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프코어(gorpcore)’는 2017년 미국 격주간지 뉴욕매거진(New York Magazine)의 패션사이트 ‘더컷(thecut.com)’에서 처음 언급됐다.
고프코어는 ‘고프(gorp)’와 ‘놈코어(normcore)’의 합성어다. 어딘가 생소한 이 단어 또한 뉴욕매거진에서 만든 용어다. ‘고프’는 그래놀라(granola)·귀리(oat)·건포도(raisin)·땅콩(peanut)의 머리글자만 따서 만든 말이다. 등산이나 소풍하러 나가서 가볍게 먹는 견과류 믹스의 내용물을 일컫는데, 아웃도어 활동 자체를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놈코어’는 평범하다는 뜻의 노멀(normal)과 철저함을 의미하는 하드코어(hardcore)를 합성해 만들었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오히려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을말한다.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고프코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아웃도어 패션을 일상에서 활용해 특별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프코어는 미국에서 시작한 용어지만 한국은 가장 꽃을 피운 나라로 꼽힌다. 실제로 한국은 아웃도어 패션을 다방면으로 활용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유럽에서는 알프스산맥을 오를 때나 입을 법한 고기능 등산복을 평상복으로 입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오죽하면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브는 2018년 7월 서울 동묘시장을 방문해 구제시장 상인들의 패션을 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세계 최고의 거리, 스포티(sporty)함과 캐주얼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감한 믹스매치 정신”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겨울철 외투 하나를 사도 무게가 가볍고 주머니가 많아야 지갑을 여는 한국인의 실용성 선호를 참작하면 이미 고프코어라는 말이 탄생하기 전부터 우리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셈이다. 한국인은 가장 수더분한 패션이 가장 패셔너블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고프코어 패션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성장했다.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고프코어 열풍의 선봉장으로 등극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아웃도어 패션은 50~60대 이상이 주로 소비한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고프코어 패션이 등장하면서 10~20대로 연령층이 확대됐다. 실제로 아웃도어 업계는 최근 3~4년 사이 ‘제2의 중흥기’를 맞이했다.
‘아웃도어 맏형’ 노스페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노스페이스를 전개하는 영원아웃도어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40.3% 늘어 7640억원에 달했다. K2 역시 지난해 매출이 5.6% 성장해 4246억원, 블랙야크 또한 같은 기간 매출이 12%늘어 3769억원을 기록했다. 아웃도어 업계는 지난해 전체 매출이 6조원대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한다. 노스페이스 아웃도어 의류가 최전성기를 달렸던 2013~2014년 아웃도어 시장이 연간 7조원에 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완연한 회복세다.
특히 아웃도어 패션은 국내에서만큼은 경기가 어려워질수록 성장하는 경향을 띤다. 이른바 ‘체리슈머’ 현상인데,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여러 기능으로 활용하는 소비 행태를 말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고프코어 패션이 다시 부상하면서 MZ세대가 출근 복장으로 활용할 만큼 시장이 커졌다. 스타일과 실용성을 겸비하면서 아웃도어 패션은 ‘똘똘한 한 벌’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아웃도어 패션은 재킷이나 패딩과 같은 아우터에 국한돼 일상복으로 활용하는 편이었다”라면서 “최근 들어 하이킹화 또한 트레킹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활용하면서 30대 소비자의 구매가 늘어났다”라고 밝혔다.
고프코어 패션이 MZ세대에게 인기를 끌었던 또 하나의 동력으로는 SNS가 꼽힌다. 특히 사진을 기반으로 하는 인스타그램이 대표적인 소통 창구로 주목받으면서 패션은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고프코어 패션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자유로움’.
2017년 고프코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해도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게 연출하면서 남들과 다른 개성을 뽐냈다면, 최근 들어서는 무심한 듯하면서 실용적인 패션으로 통하고 있다. SNS에서 고프코어 패션으로 부상한 인플루언서로는 스노우피크어패럴의 전속모델인 류승범과 배우 류준열, 가수 송민호와 모델 주우재 등이 꼽힌다. 최근 대세로 떠오른 걸그룹 뉴진스 또한 고프코어 패션을 활용하면서 시선을 끌고 있다.
특히 고프코어 패션은 패션 플랫폼을 통해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패션 플랫폼은 바로 무신사다. ‘무신사 냄새’라는 표현까지 나올 만큼 MZ세대 패션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무신사에서 뜬 브랜드는 곧바로 유행되고 있는데, 특히 최근 들어 가장 인기를 얻은 스타일로 고프코어가 꼽힌다. 편안하면서 남다른 개성을 뽐내려는 MZ세대의 욕망은 무신사에서 아웃도어 브랜드를 단숨에 젊은 감각으로 되살리고 있다.
