의라는 말은 무식의 소치인지 모르겠다. 소비를 충동질하는 갖은 문장들과 마음을 잡아당기는 상품 매장의 진열방식과 교양수준에도 미달하는 친절한 표정이나 입놀림. 그 얄팍한 친절의 꺼풀을 들추면 곧장 매출과 이익이란 차갑고도 매정한 계산속이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재벌의 재무구조 속에 숫자로 남은 부채비율과 상관없이 재벌의 행태는 가히 봉건신분제를 사는 특권층 같다. 하지만, 아니 어찌 됐건 탕진 수준의 소비로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 중독된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게 또 있지 않을까? 부의 축적 속에 드리운 실핏줄 같은 서러움과 절망들인 비정규직들. 그들의 불확실한 임금 속에는 전세 대출 이자, 아이들 과외비, 이른 나이에 퇴직 당한 남편의 열패감 등을 감당해야 할 처자식의 허망과 좌절도 섞여 있을 것이다. 대학 학자금을 갚지 못한 청년의 하루살이 같은 청춘의 절망감까지.
주위를 돌아보면 결혼 적령기를 넘긴 남자도 많고 여자도 많다. 결혼 적령기라는 게 결혼하고 싶은 나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자식을 낳아서 기르기 가장 알맞은 나이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재 출산율이 자꾸 떨어진단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늘어난단다. 나에게도 출산의 적절한 시기를 놓치고 미혼인 딸이 둘이나 있다. 그래서 결혼과 출산과 육아 문제는 목전의 과제다.
결혼하는 이유야 가지가지겠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고 싶어서. 그래서 요즘 결혼하고도 자식을 가지지 않는 새로운 부부들이 는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아이들 낳으면 우선 육아 부담 때문에 육아를 책임질 ‘식민지’가 필요하다. 운이 좋으면 친정엄마 혹은 시어머니, 그 다음은 어린이집. 그런데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반인간적, 반인륜적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분노를 넘어 절망하게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어린이는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아이는 제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진리이던 농경사회는 지나갔다. 농경사회의 노동이 기본적으로 씨를 뿌려 하늘의 조화에 적응하며 가꾸고 길러 추수하는 정성과 기다림의 시간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농촌공동체, 마을 공동체의 아름다운 이웃 사랑이 어떠했던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윗집 아이가 울면 아랫집 아줌마가 자기 젖을 나누어 먹이고, 다른 이를 곁에 두고 음식을 혼자 먹지 않았다. 마치 ‘집 밥’ 같은 공동체의 정겨움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과, 형편에 따라 아이를 돌보는 사람으로부터 길러지는 아이들의 인성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아이가 혼자 등하교하는 것이 두려운 어머니들, 아이를 놀이터에 혼자 내보낼 수 없는 어머니들이 현실인데 어찌 아이를 낳고 싶을까. 아이를 낳아 기를 맘이 생기랴. 내 생각으론 어머니가 되는 것이 두려운 사회, 아버지가 되는 것에 자신이 없는 국민이 점점 늘어나는 국가에서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고민 때문에 밤잠이 잘 안 올 것 같다. 자기 노동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도 이와 다를 수 없으리라. 이 나라의 다양한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그 해결에 바빠서 밥맛을 잃고 야위어 가는 ‘고위층’들을 보았으면 좋겠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며 지향하는 바가 다른 5천만의 사람들에게 가장 그럴 듯한 희망의 지표를 보여주길,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양띠 해를 간절히 소망한다. 세상의 이치는 ‘극단은 반드시 기운다’는 것이다. 가장 힘이 센 것은 진실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가는 것도 진실일 것이다. 을미년 한 해, 부디 우리 모두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길, 할머니의 마음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