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퇴직연금에 쏠리는 관심은 그 어느 때 보다 뜨겁다. 그러나 실제 퇴직연금이 우리 노후를 든든히 지켜줄 수 있느냐는 질문엔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지 않다. 2024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431조7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지만, 그 돈의 실질 가치는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안전을 우선시한 운용 구조, 낮은 수익률, 중도 인출 등 복합적인 문제 때문이다. 결국 답답함을 느낀 가입자들은 스스로 자금을 ‘저축’에서 ‘투자’로 돌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머니무브’ 현상이다.
퇴직연금의 낮은 수익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운용수익률은 2% 남짓에 그쳤다. 같은 기간 한국의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였다. 사실상 제자리걸음이거나 실질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퇴직연금 대부분이 원리금보장형에 쏠려 있다는 점이다. 전체 적립금 중 82.6%가 예·적금, 보험 같은 원리금보장 상품에 묶여 있다. 지난해 원리금보장형 수익률은 3.67%였다. 반면 주식, 펀드, ETF 등 실적배당형 수익률은 9.96%로 세 배 가까이 높았다.
퇴직연금이 ‘연금답지 않다’라는 지적은 수령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퇴직연금을 연금으로 장기간 나눠 받은 사람은 전체 수령자 중 13%뿐이었다. 나머지 87%는 퇴직 즉시 일시금으로 찾아갔다. 이마저도 적지 않은 돈이 퇴직 전에 이미 빠져나간다. 2022년 기준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한 사람은 약 5만 명, 인출액은 1조 7000억원이었다. 그중 절반은 주택 구입이 이유였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이 장기 자산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단기 대출 창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 상태로는 노후 안전망 역할을 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답답한 현실에 직장인들이 스스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바로 ‘투자형 연금’으로의 머니무브다. 지난해 실적배당형 상품 규모는 전년 대비 53.3% 급증했다. 특히 DC(확정기여)형과 IRP(개인형퇴직연금) 계좌로 돈이 몰리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집계한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전체 적립금 중 실적배당형 비중은 17.4%로 늘어났다. 아직 대세는 아니지만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 투자자들의 눈길은 특히 타깃데이트펀드(TDF)와 TDF ETF로 향하고 있다. TDF는 목표 은퇴시점을 설정하면 은퇴 시점에 가까울수록 위험자산 비중을 낮추는 상품이다. 여기에 ETF의 장점이 결합된 TDF ETF는 거래소에서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고, 수수료도 낮아 인기다.
실제 ‘KODEX TDF2050액티브’는 반 년 만에 순자산이 49% 늘었다. ‘PLUS TDF2060액티브’ 같은 고빈티지 상품도 비슷한 흐름이다. 반면 은퇴가 임박한 저빈티지 TDF ETF는 인기가 시들해지며 상장 폐지되는 사례도 나왔다.
흥미로운 건 이 흐름의 주축이 MZ세대라는 점이다. 주식, 코인, ETF 투자에 익숙한 이들은 연금계좌도 일종의 투자 포트폴리오로 본다. 금융감독원 조사에서 2030세대 IRP 가입자의 62%가 “적극 운용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증권사에서 연금계좌를 개설해 모바일로 직접 리밸런싱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증권사 IRP 계좌의 실적배당형 비중이 은행보다 훨씬 높은 것도 같은 이유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이제 ‘두 번째 주식 계좌’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처럼 퇴직연금을 투자형으로 굴리려는 흐름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만,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중도 인출을 억제할 수 있는 장치는 여전히 미흡하다. 중도 인출 제한, 상환유예기간(lock-up) 같은 장치는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고, 주택 문제가 얽혀있어 실효성 있는 대안도 없다. 또한 퇴직연금을 연금으로 수령할수록 더 큰 세제 혜택을 주거나 개시 연령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는 계속 나오지만 실행은 더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보와 교육이다. 가입자 스스로 수익률을 비교하고 운용 전략을 바꿀 수 있도록 투명한 정보 제공이 필수다. 금융당국은 퇴직연금 운용성과를 더 쉽게 비교할 수 있는 통합공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현장 체감은 미미하다. 가입자가 직접 운용할 수 있도록 돕는 디폴트옵션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자동 투자’에만 기대어 투자 원칙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퇴직연금은 결코 단기 예금이 아니다. 최소 20년 이상 투자해야 하고, 분산 투자와 저비용 운용이 필수다. 연금 수익률이 물가 상승률보다 1~2%포인트만 높아도 노후 생활의 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는 국민연금만으로는 부족한 현실에서 개인이 노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새 핀테크 스타트업과 대형 자산운용사들이 앞다퉈 로보어드바이저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로보어드바이저는 투자자의 성향과 목표 시점을 기반으로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자동으로 설계하고, 시장 변화에 따라 자산 비중을 스스로 조정한다. 이를 통해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일관되게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게 가장 큰 강점이다.
