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연한 30년을 넘긴 서울 노후 아파트 단지들이 정비사업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은 지금이 재건축 심의 문턱을 넘기엔 좋은 시기란 인식 때문이다. 웬만한 호재에도 집값이 들썩이기 어려운 상황이라 서울시가 부담 없이 심의를 통과시켜줄 수 있지 않느냐는 기대다. 실제 서울시의 각종 심의 문턱을 넘거나 구청으로부터 안전진단 통과 판정을 받는 단지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먼저 서울시는 최근 건축위원회에서 서초구 신동아아파트 재건축 사업 변경안을 통과시켰다. 서초 신동아아파트는 재건축을 통해 지하 4층부터 지상 35층으로 이뤄진 16개 동으로 재탄생한다. 총 공급 규모는 1157가구다. 주거 유형은 전용면적 59·74·84·97 ·114·118·135·170㎡ 8가지로 구성됐다. 저층형 특화세대와 펜트하우스 등 다양한 수요를 고려해 설계한 게 주목된다. 서초 신동아아파트는 지하철 2호선과 신분당선이 지나는 강남역과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지나는 교대역을 도보권에 두고 있다.
서울시는 재건축 사업이 보다 쉽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서초동 서초아파트지구를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바꾼다고 작년 말에 발표하기도 했다. 아파트지구는 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아파트를 집중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하지만 대규모 아파트를 짓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가령 아파트지구에선 주택용지 필지에 상가를 짓거나 보행길을 만드는 게 어렵다.
반면 2017년 도입된 도시관리 방안인 지구단위계획은 필지를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쓸 수 있다. 지구단위계획으로 전환하면 재건축이 쉬워진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현재 서초아파트지구에는 2030년 재건축 연한이 도래하는 삼풍아파트와 우성5차아파트가 있다. 시는 이들 2개 단지를 대상으로 주변 도시와의 연계성 등을 고려한 재건축 지침을 마련할 방침이다.
또한 서울시 건축위원회는 송파구 한양3차아파트 재건축 사업 건축계획안을 최근 통과시켰다. 한양3차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지하철 3·5호선이 통과하는 오금역과 5호선 방이역 인근 방이동 225번지 일대에 건립된다. 해당 부지의 연면적은 9만9943㎡다. 앞으로 이곳에는 지하 3층부터 지상 33층으로 이뤄진 7개 동이 들어선다. 총 공급 규모는 508가구다. 이 가운데 분양주택이 431가구, 공공주택이 77가구다. 내년 3월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고 2025년 착공하는 것이 목표다.
주거 유형은 전용면적 59~156㎡ 7가지 평형으로 도입된다. 서울시는 3~4인 가구도 살 수 있는 전용면적 59㎡ 임대주택을 54가구, 장기전세주택으로 공급할 전용 74~84㎡ 23가구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세대 배치 과정에서 임대와 분양주택 동시추첨을 진행해 소셜믹스를 구현하겠다는 것이 서울시 입장이다. 지반층에는 공공보행통로를 설치해 열린 공간을 조성한다.
같은 송파구에 있는 잠실우성4차아파트 재건축 사업도 이번에 심의를 통과했다. 1983년 준공된 이곳은 앞으로 최고 높이 32층의 825가구 규모로 변신한다. 현재 555가구보다 가구 수가 270가구 늘었다. 공공주택은 93가구, 분양주택은 732가구로 구성됐다. 전용면적은 59~160㎡로 다양하게 나왔다.
인근에 위치한 가락프라자 아파트 역시 서울시 심의 문턱을 넘었다. 가락프라자는 공공주택 109가구, 분양주택 964가구를 합한 1073가구로 재건축된다. 다양한 주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유형을 7가지(전용면적 59~156㎡)로 도입한다. 공공주택 109가구는 소셜믹스를 적용해 전용면적 59·74·84㎡로 공급한다.
강남구 개포주공5단지도 작년 12월 서울시 건축심의를 통과했다. 1983년 준공된 개포주공5단지는 재건축을 통해 지하 4층~지상 35층, 1277가구로 탈바꿈한다. 전체 가구 가운데 공공주택은 144가구, 분양주택은 1133가구다. 공공주택 144가구는 3인 이상 가구에 적합한 전용면적 59~84㎡로 구성해 모두 장기전세주택으로 활용한다. 단지 자체는 전용면적 59~120㎡, 펜트하우스 등으로 다양하게 설계됐다. 개포주공5단지는 내년 5월 사업시행계획인가를 거쳐 2024년 착공해 2027년 준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른 강남권 노후 아파트 단지들도 정비사업 속도를 높이는 데 몰두하고 있다. 최환석 하나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장은 “과거에는 시장을 자극할 수 있어 서울시가 (심의 통과를)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며 “지금은 고금리 여파로 시장이 움직이지 않으니 빠르게 속도를 내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서울시가 적극적인 만큼 강남권 정비사업도 올해 상당히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올해 재건축 안전진단 규제를 대폭 완화한 것도 서울 노후 아파트 단지들의 움직임을 분주하게 하는 요인이다. 특히 198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이 즐비한 서울 양천구 목동과 노원구 상계동에선 안전진단을 통과한 단지들이 대거 나오는 상황이다.
양천구청은 1월 들어 신월시영아파트와 목동 3·5·7·10·12·14단지에 “안전진단 등급이 ‘조건부 재건축’에서 ‘재건축’으로 변경됐다”고 통보했다. 7개 단지는 이로써 바로 재건축이 가능하게 됐다. 해당 단지들의 전체 가구 수만 1만5362가구에 달한다. 노원구청 역시 상계주공 1·2·6단지와 상계한양아파트에 재건축이 가능해졌다는 판정 결과를 통보했다.
