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례가 보여주듯,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한 수명연장은 노후 현금흐름의 상설화(常設化)를 요구하고 있다. 연금이 빈약하고 저축은 묶여 있는 상황에서 ‘사망보험금을 살아서 당겨쓰자’라는 유동화 제도 도입이 예고되면서 크게 화제가 되고 있다.
2024년 12월,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4%를 기록하며 초고령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기대수명 83.6세, 노인 빈곤율 39.2%(2023년 통계청). 국민연금 월평균 수급액은 58만원(2022년)에 불과하고, 노후 적정생활비(국민연금공단 조사)는 월 177만원을 훌쩍 넘긴다. 빈틈을 메워야 하는데, 개인 자산은 부동산과 종신보험 적립금처럼 ‘현금화가 느린 자산’에 갇혀 있다.
반면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판매된 확정형 종신보험은 6~8%대 예정이율 덕에 책임준비금이 크게 불어났다. 금융위원회가 집계한 ‘즉시 유동화 가능 계약’은 33만 9000건, 사망보험금 기준 11조 9000억 원. 가치가 잠들어 있는 거대한 ‘노후 파킹 자산’이란 얘기다.
금융위원회는 2025년 4분기(빠르면 3분기) ‘사망보험금 유동화’제도 시행을 예고했다. 먼저 유동화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금리확정형 종신보험
(변액·금리연동형 제외)
2. 계약기간 10년 이상
3. 보험료 납입기간 5년 이상 및
완납 상태4. 계약자와 피보험자 동일
5. 만 65세 이상 신청
6. 보험계약 대출 미보유
추가 제한으로 사망보험금 9억원 이상 초고액 계약과 단기 납(5년 이하) 종신보험은 1차 대상에서 빠졌다.
금융당국은 “예정이율이 금리 확정이고 장기납으로 책임준비금을 충분히 쌓은 계약이 우선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유동화 한도는 사망보험금의 최대 90%다. 반드시 10~30%는 잔존 사망보험금으로 남겨 유족 보장 기능을 최소화한다. 지급방식은 일시금이 아닌 연금이 원칙이며 선택지는 10년·20년·종신 세 가지. ‘연금형’과 ‘서비스형’ 두 갈래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결합 설계도 허용된다. 신청 절차는 ▲계약자 신청 ▲보험 수익자(상속 예정인 자녀 등) 서면동의 ▲전담 상담사 상품 설명 ▲유동화 금액·기간 확정 ▲계약 변경 특약 체결 ▲연금 또는 서비스 지급 개시 순이다.
금융감독원은 “고령층 이해도를 고려해 14일 이상의 숙려기간, 연 2회 이상 해피콜 모니터링을 의무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금형의 핵심은 ‘내가 낸 보험료를 상회하는 월 소득’이다. 금융위 가이드라인은 ‘납부 월보험료의 100~200% 수준을 최저선’으로 제시했다.
서비스형은 현금 대신 현물·서비스로 지급한다. 보험사는 실버타운, 장기 요양기관, 헬스케어 업체와 직접 제휴해 ‘원가 이하’로 제공하고 중개이익은 거의 남기지 못한다.
실버타운 입주형은 대표적 모델이다. 예컨대 78세 독신 여성 C씨가 사망보험금 4억원 중 1억원을 서비스형으로 유동화하면, 이 1억원이 A 실버타운 보증금으로 자동 전환된다. 매월 관리비는 개인연금과 국민연금에서 납부, 사망 시 미사용 잔액은 상속인에게 정산된다.
간병바우처형은 장기요양등급 판정 시 요양보호사 파견 비용을 자동 결제하는 방식이다. 반려동물 신탁형은 노후 반려동물 돌봄·사후 장례를 전담 기관에 맡기고 비용을 유동화 금액에서 미리 공제한다.
소비자는 ‘서비스형이 현금가치 대비 불리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보험사는 “사업비를 받지 않는 대신 고령층 대량 수요를 기반으로 요금을 낮췄다”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실제 요양원 월 이용료가 180만원이라면 서비스형 이용료는 130만원 안팎으로 책정될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서 가정하는 전체 사망보험금 규모 11조 9000억원 가운데 70%가 연금형·서비스형으로 풀리고, 평균 지급 기간을 18년으로 잡으면 연간 1조 6500억원이 노인 가계에 유입된다. 퇴직연금 연금화액(2024년 4조 2000억원)의 40%를 웃도는 규모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 돈이 의료, 요양, 레저, 내구재 소비로 흘러가면 고령친화 산업이 들썩일 것”이라고 내다본다.
보험사도 새 먹거리를 찾는다. 해지율이 낮아지면 책임준비금 일시 유출 위기는 줄고, 장기 고객을 대상으로 한 헬스케어·부동산 임대사업에 자연스레 진입할 수 있다. 이미 일부 대형사는 실버타운 건립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참여해 ‘보험+주거+간병’ 삼위일체 플랫폼을 준비 중이다. 다만 과도한 자금이 연금화되면 문제점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유족 보장 약화가 일부 우려된다”라며 “잔존 사망 보험금이 10%까지 내려가면 상속세 재원이나 장례비로는 부족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최소 3000만원 수준 잔존액을 사실상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편 과세 논란도 발생할 수 있다. 기타소득 8% 원천징수는 낮아 보이지만 장기 수령 시 과표가 누적돼 노인 세대 건강보험료, 기초연금 선정 기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완전판매 위험도 상존한다. 고령층이 복잡한 약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과도한 유동화를 택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를 참작해 금감원은 전담 보험설계사에게 ‘인지능력 확인 체크리스트’를 별도 적용할 계획이다.
한편 우리보다 먼저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국가들이 마주한 문제점들도 있다. 먼저 일본은 2002년 ‘생전급부형 종신보험’을 도입했지만, 2010년대 저금리 심화로 예정이율이 1% 대로 떨어지며 연금수령액이 크게 줄었다. 초기 가입자와 신규 가입자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진 끝에 2020년 부터는 유동화 한도를 70%로 낮춘 상황이다. 한국은 예정이율 하락에 대비해 ‘유동화 계산식에 공시이율상한 적용’ 방식을 도입할 예정이다. 미국 시장은 2023년 기준 관련 연간 거래액 4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고령층이 종신보험을 제삼자에게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지만, 브로커 수수료가 20%를 넘기도 한다. 금융사기 민원도 매년 400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은 브로커를 차단하되, 보험사와 소비자 사이의 이해상충을 막기 위한 공시 강화에 집중할 예정이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주택연금이 거주비 걱정을 일부 덜어냈듯 사망 보험금 유동화는 초고령사회가 요구한 금융 혁신”이라며 “과거 사례를 살피고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파악해 정책 당국은 운용안정 및 소비자 보호에, 보험사는 상품 표준화와 사후 관리에, 소비자는 상속·세금·연금 균형 점검에 각각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