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리 인하가 가속화되고 있다. 전방위적인 경제 지표들은 아직 미흡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가 꺾였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오는 9월 열리는 미국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미국 금리를 0.25%p(포인트)가 아닌 0.5%p를 내리는 이른바 ‘빅컷(Big Cut)’이 발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주식시장 흐름 읽는 법’의 저자인 일본 애널리스트 우라가미 구니오에 따르면 주식시장은 크게 4가지 국면으로 나뉜다. 금융장세-실적장세-역금융장세-역실적장세다. 금융장세는 고금리에서 저금리로 내려오는 기간으로, 경제 거시지표는 나쁘지만 저금리와 정부의 금융 완화책으로 시중 유동성이 풀려있는 장세를 뜻한다. 이땐 시장 거래량이 대폭 늘고 등락주 비율도 상승한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코스피 부양 의지가 확고해졌고, 국내 주식시장으로의 투자금 유입이 늘어나고 있는 게 금융장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융장세에선 은행·증권 등의 금융주와 건설·인프라주, 제약주 등이 주목을 받는다. 돈이 남아도는 주식 시장의 수급 균형 면에서 보더라도 좋은 환경에 있는 데다 금리 하락 수혜를 보기 때문에 타 업종과 다르게 큰 폭으로 이익이 개선되고, 당연히 주가도 이를 반영한다. 최근까지 금융, 건설주들이 상승 랠리를 보여줬는데, 이젠 지난 상반기 주춤했던 제약·바이오주들도 국내 주식시장 플레이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 대형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올 상반기 호실적을 달성했다. 코스피 시가총액 4위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상반기 연결기준 매출액 2조 5882억원, 영업이익 9623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3%, 삼성바이오로직스 매출은 47% 증가했다. 1~3공장 운영 효율 개선과 4공장 가동 확대 등에 따른 영향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 매출액을 경신했다. 정이수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4공장 램프업 효과와 수익성 높은 신규 바이오시밀러 제품 매출 확대로 예상보다 높은 수익성을 시현했다”며 “오는 3분기엔 지난 2분기에 이연된 CDMO 매출과 삼성바이오에피스의 마일스톤 수익이 예상돼 수익성 개선이 기대된다”고 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그룹 산하의 바이오 CDMO(위탁개발생산) 및 의약품·바이오시밀러 개발 업체다. 반도체, IT(정보기술)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꿔가던 삼성이 2010년대 신수종 사업 중 하나로 제약사업을 점찍으면서 삼성바이오로직스를 키웠고, 현재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제약·바이오 업체로 평가받는다. 최근엔 바이오 부문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를 CDMO 전문 기업으로 남기고 기존 신약 및 복제약 개발 부문은 신설법인 삼성에피스홀딩스로 분할하기로 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시설을 기반으로 그룹 내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삼성에피스홀딩스는 R&D(연구개발) 및 글로벌 파트너십 확대의 중추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인적 분할 비율은 65대 35로 삼성에피스홀딩스의 분할 이후 가치는 바이오시밀러와 자회사의 신규 사업 가치가 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투자업계의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대한 눈높이도 높은 편이다. 현재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주가는 100만원 선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대부분의 국내 증권사들은 향후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주가가 130만원 이상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보고 있다. ▲IBK 투자증권 130만원 ▲KB증권 135만원 ▲DS투자증권 130만원 ▲LS증권 135만원 ▲다올투자증권 130만원 ▲유안타증권 130만원 ▲메리츠증권 130만원 ▲미래에셋증권 140만원 ▲하나증권 145만원 ▲현대차증권 130만원 등이다.
김승민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분할 이전 삼성바이오로직스 기업가치 보다 분할 이후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에피스홀딩스 가치 합이 더 클 것으로 예상돼 분할 전 매수 전략을 권고한다”며 “향후 기대되는 이벤트는 관세 최종안 발표에 따른 대응 방안, 5공장 추가 수주, 6공장 투자 발표, 삼성에피스홀딩스 신설 자회사의 사업개발 전략 등”이라고 말했다. 폐암 신약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의 상업화 성공으로 국내 제약사인 유한양행도 호실적을 기록했다. 유한양행의 올 상반기 매출액은 1조 256억원으로 첫 반기 매출 1조원 이상을 돌파했다. 영업이익은 54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8% 늘었다. 유한양행은 2018년 존슨앤존슨의 자회사 얀센에 레이저티닙 관련 기술을 수출했다. 이후 렉라자는 지난해 8월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며 국내 제약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환자 4명 중 1명 꼴로 렉라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유한양행은 이미 2000억원이 넘는 기술료를 받았고, 향후 렉라자의 사용 확대로 매출액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올 하반기엔 리브리반트와 라즈클루즈 병용요법의 유럽 상업화에 대한 마일스톤이 반영될 예정이다.
