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분야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만족을 느끼는 포인트는 조금씩 다르지만, ‘맛있다’는 평가는 의외로 보편적이다.
누가 먹더라도 맛있게 느끼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음식들이 분명 있다. ‘맛집’이라고 불리는 곳들은 그래서 존재한다.
‘전 세계 미식가들의 성서’ 미쉐린(미슐랭) 가이드는 인류의 보편 타당한 ‘미식’을 116년 동안 찾아왔다.
신분을 숨긴 전문 평가원(인스펙터)이 여러 차례 식당을 방문해 엄격하게 평가하고,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 방식으로 식당의 등급을 결정한다.
최고 등급인 별 3개는 ‘요리가 매우 훌륭해 맛을 보기 위해 특별한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식당’, 2개는 ‘멀리 찾아갈 만한 식당’, 1개는 ‘요리가 훌륭한 식당’을 뜻한다.
짧은 우리의 삶 속에 한 번쯤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을 알려주는 맛의 지도, 셀 수 없는 음식점 사이에서 효율적으로 ‘맛집’을 고를 수 있는 지침서인 셈이다.
2016년 11월. 미쉐린 가이드가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 지난 11월 7일 미쉐린 가이드는 28번째 미쉐린 레드 가이드인 서울 편을 발표하고 총 24곳의 ‘스타 레스토랑’을 공개했다.
지난 3월 출간을 예고한 이래 약 8개월 동안 서울 전역의 식당을 평가하며 ‘최고의 미식’을 가린 결과다.
최고의 영광인 3스타 레스토랑이 2곳, 2스타는 3곳, 1스타는 19곳이다. 일반적으로 미쉐린 2·3스타라면 맛은 세계적 장인 수준으로 보장 받았고, 서비스·분위기 측면까지 모두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넘쳐나는 광고·홍보 속에 제대로 된 맛집을 찾기 어려워 진 요즘, 미쉐린 가이드는 국내 미식가들에게 길잡이가 돼줄 만하다. 올 연말 미쉐린 가이드가 인정한 ‘미식’을 찾아 특별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특급호텔의 품격 있는 한정식,
▷라연 ★★★
이번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은 ‘한식 편’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한국 본연의 맛이 대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식의 전통을 지켜온 서울 신라호텔 한식당 ‘라연’(셰프 김성일)과 청담동 한식당 ‘가온’(셰프 김병진)이 국내 첫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으로 이름을 올렸다. 미쉐린 3스타 식당은 전 세계를 통틀어 111곳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별 중의 별’이었다.
이 중 라연은 특급호텔 한식당 업계의 ‘막내’급이지만, 1979년 개장 이래 최고(最故) 역사를 자랑해온 ‘맏형’ 롯데호텔 ‘무궁화’를 제치고 국내 최고 한식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라연의 김성일 총괄셰프는 “미쉐린 선정을 계기로 한식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한식이 새로운 한류문화 수준을 넘어 한국을 찾게 하는 관광자원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라연(羅宴)이라는 이름은 ‘한 번의 식사로 예(禮)와 격(格)을 갖춘 한국의 기품 있는 식문화를 느낄 수 있는 한식을 차린다’는 의미와 ‘신라에서 갖는 격식 있는 향연’이라는 뜻을 합친 것이다.
국내 최고(最古)의 종가 음식 조리서인 광산 김씨 종가의 ‘수운잡방’을 토대로 만든 코스 요리가 일품이다. 예·라연·연·신라 코스 등이 있다.
수운잡방의 대표 요리인 ‘삼색어아탕’(삼색 녹두묵과 생선 완자가 어우러진 요리)을 비롯해 ‘서여탕’(안동지역 마와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아서 엿물을 부어 만든 보양식), ‘전계아’(영계를 손질해 참기름에 볶은 다음 갖은 양념과 함께 솥에서 졸여 약초와 산초가루로 향미를 더한 요리), ‘육면’(고기를 밀처럼 가늘게 썰어 육수에 끓여 먹는 요리) 등이 나온다.
그 밖에 전복비빔솥밥과 전복젓국갈비, 제철 식재료를 밀 전병에 싸 먹는 구절판, 최상급 한우 양지로 육수를 낸 신선로 등도 있다.
소금·장류 등 충실한 기본 식재료, 국내 최고 수준의 제철·제산지 식재료를 찾아 쓰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예 ‘명품 제철·제산지 태스크포스(TF)’ 팀이 꾸려져 전국적으로 연간 100여 곳의 특산지에서 최상급 재료를 공수해 온다. 한식의 맛과 멋을 더하는 식기와 소품도 매력 포인트다. 라연에서 쓰는 식기 모두 은기·유기·자기 등 전통 기물을 재현한 것이다. 특히 자기의 경우 국내 유명 작가들과 협업해 담백한 한국적 미와 여백의 미를 강조한 백자로 만들었다. 음식과 음료의 조화를 위해 소믈리에부터 전통주 명장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받아 한식에 잘 어울리는 전통주·와인·차를 구성했다.
▶광주요가 운영하는 한식당
▷가온 ★★★
도자기 기업 광주요가 운영하는 ‘가온’은 한식 코스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다.
왕의 하루 수라상에 담긴 흐름을 살려 코스를 꾸민 것이 특징이다. 계절과 에너지의 흐름에 맞춰 어떤 재료를 선택하고 어떻게 조리해야 먹는 사람에게 건강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한식의 정수 ‘식치(食治)’를 담아낸 한 상이다.
