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섭 한국야금(KORLOY) 회장 | “개인이 행복해야 회사가 발전합니다. 그게 당연한 정답입니다”
안재형 기자
입력 : 2016.11.09 15:45:24
지난 7월, 제2회 중견기업의 날을 맞아 청와대에서 중견기업인을 격려하는 오찬이 진행됐다. 오찬장에선 수출과 일자리 창출에 앞장선 모범 중견기업인 3명에게 훈장이 수여됐다. 이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윤혜섭 한국야금 회장은 잠시 숨을 고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현듯 20여 년간 전업주부로 살던 22년 전, 시아버지와 남편이 일군 회사를 맡아 경영에 첫발을 내딛던 그때가 떠올랐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야금은 윤 회장의 시아버지 임성한 사장이 창립한 초경합금 절삭공구 전문기업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경합금 절삭공구는 항공, 자동차, 조선, 금형, IT, 철도, 방위 등의 분야에 꼭 필요한 산업이다. 제품의 국산화를 기치로 내건 한국야금은 1970년, 당시 이 분야의 강자였던 일본 스미토모전공과 합작투자 및 기술제휴에 나서면서 사업 기반을 다졌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사를 경영하게 된 윤 회장의 남편 임상진 회장은 한국야금을 독자적인 기술을 지닌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재탄생시켰다. 경영자인 동시에 연구원이었던 그는 1987년에 생산기술연구소를 설립하며 R&D에 나서기도 했다. 이즈음 해외시장에도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임 회장은 자신이 꿈꾸던 해외시장 개척에 첫발자국만 남긴 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갑작스런 간암 선고에 몸을 추스르려 애썼지만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1996년 회장직에 취임한 윤혜섭 회장은 어린 남매와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남편을 보내고 닷새 만에 출근한 회사는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앉아만 있을 순 없었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뜬 윤 회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동탑산업훈장을 바라봤다. 회사를 운영하며 1997년 국내 초경합금업계 최초로 국제 표준인증 ISO9001을 획득한 그는 이를 무기로 세계 시장을 공략해 중국, 미국, 유럽(독일 프랑크푸르트), 인도, 브라질에 해외판매법인을, 중국 칭다오에는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덕분에 1994년 당시 258억원의 매출을 올리던 한국야금은 지난해 172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7배나 성장했다. 매년 평균 5%씩 성장한 직원 수도 현재 573명으로 늘었다. 과연 그 성장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서울 금천구의 한국야금(KORLOY) 사옥에서 윤혜섭 회장을 만났다. 지은 지 10년이 지났다는 사옥이 올해 완공된 듯 새것 같았다. 인상적이었다. 윤 회장은 “현실에 충실하지 않고 미래만 보거나 과거에만 매달려 있는 건 찬성할 수 없다”며 “최선을 다해 오랜 시간 노력하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라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오래 하는 것보다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낫다
-많이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회장에 취임하고 업무를 시작한 지 22년쯤 됐어요. 지금은 업무를 줄이고 뒤로 물러서서 현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업무 외적인 일도 업무에 영향을 주더군요. 아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물러서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요.
남매를 뒀는데 둘 다 회사에서 업무를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그러죠. 내가 새로운 업무를 배워서 써봐야 기껏 5년 내지 10년일 텐데, 너희가 배우면 앞으로 30~40년은 도움이 될 거라고. 그리고 전 지금까지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하고 나서지 않았던 외부활동도 하면서 지금껏 보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부분을 짚어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느끼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임직원들과 공유하고 있어요. 주부로 살았던 20년과 회사를 경영한 20년의 노하우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앞에 놓인) 스케줄표에 써넣을 공간이 부족합니다.
새까맣지요.(웃음) 중요한 회의 외에는 잘 안 들어가는데도 바빠졌어요. 그동안 골프도 안했는데, 작년부터 즐기고 있습니다. 필드에서 나누게 되는 빠르고 정확한 정보가 많더군요.
-후계를 논하기엔 이른 시기인데요.
