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서 지난 9월 6일(현지시간)부터 엿새간 열린 세계 가전전시회 ‘IFA2013’이 11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유럽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48개국 1441개사(한국 48개사)가 참가했으며 약 22만~24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된다.
이번 행사는 예년 전시회와 다른 차원의 경쟁 양상을 보였다.
삼성전자는 개막에 앞서 열린 언팩 행사에서 갤럭시 기어와 갤럭시 노트3를 내놓고 전시에 들어가서는 세계 최초 55·65형 곡면 UHD(초고화질) TV 등 혁신 제품을 내놔 전시를 압도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이제 차원이 다른 경쟁이 시작됐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과거 IFA는 연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전미가전쇼(CES)에서 공개한 신제품을 유럽 시장에 소개하고 하반기 판매를 끌어올리기 위한 성격이 컸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세계 최초·최대 TV가 경쟁적으로 공개됐고 웨어러블PC(스마트워치), 사물인터넷(스마트홈) 등이 핵심 트렌드로 부상했다. 신제품은 1년 단위의 혁신 주기가 반년으로 줄어들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 시스템, 콘텐츠 전시 등도 봇물을 이뤘다.
권희원 LG전자 사장은 세계 최초, 최대인 77인치 곡면 UHD OLED TV를 내놓은 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내년에 새 혁신제품이 없었다면 내놓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신제품 주기가 그만큼 빨라졌다는 걸 시사했다.
웨어러블PC는 올 IFA를 계기로 모바일과 가전을 융합한 핵심 상품으로 떠올랐다. 액세서리에 불과하지만 고가 스마트 기기 시장이 포화상태에 도달했기에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스마트시계와 같은 웨어러블 PC 제품이 주목받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IFA 개막에 앞서 갤럭시기어를 내놓았고 퀄컴도 비슷한 시기에 퀄컴 토크를 발표해 맞불을 피웠다.
초고화질 곡면 TV 시대
하지만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은 여전히 TV였다. 그 중에서도 UHD(초고화질) 경쟁이 격화했다. 올해는 77~110인치급의 대화면, 곡면, UHD(4K),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라는 키워드가 IFA를 내내 ‘지배’했다. 삼성전자는 110·98인치 UHD TV, 55·65인치 곡면 UHD LED TV, 55인치 곡면 UHD OLED TV까지 총 6개 신모델을 선보여 시장 주도자임을 분명히 했다. 전시 직전까지 관심을 끌지 못하던 LG는 ‘77인치 곡면 UHD OLED TV’ 한 대로 전시장 분위기를 뒤집었다.
UHD(4K) TV, 캠코더, 스마트폰, 전용 미디어 플레이어를 앞세운 ‘소니의 부활’은 올해 IFA 전시회에서 빼놓을 수 없다. 렌즈 부착만으로 스마트폰을 미러리스 카메라로 만들어주는 제품을 내놓고, 개발자 소프트웨어(SDK)를 공개하는 등 과거 소니답지 않은 개방적 행보로 전자업계 왕년의 스타였던 소니가 돌아왔다는 평가가 전시기간 내내 이어졌다.
IFA에서 경쟁적으로 선보인 스마트 생활가전은 ‘사물인터넷’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스마트폰 하나로 집안 가전을 제어할 수 있도록 제품 안에 통신 시스템이 탑재된 것. 글로벌 전자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트렌드를 ‘ABC(not Alone But Connectivity)’로 풀어내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와이파이를, LG전자가 주방 가전에 대한 연결성이 보다 강화됐다면 소니는 카메라와 TV, PSP 등을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삼성전자는 전시장 내에 자녀방 침실, 거실, 주방을 실제처럼 각각 꾸며 실생활에 얼마나 유용한지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스마트TV 존’을 따로 만들었다. LG전자도 스마트홈을 구현하는 전시장을 별도로 만들어 관람객이 직접 시연해볼 수 있도록 했다.
스마트홈이 제시된 것은 이번 IFA가 처음은 아니다. 가깝게는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전미가전쇼(CES)에서 “모든 것은 연결된다”는 주제로 가정은 물론 자동차, 도시와 자동차까지 연결되는 개념을 선보이기도 했다.
약 9개월 만에 다시 선보인 스마트홈은 연결성의 핵인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제품 간 연결성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하지만 시스템 성격과 이를 구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사용되는 기반 기술이 달랐던 것.
