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관세 압박이 국내 산업 전반을 흔들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을 시작으로 삼성, SK, LG 등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미국을 비롯한 해외 생산 확대 검토에 들어갔다. 관세 회피와 북미 중심 공급망 재편, 보조금 혜택 등을 노린 전략적 선택이지만 그 이면에는 국내 기반이 빠르게 약화되는 ‘산업 공동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북미 핵심 공급망 강화에 다시 한 번 베팅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3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서 “앞으로 4년간 미국에 210억달러(약 30조8500억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트럼프 행정부 2기 들어 국내 기업 가운데 대미 투자 계획을 공개한 첫 사례다.
투자는 크게 세 갈래다. 자동차 생산 분야에 86억달러, 부품·물류·철강에 61억달러, 에너지·미래 산업에 63억달러를 배분한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차는 지난 1986년 미국에 진출한 이후 50개 주에서 57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지원해왔다”며 “이번 투자로 미국 내 입지를 한층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북미 생산 체계도 대폭 확장한다. 조지아주 사바나 인근에 건설 중인 전기차 전용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는 기존 30만 대 생산 능력을 50만 대로 늘릴 예정이다. 미국에서 연간 120만 대 현지 생산체제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부품과 철강 공급도 현지화한다. 현대차는 루이지애나주에 연 270만 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새로 짓는다. 차량용 저탄소 강판 생산에 특화된 이 공장은 현대차의 미국 현지 공장에 직접 공급된다.
현대차그룹은 에너지 부문에선 미국산 LNG를 30억달러 상당 도입해 에너지 안보와 미국 산업 지원을 동시에 겨냥한다. 로보틱스, AI(인공지능) 등 미래 산업에서는 현지 기업과의 협업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에너지 인프라 투자도 병행해 모빌리티 전환과 ESG 경영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복안이다.
정 회장은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현대차의 최첨단 제조 시설을 직접 방문해 달라”고 초청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투자는 관세의 효과를 보여주는 증거”라며 “현대차가 미국에서 철강과 자동차를 만들기 때문에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투자로 미국 제조업 재건 등 현 정부의 정책 방향에 발맞추는 한편, 미래 산업 경쟁력 확보를 통해 ‘미국 내 톱티어 기업’으로의 도약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미에서 만들고, 북미에서 판다”는 현대차그룹의 전략은 완성차에 그치지 않는다. 부품과 철강, 에너지까지 현지화를 확대하며 공급망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 SK, LG 등 주요 그룹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는 평가다.
현대차그룹의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이 전 산업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SK그룹은 반도체·배터리·에너지 전 부문에서 현지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AI 반도체용 후공정 거점을 신설한 데 이어, 패키징 투자 범위를 넓히는 방안을 들여다볼 것으로 보인다. SK온은 북미 배터리 생산기지 확장을 추진하며 전기차 핵심 부품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이노베이션도 미국 알래스카 지역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를 투입해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삼성전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 관세·보조금 정책이 구체화되기 전까지 신중한 대응을 이어가면서도 미국 추가 투자 카드를 검토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직까지 삼성전자는 미국 내 추가 투자 계획은 공개하지 않았다.
LG그룹은 LG에너지솔루션을 축으로 북미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 선점에 나섰다. 회사는 GM·현대차·혼다 등과 손잡고 총 8곳에서 합작 생산기지를 운영하거나 건설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대미 투자 규모만 약 30조원에 달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향후 고객사 수요에 따라 추가 투자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미국 필리조선소에 대한 추가 투자 방침을 밝혔다. 대한항공은 최근 미국 보잉 항공기 구매와 GE에어로스페이스 엔진 도입에 총 327억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은 특정 업종을 넘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대미 수출을 넘어, 대미 생산 중심으로의 전환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국내 산업의 체질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전자부품 업계는 관세 이슈에 직접 노출돼 있다.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은 플립칩 볼그리드 어레이(FCBGA) 등 첨단 반도체 기판을 앞세워 미국 빅테크와 거래를 확대하고 있지만, 부품까지 관세 검토 대상에 포함되면서 불확실성이 다시 커지고 있다.