냉정히 생각해 보면 회장을 오래 하는 것 보다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외부활동에 나선 지 5~6년 정도 됐는데, 다른 분들이 이젠 필요 없다고 손 놓은 일들도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있어요. 직원들이 보면 회장이 왜 저렇게 여기저기 다니나 할 수도 있는데(웃음) 제 딴에는 앞으로 5년 내지 10년 후에 승계한 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직원들에게 메이드 인 코리아를 늘 강조한다고 들었습니다.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하고, 수출을 하면서 해외지사에 나가보니 국가가 굉장히 중요하더군요. 밖에 나가보면 한국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각 개인의 네임밸류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그래서 늘 말해요. 대한민국, 메이드 인 코리아를 홍보하자고. 일례로 휴가 때도 굳이 밖에 나가지 말고 국내에서 쓰자고 말하곤 합니다.(웃음) 저희 제품을 전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하는데 제가 60여 개국은 가본 것 같아요. 업무 때문에 관광은 제대로 못했지만 어느 곳을 가도 우리나라 같은 곳이 없어요. 결혼하고 20년간 아이 아빠와 주말마다 전국 곳곳을 여행했는데, 도로 잘 닦여 있지 먹을거리 많지. 굳이 외국에 나갈 이유가 있나요. 지역경제가 살아야 나라가 살아나잖아요. 제가 지금 예순 넷인데, 이런 경험들을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굳이 어려운 시기에 해외여행에 나서지 않아도 어느 날 더 편한 순간이 오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이라고. 그게 세상이고 인생이더라고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늘 열려있습니다.
▶미래만 보거나 과거에만 매달려 있는 건 찬성할 수 없다
-지금까지 주부로 생활했다면 더 행복했을까요.
신랑이 살아있다면 더 행복할 수도 있었겠지요. 먼저 가서 날 이렇게 힘들게 했지만, 다른 직업을 준 덕에 ‘아, 이런 인생도 괜찮구나’ 느끼게 해줬으니 원망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전 그랬는데, 아이들이 굉장히 힘들어 했어요. 아, 지금도 힘들지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해보기 위해서 눈코 뜰 새가 없을 거예요. 게으름 피우면 제가 막 뭐라고 합니다.(웃음) 그들도 제 나이가 되면 ‘그때 바빴던 게 다행이었구나’ 느끼겠지요.
-자녀분들에게 꼭 강조하는 덕목이 있을 법한데요.
경영진에게 말씀드리는 것과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좀 다른데요.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업무를 진행하면서 미래를 전망하는 눈, 전체를 아우르는 힘,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을 강조해요. 그런데 그건 그릇이 있는 것 같아요. 혼자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지 않습니까. 찬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1994년 258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1720억원으로 껑충 성장했습니다. 7배나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꼽으신다면.
글로벌 시장 개척이 주효했습니다. 선견지명이라기보단 IMF 금융위기에 살아남기 위해선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아마도 글로벌 시장에 대한 기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텐데, 임상진 회장이 이미 그 작업을 진행했었고, 덕분에 별다른 실기 없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도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일찍부터 국산화를 진행해서 제품의 품질을 높였기 때문에 당시 여타 기업의 수출비중이 10%에 불과했지만 저희는 50%나 됐습니다. 당시 떨어진 환율 덕도 많이 봤어요. 제품도 먼저 송금해야 보냈습니다.
-중국 시장 선점이 주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금융위기에 국내에선 팔고 싶어도 팔 시장이 없었는데, 마침 중국 시장에서 반응이 왔습니다. 당시엔 아무도 못 나가던 시장이었어요. 위험하기도 했지만 물건 값을 못 받을 것 같았거든요. 일반적으로 북경이나 상하이 외엔 아는 곳도 없던 시절인데 저희는 주요 도시를 모두 파고들었습니다. 10년 동안 딜러체제를 유지하면서 철저히 준비한 후 지사체제로 전환했는데, 맨땅에 헤딩한 격이었지만 덕분에 선점효과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위기가 곧 기회고 기회가 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진실이더군요.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품
-창립 5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경영성과도 그렇지만 직원들과의 유대, 사내 MBA 등 복리후생과 시설도 탁월한데요.
제가 집에만 있다가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나오게 됐잖아요. 1~2년 지내다 보니 일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 불편하더군요. 주부들은 집에서 왔다 갔다 할 공간이라도 있는데, 회사에선 책상 앞에만 앉아서 일하고 있으니, 꼭 이렇게 할 수밖에 없나 생각하게 된 거죠. 외국 출장에 나서면 작은 딜러사를 찾게 되는데, 어딜 가도 작은 바가 있는 직원공간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늘 먹을거리가 준비돼 있고 심지어 맥주도 한잔씩 즐기더군요. 직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직원식당을 카페테리아로 만들었어요. 편히 회의도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무 공간도 움직이면서 일할 수 있게 바꾸고 있습니다. 어차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어야 하는데 집처럼 편하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개인이 살아야 회사가 살아납니다. 주어진 업무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6시 땡하면 퇴근해야죠. 그게 당연한 겁니다.
-저성장 국면에 최근 리더의 중요성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습니다. 리더의 덕목을 꼽으신다면.
리더에게 필요한 건 전문적인 지식과 경력입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함께 전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차별성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의지도 필요합니다. 미래를 보는 눈도 있어야 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걸 아우를 수 있는 덕목은 성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