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 제국의 정신’ 작곡가 엘가 | 제2애국가 ‘위풍당당 행진곡’ 지금까지 영국인의 사랑받아
지난 3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세계에서 가장 바쁜 영국 지휘자 다니엘 하딩(39)은 앙코르 곡으로 엘가(1857~1934)의 ‘수수께끼 변주곡’ 제9변주 아다지오 ‘님로드’를 연주했다. 깊고 아득한 선율이 객석을 휘감았다. 전날 청중들의 열렬한 갈채에 흥분한 그는 이날 앙코르곡으로 연주할 존 윌리엄스의 영화 <스타워즈> 배경음악을 포함해 3곡을 이미 연주해 버렸다. 그래서 대체할 앙코르로 ‘님로드’를 선택했다.
하딩은 공연기획사에 엘가의 곡을 앙코르곡으로 들려주고 싶으니까 악보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엘가의 ‘님로드’를 빌렸다.
영국 작곡가 엘가는 대영 제국의 정신을 대표한다. 그의 대표작인 ‘위풍당당 행진곡’은 1902년 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서 연주된 후 대영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선율이 됐다.
엘가의 ‘님로드’는 장송곡으로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 이날 한껏 고조된 음악회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런던 심포니와 하딩은 고국 작곡가에 애정을 충분히 드러냈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엘가는 오직 조강지처만을 바라본 지고지순한 사람이었다. 8살 연상 부인 캐롤라인 앨리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바쳤으며 그 열정은 창작열로 번졌다. 1888년 아내에게 청혼하기 위해 바친 명곡이 바로 ‘사랑의 인사’. 오늘날 결혼식 축하곡으로 가장 많이 연주된다. 3분에 불과한 짧은 곡이지만 지극히 달콤하고 낭만적이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2세에 인생의 반려자를 만난 엘가는 아내에게 푹 빠져 살았다.
두 사람은 결혼한 후 이듬해 자식을 낳고 알콩달콩 잘 살았다. 오르가니스트였던 엘가는 아내에게 용기를 얻어 작곡가로 변신에 성공했다. 아내가 쓴 시(詩)에다 남편이 선율을 붙여 가곡을 만드는 ‘닭살 커플’이었다. 안정된 결혼 생활과 만족감 덕분에 좋은 작품들이 쏟아졌다.
친구들과 아내를 묘사한 곡 ‘수수께끼 변주곡’
‘님로드’가 수록된 ‘수수께끼 변주곡’도 아내의 음악적 안목이 뒷받침되어 대작으로 승화됐다. 예민한 아내는 남편이 피아노 앞에서 공상에 빠져 장난삼아 친 선율을 놓치지 않았다. 엘가는 아내와 친구들을 수수께끼처럼 숨겨 놓은 변주곡을 즉흥적으로 쳤고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이렇게 완성한 ‘수수께끼 변주곡’을 1899년 6월 19일 런던 성 제임스 홀에서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초연했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수수께끼가 들어 있다. 하나는 각각의 변주가 어떤 친구를 묘사했는가다. 엘가는 나중에 피아노 편곡에 쓴 글로 정답을 알려준다.
나머지 수수께끼는 전체 곡 안에 숨겨진 선율이다. 엘가는 잘 알려진 선율의 변주라고만 밝혔는데 정확한 답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학자들은 영국 국가인 ‘고드 세이브 더 퀸(God Save the Queen)’과 스코틀랜드 민요 ‘작별’, 모차르트의 프라하 교향곡, 제임스 톰슨이 작곡한 ‘브리타니아여, 통치하라’ 중 ‘네버, 네버, 네버(never, never, never) 등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이렇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수많은 추측을 만들어낸 ‘수수께끼 변주곡’은 엘가의 출세작이다. 42세에 작곡한 이 곡은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1659~1695) 이후 최고의 영국 걸작으로 추앙받았다.
이 곡에는 엘가의 사랑과 우정, 자기애가 녹아 있다. 친구들과 아내의 특징을 변주곡으로 표현한 후 자화상으로 갈무리했다. 우선 제1변주 ‘C.A.E.’는 아내인 캐롤라인 앨리스 엘가를 묘사했다. 휘파람을 불어 아내를 부르곤 하던 엘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을 담았다.