제철 식재료의 본연의 맛을 극대화한 ‘온날’ 코스와 ‘가온’ 코스 두 가지 메뉴가 준비돼 있다. 최고 식재료만 엄선해 죽, 냉채, 찜, 생선, 고기 등 다양한 한식 코스를 내놓는다. 온날 코스는 왕의 ‘온전한 하루’를 나타낸 것으로 밤죽, 게살냉채, 전복찜, 금태구이, 채끝등심구이, 버섯솥밥 등이 나온다. 가온 코스는 대하냉채, 송이전복선(찜), 꽃게찜, 해삼증(탕), 약차묵구이, 부채살구이, 꽃게장 골동반 등으로 구성된다. 메뉴는 계절에 맞는 식자재로 3개월마다 바꾼다.
특별한 재료에서 최고의 맛, 숨겨진 맛이 나온다는 정신 아래 소금과 장에 각별한 정성도 들이고 있다. 신안 앞바다에서 채취해 15년간 간수를 뺀 소금, 옹기 안에서 10년간 숙성한 된장, 단 한 방울로도 깊은 풍미를 끌어내는 10년 숙성 씨간장 등을 사용한다. 여기에 개개인이 원하는 쌀의 도수까지 확인해 밥을 지어주는 정성도 돋보인다.
찾는 이들마다 극찬을 아끼지 않는 ‘문화적 매력’은 가온의 자랑이다. 건축가 최욱이 그려낸 소박하고 고고한 공간은 한국 특유의 여백의 미가 강조됐다. 요리를 담아내는 아름다운 그릇은 광주요 그룹이 만든 최고의 식기들이다.
김병진 가온 총괄셰프는 “한식의 정수는 우리나라의 식재료만이 가진 고유의 맛을 살리고 그 안에 숨은 다양한 맛을 발견하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해 고요리서를 공부하면서도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레시피를 연구해왔다”며 한식에 대한 철학을 전했다.
▶최고의 프렌치 요리
▷피에르 가니에르 ★★
서울 편에서 선정된 스타 셰프 식당은 모두 24곳. 이 중 2스타를 받은 ‘곳간’(셰프 이종국)과 ‘권숙수’(셰프 권우중) 등 한식 계열 식당이 무려 13곳으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양식의 체면을 세운 곳이 있다. 2스타를 받은 롯데호텔의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다. 한식을 제외한 요리로는 최고 성적이자 유일하게 2스타를 달았다.
지난 2008년 10월 프랑스 파리 출신의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오너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가 개점했다. 세계적인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의 진두지휘로 2년 2개월의 준비기간, 70억원의 자본을 투입해 문을 연 고급 레스토랑이다.
프랑스 현지와 같은 맛·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프레데릭 에리에 총괄셰프 등 가니에르 셰프가 직접 선별한 팀이 서울에 상주한다. 프레데릭 에리에 총괄셰프는 “요리에 모든 것을 바친 20년을 한국 첫 미쉐린 가이드의 2스타라는 결과로 인정받게 돼 영광”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식재료를 바탕으로 만드는 모던한 프랑스 요리가 일품이다. 레드 와인에 쪄낸 오리다릿살, 도미구이, 한우 안심 구이, 바닷가재 요리, 트러플·감자·옥수수 크림을 더한 능성어 필렛 등이 대표적인 메뉴다. 특히 피에르 가니에르는 지난 14일부터 ‘미쉐린 2스타 선정 기념 단품 메뉴’도 선보이고 있다. 대표 메뉴인 ‘씨 가든(Sea Garden)’은 킹크랩, 전복, 키조개 등 제철 해산물의 깊은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다.
부드럽게 조리해 특유의 풍미를 살린 등심, 피에르 가니에르 고유의 레시피로 조리한 사태 등 양고기의 여러 부위에 파마산 크럼블, 잣 등을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램(Lamb)’도 눈길을 끈다. 한치, 매운 라구를 곁들인 옥돔구이, 피에르 가니에르 시그니처 디저트 등 다양한 음식들이 준비돼 있다.
▶3만원대의 ‘가성비’ 미식, ‘빕구르망’ 36곳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가성비(가격 대 성능비)’ 맛집, ‘빕 구르망(Bib Gourmand)’ 레스토랑도 찾아가 볼 만한 명소다.
1957년 처음 도입된 빕구르망은 미쉐린의 마스코트 ‘비벤덤’이 입맛을 다시는 픽토그램으로 표시한다. 서울의 가격 기준은 평균 3만5000원대 이하다. 스타 레스토랑 수준에는 다소 못 미치지만 가격 문턱이 낮다. 좀 더 현실적인 맛집으로 ‘보급형 미쉐린 가이드’라고 할 수 있다.
미쉐린코리아가 공개한 빕 구르망 레스토랑은 총 36곳. 식당 목록을 살펴보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한식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한국의 대표 계절음식인 냉면과 칼국수, 풍부한 육즙이 일품인 만두, 쫄깃한 족발에 뜨끈한 추어탕·생태탕 등 겨울에 어울리는 음식들이 대거 포진했다. 칼국수가 유명한 중구 ‘명동 교자’, 냉면으로 유명한 중구 ‘필동면옥’, 용산구 ‘구복만두’, 중구 ‘만족 오향족발’ 등 듣기만 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맛집들이다.
미쉐린 가이드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쉐린이 1900년부터 제작한 여행 가이드. 다양한 국적과 성별, 경력을 가진 평가원들이 암행을 통해 식당을 평가한 정보를 싣고 있다. 5가지 평가 기준은 요리재료의 수준, 요리법과 풍미의 완벽성, 요리의 창의적인 개성, 가격에 합당한 가치, 전체 메뉴의 일관성과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는 일관성 등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 스타 레스토랑의 수는 2700개. 1스타는 2173개, 2스타 레스토랑은 416개, 3스타 레스토랑 111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