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 이후 우리 기업 및 외교가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다.
미국발 관세 파고를 넘기 위한 우리의 전략적 지역으로 거론되면서 부쩍 관심이 많아진 것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에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인 미국이 흔들리자 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동안 아세안이 각광을 받았지만 이제는 이보다 더 광의의 개념인 글로벌 사우스가 우리의 새로운 경제 영토 확대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 같은 관심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지난 3월 26일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트럼프발 관세 파도가 임박했을 당시 “글로벌 사우스 지역을 중심으로 수출 시장 다변화를 촉진하겠다”고 했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도 같은 날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올해부터는 기존 성장전략에 ‘지역’이라는 전략의 축을 더해 성장 잠재력이 높은 유망지역에서의 성장 가속화를 추진할 것”이라며 ‘글로벌 사우스’를 강조했다. 지난 2월 국회에서는 김건 국민의힘 의원 주최로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과 대한민국의 외교 전략’이라는 포럼을 열며 이 지역에 대한 공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민국 각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글로벌 사우스’란 아시아·중남미·중동·아프리카의 신흥개발도상국을 의미한다. 1969년 정치학자 오글레스비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0개국 정도가 글로벌 사우스가 포함되는데, 지리적으로 보면 과거 제3세계로 치부됐던 곳들이 대부분이다. 지구촌 부의 파이가 커지고 이들 지역의 경제적 역동성이 가미되면서 ‘글로벌 사우스’란 카테고리도 거듭난 셈이다.
오글레스비가 이 용어를 글로벌 경제 구조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면서 처음 사용했다는 점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위상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글로벌 사우스의 기원은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시발점으로 본다. 당시 29개국 대표들이 모여 상호 존중, 협력 증진 등을 내세우며 ‘반둥 10원칙’을 선언했다. 이후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비동맹운동을 출범시켰고, 1964년 77그룹(G77)을 통해 경제적 연대를 강화했다. 2015년에는 반둥회의 60주년을 기념하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이후 냉전이 끝난 후 세계화 바람을 타고 제3세계에 속하는 국가들 중에서 경제적 역동성을 나타내는 곳들이 본격 출현했다. 아시아에서는 ‘호랑이’로 불렸던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이 등장했고, 브라질·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이름을 섞어 만든 브릭스(BRICS)란 단어가 세계를 휩쓸기도 했다. 이 같은 과정들을 통해 글로벌 사우스란 개념이 글로벌 경제 영토에서 본격적으로 확장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들의 글로벌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커진 것은 최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사회를 뒤흔든 여러 위기상황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기 때 마다 돌파구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번번이 거론됐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사우스 지역이 소위 ‘뜬’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개된 ‘공급망 재편’과 관련해서다. 아프리카·중남미 등에 풍부한, 전기차 출현 등 산업 전환의 시대에 필수인 희소 자원들이 부각됐고 세계는 앞다퉈 이들 국가로 달려가 자원 확보 경쟁에 나섰다.
그리고 이번 미 관세 폭탄의 파장으로 미·중 갈등이 더 격화되는 등 가중되는 지정학적 불확실성은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제3세계로 불리던 시절부터 중립외교를 표방하며 국제 정세의 흐름에 반하지 않는 행보를 해왔지만, 지속되는 강대국간 지정학적 갈등에 또 다른 측면에서 이들의 몸값이 높아지며 활동 공간이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사우스도 이를 의식한 듯 전략적 행보를 하는 모양새도 나타낸다. 양지원 무역협회 연구원은 “지난 2023년 G20 의장국이었던 인도가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요 의제로 삼았고, 아프리카연합을 G20 정회원국으로 승인한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 이후 글로벌 사우스가 새삼 관심을 받는 이유는 트럼프 시대 대안적 글로벌 생산 기지로의 가능성이다. 베트남 등 기존 세계의 생산공장 역할을 해왔던 곳들이 대거 큰 폭의 관세 부과를 받아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다국적 기업들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미국에게 생산기지를 만들면 되지만 모든 글로벌 기업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상대적으로 관세 부과율이 낮은 국가나 지리적으로 미국과 가까운 곳들이 대안으로 거론되는데, 주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많다. 일례로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남미에 있는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로, 과테말라 등이 10%대의 상호관세를 부과받은 점은 새 생산기지를 찾는 이들에게 그나마 괜찮은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거리가 멀긴 하지만 일부 중동 국가들도 10%대의 상호관세를 부과 받았다.