제2변주(알레그로) ‘H.D.S-P.’는 피아니스트 친구 휴 데이비드 스튜어트 파월에게, 제3변주(알레그레토) ‘R.B.T.’는 아마추어 배우인 리처드 백스터 타운젠드에게 헌정했다. 제6변주(안단티노) ‘Ysobel’은 제자인 비올리스트 이사벨 피튼을 위해 비올라 독주를 삽입했다. 제9변주(아다지오) ‘님로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후손이자 사냥의 명수 님로드를 뜻한다. 그러나 이 변주의 주인공이자 엘가의 독일인 친구 요하네스 예거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독일어로 사냥꾼을 뜻하는 그의 성 예거(Jager)로 엘가가 말장난을 친 것이다. 예거는 출판사 노벨로의 음악담당 편집자로 엘가에게 음악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뼈아픈 지적도 했지만 엘가는 겸허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소중한 우정을 담은 이 곡은 벗을 떠나보내는 장송곡이나 추모곡으로 자주 연주된다. 국립오페라단 이사장과 후원회장을 역임하면서 평생 오페라를 아낌없이 지원한 고 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의 추모 음악회(지난 3월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도 이 곡이 울려 퍼졌다.
영국 제2국가로 연주되는 ‘위풍당당 행진곡’
엘가의 선율은 고집스럽고 자신감에 차 있는 영국 신사와 감상적이며 내성적인 이미지가 겹친다. 하지만 관현악곡집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ilitary Marches Op. 39)은 가슴 벅찰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제목인 ‘위풍당당’(Pomp and Circumstance)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의 제3막 제3장의 대사에서 따온 것이다. 28분 동안 연주되는 이 행진곡은 총 5곡으로 구성됐다. 1901년부터 7년에 걸쳐 제1~4번을 작곡했고 제5번은 1930년에 완성됐다. 제6번은 에드워드 엘가의 사후에 미완성 악보로 발견됐는데 안토니 페인이 보필(補筆)해 완성한 작품이 널리 연주된다.
제1곡은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제안으로 ‘희망과 영광의 땅’(Land of Hope and Glory)이라는 가사를 붙였다. 장엄한 선율 덕분에 영국 국가처럼 불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더욱 애창됐다. 청중뿐만 아니라 작곡가도 이 곡을 들으면 애국심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대영 제국을 상징하는 선율이 된 이 곡은 영국 공식 모임에서 관례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지금까지 영국 최대 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 마지막 날 밤에 연주될 정도로 각광받고 있다. 영국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엘가는 1857년 6월 2일 브로드히드에서 출생했다. 오르간 주자인 아버지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고 대를 이어 오르간 조수로 활동했다. 연주자의 삶에 지친 아버지의 권유로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기도 했으나 음악 열정을 버리지 못했다. 독학으로 작곡과 지휘법을 공부했다. 12세에 첫 작품인 ‘청년의 지휘봉’을 발표했으며 현악의 기본인 바이올린을 배워 작곡 기법을 확장했다. 1885년 부친이 사망하자 성 조지 교회당 오르간 주자를 물려받아 성스러운 예배 음악을 연주했으며 지휘봉도 가끔 들었다.
아내가 떠난 후 음악 열정 식어
잔잔하고 특별할 것 없었던 그의 음악 인생은 한 여인을 만나면서 꽃피기 시작한다. 1889년 앨리스와 결혼해 런던에 삶의 터전을 잡았다. 아내의 내조와 응원 덕분에 작곡가로서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1890년 우스터에서 거행된 3대 합창단 음악제에서 ‘프로와사르’ 서곡을 연주하면서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00년 발표한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은 유럽 전역으로 이름을 떨치게 해줬다. 영국을 위해 작곡한 걸작들 덕분에 경(sir) 작위를 받았다. 말년에는 국왕의 총애와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1920년 그의 뮤즈이자 영혼의 반려자였던 아내를 떠나보낸 후 창작열정도 식어버렸다. 자신의 신념이자 하나뿐인 사랑을 떠나보낸 후 한동안 방황했다.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12년 후에야 베라 호크먼이라는 여성을 만났을 정도로 조강지처를 그리워했다. 그의 순애보는 다른 작곡가들과 너무 대조적이다. 바그너(1835~1917)는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심지어 제자의 아내를 뺏어 재혼했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1862~1918)도 유명한 바람둥이였으며,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하이든(1732~1809)은 유부녀 성악가와 오랫동안 ‘외도’를 하기도 했다.
엘가가 평생 사랑하고 그리워한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쓴 작품이 바로 ‘첼로 협주곡 E단조 Op.85’(1919년). 엘가의 마지막 노래가 되어버린 이 곡은 62세 대가의 열정과 우수가 집약된 작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이 곡에 희망을 녹여 스스로를 위로하고 참전 용사들의 절망을 달랬다.
엘가는 성공한 작곡가로 대접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과도한 관심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사색과 고독을 즐겼다. 소박하고 기품 있게 살았던 그는 1934년 2월 23일 고향 브로드히드에서 눈을 감았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3호(2014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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