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도 한철이라더니….”
수입 주류시장의 트렌드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천하를 호령하던 위스키 시장에 와인과 싱글몰트가 도전장을 내더니, 이제는 순백의 위스키로 불리는 ‘보드카’가 급격하게 판매량을 늘려가고 있었다. 수입 주류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은 단연 위스키다.
하지만 판매량이 예전 같지 않다. 2000년대 중반 불어닥친 와인 열풍 때문에 판매량이 주춤하더니, 최근에는 보드카의 판매량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위스키가 차지하고 있던 수입 주류의 지존 자리를 노리고 있다.
주류 전문가들은 위스키의 판매량 하락에 대해 “과거 수입 주류의 주요 타깃이었던 중장년층이 위스키 대신 캠핑과 아웃도어로 눈길을 돌리면서 위스키 판매량이 줄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보드카의 성장세에 대해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보드카와 다른 술(혹은 탄산수)을 섞어 마시는 믹싱 문화가 퍼지면서 클럽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보드카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류시장의 트렌드 변화에 수입 주류업체들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수입 주류 2강으로 불리는 페르노리카코리아와 디아지오코리아는 각각 자사 제품인 ‘앱솔루트’와 ‘스미노프’를 전면에 내세우며 2강 체제를 안착시켰고, 3위 자리를 놓고 월리엄그랜트앤선즈와 바카디코리아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보드카 마켓은 이미 춘추전국시대
순백의 위스키로 불리는 보드카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증류주다. 밀과 보리, 호밀을 증류해 만들며, 알코올 도수가 45~50도 이상이다. 원래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졌는데, 20세기 초 미국으로 전파되면서 세계에 알려졌다.
한국에도 일찌감치 보드카가 전파됐지만, 높은 도수 탓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보드카와 다른 음료를 섞는 믹싱 방법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최근에 급격하게 판매량이 늘고 있다.
한국주류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판매된 보드카는 18만9698상자(1상자 700mL 12병 기준)에 달했다. 전년(11만8674상자) 대비 59.8% 늘어난 규모다. 올해 역시 판매량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
협회 측에서는 이런 추세라면 올해 보드카 판매량은 전년 대비 33.9% 증가한 25만4120상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보드카의 판매량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수입 주류업체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수입 주류업계의 2강으로 불리는 페르노리카와 디아지오는 각각 ‘앱솔루트’와 ‘스미노프’로 보드카 시장의 85%를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중견 주류업체들이 최근 새로운 보드카를 출시하며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내 1위의 보드카는 페르노리카가 판매하고 있는 ‘앱솔루트’다. 스웨덴이 고향인 앱솔루트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과 깔끔한 디자인으로 인기가 높다. 특히 다양한 맛을 첨가해 만든 플레이버 시리즈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업계 2위인 디아지오의 ‘스미노프’는 숯 여과법을 사용해 깨끗하고 산뜻한 맛을 자랑한다. 스미노프는 러시아 황실에 공급하던 보드카로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1960년대에 다양한 칵테일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명성을 쌓았다.
이 밖에도 국내에는 그레이구스, 스톨리치나야, 러시안 스탠다드, 벨루가, 핀란디아, 단즈카 등 20여 종의 보드카가 판매 중이다. 이중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곳은 글렌피딕으로 잘 알려진 중견 수입 주류업체 월리엄그랜트다.
이 회사는 북극 용천수로 만든 수제 프리미엄 보드카 ‘레이카’를 판매 중이다. 한 병에 7만원이 넘는 ‘레이카’는 화산암 정제 과정으로 만들어진 게 특징이다. 골든블루 역시 프리미엄 보드카인 ‘스톨리치나야’를 들여왔다. 스톨리치나야는 다양한 맛으로 구성돼 있으며 종류만 17종에 이른다. 바카디코리아 역시 ‘그레이구스 나이트 비전 리미티드 에디션’을 선보였으며, ‘스노우레퍼드’는 지난 5월 첫선을 보였다.
저(低)알코올 혹은 프리미엄 전략
다양한 종류의 보드카가 비슷한 시기에 잇달아 출시되다보니 수입 주류업체들 역시 자사의 제품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수입 주류 2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페르노리카와 디아지오는 알코올 도수 5% 안팎의 저(低)알코올 RTD형 보드카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후발 중견 주류업체들은 프리미엄을 강조하는 고급화 전략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 페르노리카는 최근 사과맛과 상큼한 향의 ‘앱솔루트 애플’을 선보였다. 앱솔루트 애플은 낮은 도수와 사과를 이용한 맛과 향기로 젊은 층에서 벌써부터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디아지오 역시 ‘스미노프 그린애플’을 선보이며, 젊은 층 잡기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후발 중견 주류업체들은 고급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바카디코리아의 프리미엄 보드카 ‘그레이구스’와 윌리엄그랜트의 ‘레이카’가 대표적이다.
주류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후발 주류업체들이 고급화 전략을 꾀하는 것은 이미 보드카 시장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선두 업체와의 경쟁에서 앞서 나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굳이 대중적인 보드카를 들여와 선두 업체들과 막대한 마케팅 경쟁을 벌이는 것보다 단가가 높은 프리미엄 보드카로 높은 인지도와 마진을 얻은 것이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소비자층이 달라진 것도 후발 주류업체들에게 있어서는 긍정적인 요소다. 유학생들과 해외생활을 한 젊은 층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맛과 향을 가진 보드카를 찾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주류업체 관계자는 “젊은 고객들의 특징은 해외생활을 해본 이들이 많다는 점”이라며 “해외에서 맛본 다양한 종류의 보드카를 국내에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보드카 제품 출시가 러시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점유율 지켜라! 치열한 마케팅 경쟁
보드카 출시가 이처럼 늘어나면서 시장에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한 주류 유통업체 관계자는 “위스키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주류업체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드카 등 다양한 주류를 출시하는 등 마케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 업계에서는 국내 수입 주류업계의 터줏대감인 페르노리카와 디아지오의 구조조정이 화제가 됐다. 주류 사업의 특성상 현금 유동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금융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던 주류업체들이 구조조정에 나설 정도로 어려워진 것이다. 두 회사는 상당수 직원들을 내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새롭게 열린 보드카 시장을 놓고 선두 업체에서부터 후발 업체들까지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벌이고 있다.
페르노리카는 문화예술 활동을 접목한 ‘앱솔루트 파티’를 잇달아 열고 있으며, 디아지오는 클럽이 집중된 상권을 중심으로 ‘스미노프 디스트릭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중견 주류업체들 역시 다양한 시음 행사와 이벤트로 자사의 보드카 알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한 주류업계 임원은 이와 관련 “보드카를 비롯한 화이트 스피릿 주류는 이제 젊은 층은 물론이고 30대 중·후반의 직장인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술로 자리 잡았다”면서 “올해 보드카 시장은 선발 업체인 페르노리카와 디아지오가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이고 가운데, 중견 주류업체들의 브랜드 알리기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