이미 관련 흐름은 나타나고 있다.
베트남 하이퐁에 생산 거점을 마련한 우리 LG 전자의 사례다. 사실 이번 트럼프발 관세폭탄에 가장 치명타가 큰 곳이 아세안 지역이다. LG전자를 포함해 여러 다국적 기업들은 그동안 기업들의 생산 기지를 중국과 아세안에 동시에 두는 ‘차이나 플러스 원(China+1)’ 전략을 구사해왔는데, 관세폭탄으로 이 같은 전략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게 됐다. 아세안 지역의 고관세로 더 이상 별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대미 수출 전진 기지격으로 활용돼 왔던 베트남 등 아세안 각국이 미국와의 관세 협상에 나서고는 있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에 LG전자의 경우 베트남이 트럼프와의 관세 협상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북미 시장 공략과 관련해 베트남 하이퐁 공장 대신 현재 이미 진출해 있는 멕시코 공장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멕시코 역시 관세로 인한 충격이 있지만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판단해 이곳의 생산량을 늘려 북미 수출 관련 대응을 하겠다는 것이다.
LG전자는 브라질 남부 파젠다히우그란데 지역에도 내년 준공을 목표로 신규 생산 기지를 건설 중이다. 상당수 글로벌 기업도 이 같은 전략이 그나마 현실적 대안이라고 보고 관련 추이를 살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에서는 한 의류업체가 동남아에 있는 생산거점을 관세율이 낮은 곳으로의 이전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급망과 관세 이슈로 글로벌 사우스의 주목 정도가 최근 크게 높아진 측면이 있지만, 이들 지역은 지속적으로 국제 사회에서 ‘신 시장’으로 관심을 받아왔다.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선진국 중심의 글로벌 노스에 비해 이들 지역은 젊은 경제 인구가 많아 역동성도 커고 성장 잠재력도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지역이 ‘젊다’는 점은 상당한 장점이다. 현 선진국의 고질적 문제인 노동력 부족 문제에서도 자유롭고, AI·디지털 경제 등 최신 산업 트렌드에 빠르게 반응해 관련 시장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로벌 사우스가 각 지역별로 형성된 경제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자유 무역에 바탕을 둔 성장 기조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도 트럼프 시대의 대안으로서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인구 구조 측면에서는 아프리카가 가장 경쟁력에서 앞선다. 아프리카는 2018년 54개국이 참여하는 아프리카대륙자유무역지대를 출범시켰는데, 총 인구수가 14억 명이 넘는다. 서명국 기준으로 1995년 세계무역기구가 출범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자유무역지대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총생산은 3조 4000억달러(약 4930조원)나 된다. 아프리카의 인구 수는 계속 늘고 있다. 2021년 기준 아프리카의 합계출산율은 4.31명으로, 세계 평균이 2.3명인 것을 감안하면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유엔은 2050년이면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아프리카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노동 인구도 글로벌 사우스 국가 가운데서도 젊다. 유엔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평균 노동인구의 중위 연령은 19살이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 이전 중국의 대안으로 각광을 받았던 베트남과 비교해서도 아프리카는 더 젊은 것이다. 특히 15~24세의 청년층의 비중은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인도의 인구 경쟁력도 아프리카 못지 않다. 14억 명이 사는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인 인도의 노동인구 중위연령은 평균 28세다. 퓨리서치센터는 25세 미만의 젊은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한다고 분석한다.
