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개발자로 13년 동안 살아온 김형석 씨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평생 컴퓨터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프로그래머로 살아가길 희망했던 그의 꿈이 좌절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발휘할 정도의 연차가 될 때쯤이면 자연스레 개발자가 아닌 관리자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한국 개발자의 현실을 몸소 깨닫게 된 그는 현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작년에 중소 소프트웨어(SW) 업체에 개발자로 입사한 김수현 씨는 잠자는 시간 외에는 자기 시간이 없는 업무환경에 혀를 내둘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자기계발조차 불가능한 현실을 몸소 체험하다보니 지쳐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6개월간의 정부교육만으로도 쉽게 입사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교육연수를 시작했던 그 때로 돌아가 다시 결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창조경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SW산업을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새정부가 들어선 지도 2년째에 접어들었다. 저가 수주 경쟁, 과도한 하도급 관행 등 SW업계에서 만연했던 고질병을 고치고 국가 기간산업으로 SW산업을 성장해나가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계획들도 본궤도에 올라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만난 SW업계 개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바뀐 게 거의 없다는 답을 쏟아냈다. 게임, 보안, 웹, 기업용 SW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무하고 있는 개발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핵심문제는 바뀌지 않는 SW업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정부에서 좋은 정책을 내놓는 것은 좋지만 결국 SW 종사자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을이 될 것이라는 게 개발자들 의견이다.
기업용 솔루션을 개발하는 중소 SW업체에 다니는 박민형 씨(가명)는 “정부 정책은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기업이 공공 프로젝트에 못 들어오는 대신 중소 개발사가 사업 수주를 따낼 수 있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하지만 아무리 정부에서 좋은 정책을 쏟아낸다 해도 SW업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구멍난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특히 “여전히 대기업은 SW개발자를 을(乙) 취급하며 필요한 기능을 추가비용 지불없이 만들어주길 바라는 등 업계를 바라보는 태도는 변한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SW업계와 맞닿아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문화가 정착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모바일 게임 개발회사에서 디자인개발을 하는 전형식 씨(가명)는 “SW업체의 핵심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발자들이 연구개발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한다”며 “촉박한 시간 속에서 양질의 솔루션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정부에서 좋은 정책을 쏟아내더라도 개발자들은 별다른 기대 없이 체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글로벌 SW기업과 국내 SW업체를 차별하는 고객사의 태도에도 어려움이 크다고 하소연했다. 글로벌 기업이 장악하다시피하는 국내 기업용 SW분야에서 국내업체로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국내 SW기업들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 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특히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SW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책적으로라도 국내 SW업체를 배려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고 관계자들은 지적했다.
기업용 데이터베이스(DB) SW업체에서 일하는 최지현 씨(가명)는 “국내 SW기업들이 자생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면 한다”며 “특히 글로벌 SW업체는 유지보수 비용도 상대적으로 2~3배 이상 높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은 크게 불평불만하지 못하는 것에 비해 국내 SW기업에는 유지보수 비용을 낮추기 위해 애쓰는 고객사도 많다”고 말했다.
또 “솔루션 SW기업을 중심으로 충분히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회사도 많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SW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바꿔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초급 개발자 양성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 SW개발 인력 현황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이번 정부 들어 SW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보안 전문가 등 신규 개발자를 양성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하지만 업계 종사자들은 신규 인력 양성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전문성을 갖춘 개발자의 처우를 개선하고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보안 솔루션 기업에 10년 넘게 개발자로 일한 권대혁 씨(가명)는 “10년 정도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레 관리자 과정 교육을 받으며 개발에서 손을 떼는 것이 당연시 된다”며 “신규 인력 양성에 투자하는 비용의 일부분만 전문 인력양성과 기존 전문가의 처우 개선을 위해 사용한다면 분명히 경쟁력 있는 개발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용자경험(UX) 전문 소프트기업에 일하는 김소형 씨(가명)는 “임원 지위를 수행하면서도 직접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SW기업들도 몇몇 있다”며 “외국에서는 백발의 노인이 개발자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영상을 본적이 있는데 그게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고급 개발자를 배출해 SW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교육과 투자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개발 일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없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 일대
이런 국내 SW업계 환경에서도 작은 변화를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가야한다고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실제 대학교와 SW업계를 중심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가천대학교 SW설계·경영학과가 대표적이다. 학교는 급변하는 SW개발환경에 발맞춰 실무중심의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을 교수로 모셔오는 등 실력있는 SW개발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학과를 졸업해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김윤경 씨는 “학교에서 프로그래밍 업무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기업을 직접 견학다니면서 미리 현장에서 해야 할 일들을 살펴보거나 관리직에 대비해 경제나 경영 수업을 듣는 등 실제 현장에서 부딪힐 수 있는 많은 이슈들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며 “아직까지는 개발자로서의 삶에 대한 걱정이 더 큰 게 사실이다. 보여주기식 정책이 아닌 현실적이고 현장 중심의 정책이 좀 더 나와 개발자들에게 힘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력이 뛰어난 전문개발자 양성에 힘쓰는 기업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네이버가 설립한 SW 인재 양성 학교인 ‘NHN 넥스트’도 그중 하나다. 사용자용 SW개발자들이 새로운 가치와 경험을 담아낼 수 있도록 SW뿐만 아니라 디자인, UX(사용자 경험), 인문사회학을 융합한 전방위적 개발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내외 최고수준 대학의 전공자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지원할 만큼 그 인기도 높다.
이 학교에 지원할 계획이라는 대학생 박민혁 씨는 “기존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회사에 가더라도 재교육을 받아야해 시간낭비가 될 뿐 아니라 최신 개발 트렌드에서 뒤처진다”며 “이왕 개발자로의 삶을 선택했다면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형태의 고급개발자 양성 프로그램이 많아져야 우리나라 SW업계도 미래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SW업계 역시 이러한 주변환경의 변화만 기대하기보단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고 자생력을 기르는 등 내부적으로도 한 단계 성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정보통신(IT) 솔루션 개발업체에서 근무하는 허성수 씨는 “정부와 관계기관이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며 “업계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선순환 구조를 이루는 SW개발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