양천구청과 노원구청이 무더기로 안전진단 통과 통보를 보낸 건 정부가 지난 5일 관련 규제를 완화했기 때문이다. 먼저 재건축 평가항목 배점 비중이 개선됐다. 구조안전성 비중이 50%에서 30%로 낮아졌고, 주거 환경과 설비노후도 비중이 각각 30%로 상향됐다.
조건부 재건축 범위도 조정됐다. 즉시 재건축이 가능한 점수 기준이 30점에서 45점으로 올랐다. 이번에 재건축 통과 판정을 받은 대부분 단지들도 과거 기준에선 조건부 재건축 대상이었지만 바뀐 기준에 따라 즉시 재건축이 가능해졌다.
양천구청은 목동 1·2·4·8·13단지에 대해, 노원구청은 하계장미와 상계미도 아파트에 대해 조건부 재건축 판정을 통보하기도 했다. 해당 단지들은 바뀐 안전진단 기준으로도 45점을 초과하는 점수를 얻은 것이다. 다만 정부는 조건부 재건축 판정 이후 절차인 2차 정밀안전진단(적정성 검토) 규제도 올해 들어 대폭 풀었다.
작년까진 조건부 재건축 판정을 받으면 의무적으로 공공기관 적정성 검토를 받아야 했다. 검토 절차를 또다시 밟아야 하다 보니 사업에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올해부턴 입안권자의 판단에 따르도록 했다. 시장과 군수, 구청장이 자료 보완이 필요하거나 소명이 부족해 판정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한해 적정성 검토를 의뢰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구청장이 1차 정밀안전진단 결과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결정하면 조건부 재건축 단지라 해도 바로 재건축이 가능하다.
백준 J&K도시정비 대표는 “재건축 기대감이 강해짐에 따라 추진위의 활동력도 높아질 것”이라며 “정비계획 수립 절차도 경쟁적으로 서두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노원구에선 주요 단지들이 경쟁적으로 안전진단을 신청하고 있다. 월계 삼호4차아파트 재건축예비추진위원회는 최근 노원구청에 정밀안전진단을 위한 용역비용을 납부했다. 1987년 910가구 규모로 준공된 이 아파트는 2021년 10월 재건축 예비안전진단을 통과한 바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월계시영(미성·미륭·삼호3차)아파트와 상계주공3단지는 이미 안전진단 신청을 마쳤다. 노원구청은 이에 월계시영아파트와 상계주공3단지에 대한 정밀안전진단 용역을 발주했다. 용역 기간이 약 3개월이라 올해 상반기 안에는 결론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월계시영아파트는 미성·미륭·삼호3차아파트로 구성돼 있어 이른바 ‘미미삼’으로 불린다. 1986년 준공됐고 3930가구로 이뤄져 있다. 규모가 크다 보니 강북권 최대 재건축 단지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1987년 준공된 후 35년이 지난 상계주공3단지는 2213가구 규모 대단지다. 지하철 4·7호선이 지나는 노원역이 바로 인접해 있고 1호선 창동역이 도보권에 위치한 초역세권 단지다. 상계고등학교가 단지에 붙어 있기도 하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노원구청이 있어 상계주공 16개 단지 가운데 알짜 입지로 꼽힌다.
노원의 이같은 분위기에 서울시는 아예 올해 ‘상계·중계·하계동 일대 택지개발지구 지구단위계획 재정비’ 사업을 추진한다. 정부가 재건축 안전진단 규제를 완화한 후 노원의 아파트 정비사업에 탄력이 붙자 다음 단계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미리 기초 작업에 나서는 것이다. 재건축 절차를 보면 안전진단 통과 후엔 ‘정비계획’을 짜야 하는데, 이때 새로운 지구단위계획이 전반적인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서울시는 올해 3월부터 노원 일대 지구단위계획 재정비를 총괄할 마스터플래너(MP)를 선정하고 용역을 발주하는 등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교통개선대책, 도시건축 디자인 혁신 방안, 밀도계획, 기반시설계획 등에 대한 고민을 담아낼 방침이다. 내년 12월 안에 지구단위계획 결정 고시를 하는 게 목표다.
다른 지역 노후 아파트 단지들도 안전진단 통과 판정을 속속 받고 있다. 서초구 반포미도2차 아파트는 지난 5일 서초구청으로부터 안전진단 최종 통과 통보를 받았다. 도봉구청은 창동 상아1차, 방학동 신동아1단지, 쌍문동 한양1차 아파트에 대한 재건축 가능 여부를 살펴보고 있다. 또한 구로구청에 따르면 구로동 럭키아파트도 최근 예비안전진단(구청 현지조사)을 통과했다.
최환석 센터장은 “단기적으로는 금리가 높기 때문에 재건축 호재가 시장의 흐름을 반전시킬 요소로 작용하진 못할 것”이라면서도 “장기적으로 시장 환경이 바뀌는 시점이 오면 재건축 추진 단지들이 상대적으로 반등하는 힘이 더 커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서울은 재건축·재개발을 하는 것 말고는 공급할 수 있는 요인이 없기 때문에 재건축이 추진되면 자산가치가 상승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고 원장은 “안전진단 통과는 재건축의 첫 번째 문턱을 넘은 것”이라며 “재건축은 장기적인 사업이다. 여전히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도, 토지거래허가구역제도, 경기 침체 상황 등 많은 걸림돌이 있다는 걸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희수 매일경제 부동산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