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고공행진이 수년 째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지금쯤이면 이제 고공행진이란 말도 그만해야 한다. 한국영화는 으레 잘 되는 것으로,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래서 한국영화 하면 ‘샤방샤방’ 늘 빛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관상’은 대접받을 만한 영화이지만…
지난 9월 11일에 개봉된 한재림 감독의 <관상>은 9월 15일 현재 개봉 4일 만에 259만9352명을 찍었다. 영화계에서는 관습상 개봉 첫 주말까지의 성적을 가지고 곱하기 2.5를 해서 최종 스코어를 내는 경우가 많다. <관상>의 첫 주 성적을 계산하기 편하게 260만명이라고 하면 종영 시점의 관객은 어림잡아 65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문제는 관객이 500만명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이 계산법이 소용없게 된다는 점이다. 500만명쯤을 전후해서는 영화는 급작스러운 바람을 탄다. 사회적 이슈를 몰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관객은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천만 관객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관상>은 사실 그럴 만한 영화다. 영화적 재미와 의미, 쌍두마차를 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열광한 후 영화 내용을 놓고 다른 사람들과 입담을 나눈다. 영화 속 주인공 혹은 어떤 등장인물을 현실에 대입하며 논쟁을 벌인다. 이처럼 허구와 실제,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영화일수록 이른바 ‘대박’을 친다.
<관상>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 곧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라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관상쟁이와 그 주변 인물들의 기구한 운명을 그려낸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죽고 조카인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인 좌의정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건국 초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왕권론(王權論)과 신권론(臣權論)의 대립이 최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같은 거대담론을 좇아가지 않으려는 척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삶의 행적으로 이야기를 우회시키며 한 시대의 큰 수레를 굴려 나간다. 작은 톱니바퀴가 큰 톱니바퀴를 돌려내는 격이다. 작은 우주의 얘기를 통해 큰 우주를 그려내는 식이다. 얼굴을 흘깃 쳐다만 봐도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다보는 신통한 능력의 주인공 내경(송강호)과 그가 휩쓸려야 했던 격랑의 역사를 통해 영화 <관상>은 결국 지금의 시대 자체를 내다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독창적인 주제의식과 그것을 풀어가는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가 사람들을 극장 앞으로 확 잡아당기고 있는 셈이다. <관상>은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곧 빅 히트를 칠 영화다.
좋아서 많아진 건지, 많아서 좋아진 건지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영화임에도 여기에는 늘 그림자가 따른다. 어둠의 세력이 항상 존재한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제 탓에 영화마다 그 샤방샤방한 빛에 얼룩이 진다. <관상>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너무나 뚜렷한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가 상영 중인 스크린 수는 무려 1190개다. 국내의 전체 스크린 수는 2200개다. 전국의 극장 50% 이상에서 오로지 이 <관상> 한 편만을 걸고 있다는 얘기다. 다른 영화는 아예 극장에 나오지 못하거나 나오더라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어려울 만큼 극히 적은 수의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흥행영화니까 많은 극장들이 해당 영화를 상영하는 건지, 아니면 많은 극장들이 특정 영화만을 상영하니까 사람들이 결국 좋아하게 돼 흥행하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
물론 <관상>은 전자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후자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꼭 일도양단 식으로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이 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관상>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비교적 건전하게 작동했을 것이다.
<관상>처럼 지난 8월 한달 동안 한국영화만으로 무려 2000만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설국열차>와 <숨바꼭질> <더 테러 라이브>도 그만한 가치부여를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설국열차>는 900만명을 훌쩍 넘겼다. 나머지 두 작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각각 550만명을 전후한 기록을 세웠다. 세 작품 역시 모두 스크린 독점 논란으로 크게 비판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 세 작품도 한창 상영될 당시에는 사실상 전국 스크린을 거의 다 차지하다시피 했다.
작품이 좋으니까 당연히 사람들이 몰린다는 점에 있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설국열차>의 경우 반(反)자본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이었다. 지구에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오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열차를 타고 세상을 순회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설국열차는 각각의 칸이 철저한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맨 앞은 황금 칸, 맨 뒤는 꼬리 칸이다. 영화는 꼬리 칸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앞으로 전진하며 열차를 점령하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명백한, 극히 원칙론적인 계급혁명의 이야기다. 어쩌면 매우 전형적이고 진부할 수 있는 이 이야기가 10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이끈 것은 그만큼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는 감독의 통찰력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이다. <숨바꼭질>도 <더 테러 라이브>도 마찬가지다.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중산층의 극단적 불안감, 그 정치·사회적 위기의식에 대해 관객들이 크게 공감하고 동조하지 않았던들 영화가 그처럼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독한 영화를 순하게 만드는 방법
하지만 체제 저항적 성격을 띤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건 일종의 패러독스다. 아이러니한 역설이다. 어쩌면 이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순수한 저항성을 극장 안에 가두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극장 안에서만 혁명을 꿈꾼다. 극장 안에서라면 가진 자들에게 핏빛 복수를 하지만 극장 밖으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체제순응적이고 순화된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장 불온한 내용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들은 자본주의의 독점적 시장구조를 통과하면서 ‘돈은 벌고 정신은 사라지는’, 매판의 영화로 전락하는 형국 속으로 자신들을 끌고 들어간다.
자본이 스크린 독점을 통해 노리는 궁극적인 지점은 바로 여기서 찾아진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의 본질은 영화문화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드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정신의 쇠퇴가 진행된다는 데에 있다.
반면에 영화가 갖고 있는 정치적 성향이 극장 밖으로까지 이어질 법한 영화는 가혹할 만큼 차단된다. 다시 말해 스크린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정지영 감독이 제작하고 백승우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멀티 플렉스 계열 상영관에서 철저하게 분리됐다.
따라서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제 문화적 혹은 산업적 관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정치·철학적 시선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 다양성은 결국 계층과 계급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산업의 안전판이 마련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구성원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산업은 일순간에 붕괴할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서너 편의 영화가 막대한 스크린 수의 위용을 자랑하며 대다수의 관객을 끌어 모으는 현 상황을 즐기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많은 편수의 영화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기존의 시스템을 바꿔 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