애초에 이들 기업은 동남아 지역에 생산기지를 나눠 리스크를 분산했지만, 수요처가 가격 인하를 요구하거나 공급망을 전환할 경우 매출과 수익성에 직접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기판처럼 대체재가 비교적 많은 품목은 타격이 더 클 수 있다.
타이어 업계도 고민이 큰 상태다. 한국타이어는 이미 수년 전부터 미국 테네시 공장의 연간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북미 수출이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관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한국타이어는 현재 북미 타이어 수요의 40%를 현지 생산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타이어는 현지 자급률을 더 높이는 방향을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금호타이어는 우선 관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 확대와 가격 조정 전략으로 대응할 방침이다. 정책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는 대규모 생산시설 투자보다 시장 상황에 맞춘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장기적으로는 현지화 비중을 늘리는 선택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넥센타이어는 북미 공장을 운영하고 있지 않아 판매분 전량을 수입하고 있어 고민이 더 깊어진 분위기다.
철강 산업은 규제 압박이 훨씬 직접적이다.
미국이 한국산 철강에 대해 25% 관세를 재부과하고,
EU가 무관세 수출 물량을 줄이기로 하면서 수출길이 좁아지고 있다. 특히 한국의 주요 품목인 열연강판은 무관세 쿼터가 최대 14%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철강 관세 인상 예고가 촉발한 도미노 효과로 인도와 EU까지 무역 장벽을 강화하자, 장기 불황에 시달리는 한국 철강 업계는 추가 악재를 마주하게 된 셈이다.
업계에선 “제철소나 조선소처럼 자본 집약적인 업종은 해외 현지화가 급속히 진행될 가능성이 높고 국내에 기반을 둔 하청 생태계는 따라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 정책이 한국 산업의 기반을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공급망 재편과 해외 생산 확대로 이어지는 ‘산업 공동화’ 우려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히 미국 내 공장 설립과 현지화에 나선 대기업들의 움직임은 한국 제조업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 등 현지 생산 확대를 위해 한화 31조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러한 결정이 국내 생산 기반 약화로 직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일본 닛케이는 현대차그룹의 미국 대규모 투자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관세에 대응해 미국에서 공급망을 만드는 것은 매출 최대 국가·지역인 미국 시장을 지키는 한편으로는 한국 내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대차는 최근 수요 둔화와 관세 부담으로 수출이 부진한 이유 등으로 울산 공장에서 아이오닉5와 코나 전기차 생산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조립할 전기차량 없이 비어 있는 컨베이어벨트만 돌아가는 ‘공피치’를 감수하면서 생산라인을 가동해왔으나 이번엔 휴업을 결정한 것이다.
내수 위축과 글로벌 규제 변화 속에서 본사 생산거점이 점차 축소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에 더해, 강성노조, 노동규제 등이 한국 산업의 공동화에 불을 지핀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산업계는 단순한 관세 부담을 넘어,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생산 거점을 현지로 이전하는 구조적 흐름이 본격화됐다고 진단한다. 한국의 낮은 노동 유연성, 강성 노조, 복잡한 규제 체계 등 고질적인 경영 환경 문제가 겹치며, 국내 공장이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생산을 끌어들이고, 한국은 기업을 밀어내는 형국”이라며 “이런 격차가 지속되면 기업들의 해외 이전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는 고용 유연성 확보와 규제 정비 등 제도 전반의 손질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산업계는 정부에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단기적 보조금 확대를 넘어 국내 제조업의 체질 개선과 첨단 기술 유출 방지, 노동 유연성 확보, 교육과 인력 재편 등 중장기적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첨단 기술을 보유한 중소·중견기업들이 해외 압박과 인력 유출 이중고에 직면한 만큼, 산업 생태계 전반에 대한 정책적 복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장기화되면, 한국은 제조업 기반을 잃고 ‘제2의 러스트 벨트’로 전락할 수 있다”며 “산업 공동화의 조짐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선택과 집중을 통해 뿌리부터 구조를 바꾸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