더 가까워진 커넥티드 세상
삼성전자는 최근 스마트가전 분야에서 떠오르는 트렌드인 무선근거리통신(NFC)을 최소화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삼성은 와이파이를 적용해 비교적 넓은 범위의 통신 환경 속에서 생활가전을 컨트롤한다는 방침이다. 버튼 하나로 다수 제품을 동시에 제어하는 ‘원터치’ 구동은 물론 CES 때보다 강화된 ‘보안’도 눈여겨볼 만하다. 각 제품에 설치된 카메라로 집 안 상황을 실시간 관찰하는 홈뷰 기능은 집 내부 보안 문제나 집을 보는 어린이 등에 대한 소비자의 심리적인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LG전자 스마트홈은 NFC를 적극 활용했다. 이는 소니도 비슷했다. 소니는 NFC 중심으로 카메라, TV, PSP 등 자사 제품을 연결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LG전자의 경우 소비자들이 스마트폰으로 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하고 이를 NFC를 통해 냉장고와 광파오븐 등 각 가전에 구동시킨다는 개념을 내놨다.
구매 목록과 식품, 식재료 명칭, 유통기한을 입력해 보관장치와 조리기구를 함께 관리한다. 냉장고에 이 정보를 입력하면 스마트폰에 쇼핑 리스트가 업데이트된다. 유통기한이 지난 물품에 대해 재구매를 요청하기도 한다.
‘스마트 컨트롤 앱’은 TV와 무선으로 연동된 세탁기 냉장고 오븐 등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해 줬다. TV로 영화를 시청하던 중 세탁이 종료되었을 때 TV 화면 아래 ‘세탁이 끝났다’며 팝업창이 떴다.
삼성전자와 LG전자 스마트홈을 둘러보니 NFC를 기반으로 구성된 LG전자 부스에서는 제품 조작이 직관적이고 단순해 편리했다. 이에 반해 스마트홈에 적용된 가전 수는 삼성전자 쪽이 많아 스마트홈 개념을 좀 더 충실히 이행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와이파이가 불안한 환경이면 작동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연결 가전이 늘어남에 따라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한 ‘그린 프리미엄’은 기본적인 사양이 됐다는 평가다. 유럽은 최근 매년 10~15%씩 전기요금이 상승하다 보니 유럽 전자업체들은 고효율 가전을 내세웠다. 보쉬, 지멘스, 밀레 등은 전 제품에 에너지 효율 최고 등급인 A+++를 달았다. 삼성전자는 정수기 디스펜서가 내장된 A+++ 등급 냉장고를 선보였고 LG전자도 A+++보다 40% 에너지 절감을 할 수 있는 세탁기를 내놨다.
다만 유럽형 고효율 세탁기는 모터를 적게 돌려 에너지를 절감하는 대신, 세탁 시간이 6시간 30분에 달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에 조성진 LG전자 사장은 “에너지 절감과 세탁시간 단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기술 개발을 통해 미래에 경쟁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소니 OLED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
마케팅은 체험으로
전문가들은 이번 전시회 이후 단순한 기술 과시형 경쟁이 ‘경험 경쟁’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 윤부근 사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클럽드셰프’를 내세운 ‘프리미엄하우스’를 운영한 것은 치밀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보쉬와 지멘스 등 가전업체들도 단순히 출품 제품을 전시한 것이 아니라 자사 제품을 이용한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전시관 대부분에 할애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많은 제품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빽빽하게 전시장을 구성했지만 이번엔 주력 제품을 가지고 넓은 공간에서 충분히 제품을 써볼 수 있게 했다.
많은 물건을 전시하고 싶은 제조사의 욕심을 버리고 철저히 소비자 관점으로 전시관 콘셉트를 설정한 것. 삼성전자는 올해 전시회에서 최초로 ‘클럽드셰프’를 내세운 프리미엄하우스를 운영했다.
유명 요리사들이 삼성전자 가전으로 특급 요리를 만들고 참관객에게 이를 제공해 브랜드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펼쳤다. 모바일 제품과 관련해서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3와 갤럭시기어를 내놓으면서 세계 이목을 끌었고 LG전자의 G패드는 ‘신제품’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소니는 방수와 카메라 기능(2070만화소)이 강화된 스마트폰 엑스페리아Z1을 최초로 공개했다. 중국 모바일 업체들은 이번 행사에 부스를 많이 차리진 않았다. 쿼드코어 AP칩 탑재 등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삼성, LG와 같은 선두업체를 많이 따라왔지만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는 소프트웨어 쪽은 갈 길이 멀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