무신사를 통해 고프코어 열풍을 일으킨 대표적인 브랜드는 살로몬이다. 살로몬은 최근 급부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1947년 탄생해 76년 전통을 지닌 레거시 브랜드다. 유럽에서 스키, 스노보드 등 겨울 스포츠하면 살로몬을 떠올릴 만큼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살로몬은 국내 시장에서만큼은 기를 펴지 못했다. 2005년 레드페이스가 살로몬의 아웃도어 상품을 수입·판매한 뒤로 인지도를 점차 높였지만 결국 유행을 주도하지 못하면서 잊히고 있었다. 살로몬이 부상한 계기는 무신사와 함께 고프코어 열풍에 올라타면서부터다. 고프코어 패션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2019년 살로몬을 보유한 아머스포츠코리아는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고 무신사를 공식 파트너사로 선정했다. 무신사는 유튜브, 웹매거진 등으로 살로몬 관련 콘텐츠를 선보였고 고프코어 패션의 대표 브랜드로 주목받았다. 무신사가 살로몬과 관련해 지난 3년 동안 선보인 콘텐츠만 370여 건에 이른다. 이 결과 살로몬은 지난 1분기 무신사에서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80% 급증했다.
아식스 또한 무신사를 통해 단독발매 상품을 선보이면서 다양한 브랜딩과 콘텐츠 마케팅을 진행했다. 특히 아식스의 인기 상품인 ‘젤 카야노 14’와 ‘젤 1090’ 시리즈는 무신사에서 대표적인 고프코어 아이템이다. 무신사 관계자는 “복고적 분위기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한 러닝화에 미래지향적인 색상을 추가하면서 아식스가 고프코어 패션의 필수 아이템으로 주목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크테릭스는 고프코어 패션의 선두 주자로 꼽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19년 아크테릭스 패딩 점퍼를 입으면서 이름을 알렸고 최근 들어서는 힙합 가수 아미네, 모델 벨라 하디드, 영국 해리 왕자 등이 애용하면서 존재감을 부각하고 있다. 이 밖에 발렌시아가, 파타고니아 또한 SNS를 통해 이름을 알리며 고프코어 패션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떠올랐다.
패션업계에서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불황이 찾아오면 립스틱과 미니스커트, 하
이힐이 유행한다.’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침체한 분위기를 화려한 패션으로 달래려는 마음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찾아온 불황기에는 화려함보다는 편안함이 트렌드로 부각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패션의 본질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패션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하면서 시작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 전반에 긴장감을 최고조로 높였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올해 들어서야 겨우 긴장을 놓을 수 있었는데, 다시 품이 좁은 옷을 입는 것은 아무래도 몸과 마음에 부담이 된다. 2000년대 들어서 유행하던 스키니진이 최근 자취를 감추고 품이 넓은 바지가 되살아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고프코어 패션 또한 마찬가지다. 프레피룩처럼 정갈하지만 다소 불편한 패션은 여전히 수요가 있으나, 고프코어 패션처럼 품이 넓고 편안한 스타일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새롭게 부각됐다는 분석이다.
아웃도어 업체들이 젊은 모델을 잇달아 내세우는 것도 같은 이유다. 편안한 옷을 선호하는 흐름이 2020년 안팎부터 두드러지면서 아웃도어 업체들이 앞다퉈 MZ세대를 공략 대상으로 삼은 결과다. 실제로 노스페이스는 2019년부터 배우 신민아를 모델로 발탁해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고 이듬해인 2020년에는 모델 로운을 캐주얼 라인인 화이트라벨의 모델로 추가했다. K2 모델은 배우 수지인데 2017년부터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다. 블랙야크는 경쟁사들보다 더욱 과감한 선택을 했는데, 가수 겸 배우 아이유를 2021년 모델로 선정했으며 지난해는 배우 손석구를 추가했다. 배우 박보검과 걸그룹 아이브 멤버 장원영은 아이더 모델로, 장원영과 같은 그룹 소속인 안유진은 네파 모델로 활약하고 있다. 모두 젊은 층에 어필할 수 있는 모델을 선정한 것인데 그만큼 아웃도어 패션의 소비자층이 더는 중장년층에 머무르지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프코어 패션의 대표적인 아이템으로는 바람막이 재킷과 아노락이 꼽힌다. 바람막이 재킷은 주로 봄철에 가볍게 입는 재킷을 뜻하며 아노락은 후드가 달린 상의로 주로 등산과 스키를 할 때 입는다. 기능성 의류지만 어떤 장소든 편안하게 입을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과거와 달리 정장이나 셔츠 위에 이들을 입는데 복장 규율이 유연한 직장에서는 허용된다. 양말에 스포츠 샌들을 신거나 평상시 등산화를 신는 것 또한 고프코어 패션 열풍의 한 단면이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샌들에 양말을 신으면 아저씨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제는 양말 또한 개성을 드러내는 아이템으로 통한다”라고 밝혔다. 이 밖에 등산복 바지와 조끼 등 실용성 있는 의류를 적극 활용하면서 고프코어 패션의 영역은 확장되고 있다.
매일경제 컨슈머마켓부 김규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