특히 개인형퇴직연금(IRP)에 로보어드바이저 일임 서비스가 허용되면서 투자자들의 선택지가 크게 늘었다. 가입자는 복잡한 펀드 설명서를 뒤적일 필요 없이, 간단한 위험 선호도 설문만으로 AI가 알아서 글로벌 주식과 채권, 대체투자 비중을 설정한다. 이후 시장 상황이 바뀌면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비중을 조절해 수익 기회를 극대화한다.
이 효과는 숫자로 입증되고 있다. 코스콤에 따르면 현재 퇴직연금에 적용 가능한 로보어드바이저 알고리즘은 500개가 넘는다. 이 중 일부는 최근 1년간 20%를 훌쩍 넘는 수익을 기록하며 투자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끌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M-ROBO 마이골드 자산배분’은 1년 수익률이 27%에 달했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수익률은 특정 시기의 시장 상황과 알고리즘 설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최소한 ‘정기예금 수준’에 머물던 기존 퇴직연금 운용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이제 IRP를 넘어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으로까지 확장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법적으로 IRP에서만 일임 서비스를 허용하고 있으나, 금융권 안팎에서는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금융당국도 디폴트옵션, 로보어드바이저 등 혁신형 운용 방식을 더 넓게 도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DC형 퇴직연금 계좌에 로보어드바이저 일임 서비스를 전면 허용하려면 법령 개정과 금융당국의 정책 조정이 필요하다. 게다가 기업마다 퇴직연금 운용 관리에 대한 이해도가 천차만별이라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기까지는 물리적·심리적 저항이 크다. 이 과정에서 로보어드바이저의 알고리즘 신뢰도와 투명성은 중요한 숙제다. 현재 등록된 알고리즘들 사이에서도 성과 차이가 상당하다. 어떤 것은 1년간 두 자릿수 수익을 냈지만, 어떤 것은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어떤 알고리즘이 좋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공시 의무가 강화되고 성과 비교 지표가 더 직관적으로 정리돼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로보어드바이저가 ‘만능키’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가장 흔한 오해는 과거 수익률만 보고 알고리즘을 선택하는 것이다. 시장은 늘 변동성이 있고, 어떤 시기에는 보수적 전략이 더 유리할 때도 있다. 따라서 가입자 개개인이 본인의 투자 성향과 은퇴 계획에 맞는 전략을 고르고, 중간에 전략이 흔들리지 않도록 장기적으로 유지할 의지가 필요하다.
특히 IRP에 RA 일임 서비스가 도입 됐다고 해서 모든 가입자가 스스로 선택해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다수의 직장인은 가입 당시 설정한 원리금보장 상품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선택의 복잡함에 주저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해결하려면 ‘자동 투자’와 ‘가입자 교육’이 동시에 강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을 로보어드바이저와 결합해, 선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투자형 포트폴리오에 편입되도록 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떠오른다. 이와 함께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논의도 점차 본격화되고 있다. 기금형은 기업이 각각 금융사와 계약해 운영하는 기존 계약형과 달리, 전문가 집단이 대규모 연금자산을 하나의 기금으로 모아 장기·글로벌 분산 투자로 굴리는 구조다. 대규모 자산이 만들어지면 수수료 협상력도 올라가고 운용 효율성도 극대화된다. 로보어드바이저 같은 첨단 시스템도 기금형 운용에 접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에선 기금형과 AI 기반 운용이 함께 발전할 가능성을 높게 본다.
퇴직연금은 이제 더 이상 은행 예금의 연장선으로 머물 수 없다. 인공지능, 글로벌 자산배분, 자동화 기술이 결합한 새로운 투자 환경은 이미 현실이 됐다. 문제는 이를 온전히 활용할 제도와 투자 문화가 아직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더 많은 근로자가 AI 로보어드바이저의 도움으로 ‘물가+α’ 수익률을 꾸준히 누리려면 정부, 기업, 금융사가 한목소리로 ‘투자형 연금 시대’를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국내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평생 모은 돈을 가장 길게 묶어두는 자산이므로 그 돈이 물가를 이기지 못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술과 제도가 함께 지켜주는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라며 “‘내 연금은 내 손으로 굴린다’는 투자자의 선택을 제대로 받쳐줄 길, 지금부터라도 마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8호 (2025년 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