아세안 역시 글로벌 사회에서 젊은 국가지만 최근 다소 주춤한 모양새다. 젊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지만,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인구 감소세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성장세가 두드러졌던 베트남의 노동연령의 중위값은 32.5세이며, 15~24세 청년층 비율은 감소 추세에 있다. 태국도 최근 고령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이 포함돼 있는 아세안의 성장잠재력은 다른 글로벌 사우스 지역 못지않다. 여전히 경제 발전 속도가 유지되면서 소비 시장으로서의 매력도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지난 2015년 아세안경제공동체를 출범시키며, 6억 8500만 명이나 되는 단일 거대 시장을 만들어 냈다. 역내 교역활성화는 물론 자체 생산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인구 구조 면에서는 라틴아메리카(중남미) 지역이 다소 열세다. 라틴 아메리카의 총 인구수는 약 6억 6000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약 8.1%에 해당하는 수치지만, 평균 노동 인구의 중위 연령은 30대를 넘긴다. 메르코수르로 대표되는 경제공동체도 다른 지역들보다 먼저 출범시켰지만, 진척 정도가 꽤 느리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미국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가 돋보인다.
공급망 이슈에서 비롯된 글로벌 사우스의 장점은 여전하다. 이들 지역의 풍부한 자원은 여전히 경쟁력을 자랑한다. 아프리카의 장점은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특히 배터리 핵심 원료인 코발트는 세계 매장량의 52%가 아프리카에 있다. 망간은 세계 자원량 중 70%가 아프리카에 매장돼 있다. 이 외에 백금, 크롬, 흑연, 리튬, 니켈 등 첨단 산업에 필수적인 주요 광물 자원이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다.
중남미에서는 멕시코가 단연 돋보인다. 대표적인 중남미 자원 부국으로 아연과 몰리브덴, 흑연 생산은 각각 세계 10위권에 속한다. 은, 비소, 카드뮴, 안티모니 등은 세계 5위권 수준이다. 전기차 시대 필수인 리튬도 세계 10위권에 해당하는 매장량을 보이고 있다.
칠레는 구리 매장량이 세계 1위다. 1억 5000만톤 정도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요오드, 리튬, 몰리브덴도 풍부하다. 볼리비아는 리튬 매장량이 세계 1위다. 아마존을 끼고 있는 브라질도 중남미 자원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보크사이트가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많다.
아세안에서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이 자원 부국이다. 인도네시아는 니켈 세계 생산 1위이며, 베트남은 세계 2위의 희토류 매장량을 나타내고 있다.
중동은 주지하다시피 세계 경제의 엔진인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다만 트럼프 관세 정책에 직격탄을 맞고 있다. 세계 교역 감소에 따른 경기 둔화 우려로 원유 가격이 계속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8일 코로나 팬데믹 시기인 2021년 이후 4년 만에 배럴당 6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중동은 원유에 기대지 않는 경제 구조의 전환을 오래전부터 꾀하고 있다. 디지털 경제 등 차세대 산업 구조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고,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사실 우리의 경우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 상황이 아니더라도 글로벌 사우스는 반드시 챙겨야 할 대상이다. 지난해 대한민국 수출 상위 20위권 내 국가 중 절반 이상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인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접근법인데, 큰 틀의 접근보다는 지역별 혹은 국가별로 세밀하게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점은 유의해야 될 대목이다. 글로벌 사우스는 단일 경제 공동체가 아니어서 언어, 정치, 문화, 경제 상황 등 국가마다 모든 것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서로 다른 정치 체제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겨냥할 때 반드시 고려돼야 할 사항이다. 아세안만 보더라도 태국과 베트남의 정치체제는 확연이 다르다. 중남미 국가들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각하다.
그마나 다행인 것은 글로벌 사우스가 대륙별로 경제공동체로 묶여 있다는 점이다. 약소국이 대부분인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국제 경제 시스템에서 협상력과 지역의 이익을 높이기 위한 전략인데, 관세 폭탄의 시대에 새삼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결성 시기도 다르고 진척 정도도 다르지만 경제공동체 간 연결성이 높아지면서, 미국을 제외한 글로벌 차원에서의 이합집산 분위기가 엿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보호무역주의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진 경험이 국제 사회로 하여금 빠른 발걸음을 내딛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은 없지만 미국을 제외한 신경제 영토가 형성될지 주목된다.
[문수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6호 (2025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