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없는 곳으로 가야 덜 뜨거울 거야.”
“나무 그늘이요? 저쪽 무장애 탐방로가 숲이네. 그쪽으로 가요.”
초등학교 고학년쯤 돼 보이는 딸과 등산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아빠가 나무 그늘로 걸음을 옮긴다. 초여름 볕 무서운 건 동네 강아지도 안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볕이든 곳엔 사람 그림자도 없다. 뒤따라 그늘길로 들어서니 이번엔 온통 초록색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얼굴이 달라진다고 하더니만 여름엔 초록빛인가 보다.”
아빠의 감상에 딸이 한마디 보탠다.
“하늘 좀 올려다보세요. 단풍잎이 해를 물리치고 있어요.”
햇빛을 물리친다는 말에 슬쩍 고개를 올려다보니 볕을 받은 나뭇잎이 저마다 그윽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됐는지 딸이 묻는다.
“이렇게 더운 날 오래 걸으면 몸에 안 좋다고 하던데….” 기다렸다는 듯 아빠가 제대로(?) 된 답을 내놨다.
“여기선 땀 좀 흘려도 돼. 아까 선운산도립공원 간판 보일 때 여기저기 풍천장어집들 있던 거리 기억나지? 여기 특산물이 장어거든. 한 마리 먹으면 다시 힘이 뚝딱 생길걸.”
“치이, 아빠 또 술 마실라 그러는구나.”
선운산도립공원 초입엔 아빠의 말처럼 ‘선운산 풍천장어(風川長魚) 거리’가 있다. 말 그대로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 하구에서 잡히는 뱀장어를 풍천장어라 하는데, 주진천이 서해로 흐르는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게다가 고창의 특산물 중 하나는 복분자 아니던가. 선운산 생태숲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좌판 중앙에 수제 복분자주가 떠억하니 놓여있는 이유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알고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아, 서론이 길었다. 초여름, 선운산도립공원을 찾은 건 앞서 초등학생 딸이 발견한 숲길 때문이다. 이른 봄엔 동백꽃과 벚꽃, 가을엔 석산(꽃무릇)이 유명한 이곳은 여름엔 짙푸른 숲길이 객들을 반긴다. 그 색이 어찌나 깊고 푸른지 마음까지 시원하다. 물론 장어에 복분자도….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숲, 산책의 완성
선운산 생태숲에서 도솔암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완벽한 여름 산책 코스다. 경사가 완만해 어린 아이도 쉽게 걸을 수 있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는 선운산은 도솔산이라고도 한다. 선운은 구름 속에서 참선 한다는 뜻이고 도솔은 미륵불이 있는 도솔 천궁을 가리키는데, 두 명칭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란 의미다. 곳곳에 기암괴석이 버티고 선 이 산엔 천년 고찰 선운사가 불자들을 맞는다. 부처님께 기도하는 명당으로 알려졌는데, 대웅보전 뒤편의 동백꽃 군락지의 유명세도 이에 못지않다.
1967년 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은 여름엔 새파란 잎으로 초록의 기운을 내뿜는다. 간혹 빨간 꽃이 숨어 있기도 한데, 그걸 발견하는 것도 새로운 재미다. 이 일대를 천천히 걷는 건 그러니까 꽃이 흐드러지는 계절보다 초여름이 좋다.
사람에 치여 몰려다니는 것보다 여유롭고 조용하다. 생태숲에서 무장애 탐방로를 지나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은 그늘길이다. 천천히 걸으면 두서너 시간 쯤 걸리는데, 해가 긴 여름엔 오후 4~5시쯤 길을 나서도 어둑어둑해질 즈음 돌아올 수 있다.
2008년에 조성한 선운산 생태숲은 생태 연못과 습지, 그 사이로 난 데크가 깔끔하다. 한여름엔 습지 곳곳에 어리연꽃과 수련이 얼굴을 내민다. 선운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면 매표소가 나오는데, ‘세계유산도시 2023 고창방문의해’를 맞아 입장료가 무료다.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과 선운사의 선운교가 어우러진 풍경은 해외 어느 곳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이채롭다. 가지가 흐드러진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어느 곳에 서 있어도 훌륭한 쉼터가 된다. 주변에 핀 야생화를 발견하는 것도 산책의 즐거움 중 하나.
선운사를 거쳐 도솔암으로 오르는 넓은 길 주변에도 이름 모를 여름 야생화가 수줍게 숨어있다. 무엇보다 꼭 들러야 할 곳은 도솔천 주변에 조성된 녹차밭 구간이다. 데크 길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데 줄 서듯 가지런한 품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도솔암에 도착했다면 위쪽에 자리한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까지 올라가보자. 커다란 바위벽에 새긴 이 불상은 신체가 약 15.7m, 무릎 너비가 8.5m나 된다. 이곳도 기도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힐링코스: 선운산 생태숲→무장애 탐방로→도솔암 가는 숲길→도솔암→선운사→미당시문학관
·생태코스: 선운산 생태숲→무장애 탐방로→도솔암 가는 숲길→도솔암→고창 고인돌공원→운곡람사르습지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