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게 가장 좋아요. 운동화만 있으면 어디서나 걸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운동이 어디 있겠어요. 성인병도 예방하고 체지방률도 낮춰줘요. 게다가 그냥 걷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쉬워요. 이렇게 좋은 곳에서 걸으면 보약 먹는 것보다 100배는 나을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 저처럼 다리가 시원찮은 사람들은 걷기가 너무 부담스러워요. 지금도 진통제 먹고 나온 길이라니까요.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앞서가는 한 무리의 객들 사이에서 걷는 운동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걷기에 대해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는 분명 의사다. 그 옆에서 살짝 푸념 섞어 얘기하는 이는 분명 아픈 환자다. 그런데 갑자기 왁자지껄해졌다.
“삼촌, 숙모 좀 어떻게 해보세요.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사시는데 나아지고 있단 말이 안 나오잖아요.”
“얌마, 너도 모르는 몸 아픈 걸 내가 어째 알겠니. 네가 고쳐주겠다고 해야지. 지금 타박하는 건가? 짜샤. 제대로 걷는 방법이나 좀 일러줘 봐.”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예우하던 숙모가 한마디 거든다.
“관절이 안 좋을 땐 어째야 해요, 짜샤 선생님.”
온 가족 웃음소리가 행복하다. 이번엔 살짝 상기된 젊은 선생님이 말을 되받았다.
“빨리 걸으려고 하면 관절에 더 무리가 올 거예요. 엉덩이가 뒤로 빠지지 않게 가슴을 의식적으로 내밀고 몸을 항상 곧게 세우세요. 그럼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갈 텐데 배에 힘이 생기면 다리를 옮기는 게 편해져요. 숙모가 지금 신고 있는 캐주얼한 신발 말고 운동화로 바꾸시고.”
잠시 뒤… 삼촌 내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조카에게 되묻는다.
“그런데 선생님. 그럼 운동화는 언제 사러 갈까요.”
울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걷기 가장 좋은 계절에 이곳에 온 이유는 왕복 약 8㎞의 둘레길에 바다, 섬, 공원, 출렁다리, 등대까지 아기자기 오밀조밀한 풍광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걷기 좋은 오전에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나선 둘레길은 따뜻하고 시원했다. 이제 곧 여름이 온다는 듯 바닷바람 끝에 더운 기운이 묻어났다.
대왕암공원에서 슬도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해파랑길 8코스 중 한 대목이다. 이 둘레길을 따라 사계절 피는 꽃이 달라지는데 봄에는 샤스타데이지, 가을에는 황화코스모스, 겨울부터 봄에는 유채꽃이 만발한다. 대왕암공원에 차를 대고 나서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은 일산해수욕장이요, 오른편은 민섬이다.
그리고 그 중앙에 현대중공업의 커다란 골리앗이 눈에 들어온다. 수심이 낮고 경사가 거의 없는 일산해수욕장은 어린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좋다. 주변에 멋들어진 카페도 많아 잠시 앉아 쉬어가기에도 그만이다.
바다 한복판에 자리한 민섬은 용궁의 근위 대장과 사랑에 빠진 선녀 ‘민’이 옥황상제의 벌을 받아 바위섬이 됐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이랄까. 멀리서 봐도 실루엣이 아련하다.
무엇보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건 대왕암공원의 해송 숲이다. 매년 관광객이 늘고 있다는 대왕암은 바로 이 해송과 기암괴석으로 이미 유명한 곳인데, 수령이 100년은 족히 넘은 소나무 숲에서 맞은 바닷바람은 한 번 더 정화돼서인지 왠지 더 신선하고 맛있었다.
대왕암공원의 또 다른 볼거리는 2021년에 놓인 출렁다리다.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길이 300여m의 이 다리에선 현대중공업 조선소와 울산 동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무료로 개방돼 개장 5개월 만에 방문객 100만 명을 넘어서며 울산의 인기 명소가 됐다. 무려 1200여 명이 함께 건널 수 있다는데 출렁다리란 이름처럼 실제로 출렁인다. 스릴을 즐기는 이라면 더없이 좋은 액티비티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들어서기 전에 살짝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해안길로 들어서면 이번엔 깎아지른 절벽부터 이름 붙은 바위까지 가다 서다, 보고 촬영해야 할 절경이 펼쳐진다. 용굴, 수루방바위, 할미바위, 탕건바위, 남근바위…. 파도와 맞선 바위가 하이얀 기포를 내뿜으면 같은 풍경인데도 카메라 포커스가 제각각이다.
몽돌해변을 지나 슬도가 눈에 들어오면 휴대폰의 카메라 기능을 활성화해야 할 시간이다. 축구장 반절만한 크기의 슬도는 어느 곳에 포커스를 맞춰도 A컷이란 말이 나올 만큼 매력적인 장소가 많다. MZ세대의 성지로 확 뜬 이유다.
고래 그림이 새겨진 등대도 멋스럽고 현무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도 이채롭다. 무인 등대를 배경 삼아 일출과 일몰을 담기도 하고 구멍이 뻥 뚫린 바위 사이에 삼삼오오 모여 셔터를 누르기도 한다. 일명 동굴샷이다.
슬도는 원래 방어진 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이었다. 갯바람과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거문도 소리가 난다 해서 슬도(瑟島)라 불린다. 방어진항 끝자락에 자리한 성끝마을에서 방파제로 이어져 있는데, 각종 어종이 풍부해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등대 앞에 서면 동쪽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져 일출을 보기 좋다. 저녁에는 시내 방향으로 넘어가는 해가 잘 보인다. 한곳에서 일출과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울산 대왕암·슬도 바닷길 코스
대왕암공원 주차장→일산해수욕장 별빛광장→대왕암 나무계단→대왕암공원 출렁다리→거북바위 전망대→고이 전망대→용디이목 광장→대왕암→몽돌해변→슬도→슬도 등대→성끝벽화마을→대왕암공원 주차장
안재형 기자 사진 울산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