이 같은 바이오 열풍에 현재 중견·중소·벤처기업 위주인 코스닥시장에선 제약·바이오 관련 업체들이 시가총액 상위권에 포진돼 있다. 8월 18일 기준 시총 1위는 ALT-B4 플랫폼으로 유명한 알테오젠이며, 3위 펩트론, 5위 파마리서치, 6위 리가켐바이오, 7위 HLB, 9위 에이비엘바이오, 10위 삼천당제약이 차지하고 있다. 시총 10개 중 7개가 제약·바이오주인 셈이다.
알테오젠은 약물전달 기술을 보유한 업체로 피하주사 제형변경 기술을 통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ALT-B4는 기존 정맥주사 제형을 피하주사로 전환할 수 있는 약물 전달 플랫폼이다. 미국 할로자임의 PH20보다 열 안정성, 면역원성, 발현율 부문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글로벌 바이오의약품 시장은 정맥주사에서 피하주사(SC)로 제형을 변경하고 있는데, 미국 머크사와의 키트루다 SC제형 개발 계약은 알테오젠의 주요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해진 임플바이오리서치 대표는 최근 저서인 ‘5년 후 10배 오를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라’에서 “알테오젠의 기업가치는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할 마일스톤 수익과 로열티 증가를 중심으로 평가되고 있다”며 “기술에 대한 높은 신뢰성에 비춰볼 때 매출 가시성이 높지만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고 로열티 비율 등 중요한 변수가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하지만 향후 추가적인 계약 여부에 따라 미래의 매출 지형이 달라질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전망했다. 알테오젠의 주가는 지난 7월 18일 50만 8000원까지 올라가며 역사적 신고가를 경신했다. 현재는 40만~50만원대에서 등락하며 다시 한번 신고가 돌파 기회를 엿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ADC(항체약물접합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관련 상장 기업들도 더 크게 주목받고 있다. ADC 자체 원천 개발 기술을 보유한 리가켐바이오는 현재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있다. HER2 ADC 파이프라인 LCB14는 3분기 중 임상을 종료한 후 연말 중 임상 1b상 진입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1a상에서 엔허투 투약 환자 5명을 대상으로 4명 부분관해, 1명 안정병변을 기록한 이력이 있는데, 유사한 추세가 더 많은 엔허투 투약 이후 환자에게 확인된다면 향후 내성에 대한 대안으로 리가켐바이오의 제품이 주목받을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정재원 iM증권 연구원은 “리가켐바이오의 플랫폼 가치를 기존 1조 1627억원에서 2조 2779억원으로 높여 평가한다”며 “플랫폼 가치를 새로 반영한 기업가치는 7조 1329억원, 목표주가는 20만원으로 제시한다”고 했다.
삼성증권은 올해 제약·바이오 분야별 최선호주로 ▲CMO(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에스티팜 ▲바이오시밀러-셀트리온 ▲제약-녹십자 ▲바이오-알테오젠, 리가켐바이오, 에이비엘바이오, 디엔디파마텍 등을 꼽았다. CMO 분야의 경우 신약 개발 확대로 전방 사업의 수요가 증가하고 글로벌 제약사와 바이오기업의 CMO 의존도가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이오시밀러의 경우 기존 바이오시밀러 처방 확대와 신제품 발매 효과로 매출 원가율이 개선돼 실적도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로벌 시장에선 아직 제약·바이오주에 대한 투자심리가 개선되지 않은 모양새다. 올들어 지난 8월 8일까지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8.63% 올랐지만 S&P500 헬스케어지수는 5.57% 하락하며 11개 섹터 중 가장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상위 편입 종목 중 일라이릴리, 유나이티드헬스그룹 등의 주가가 올들어 큰 폭으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일라이릴리는 올 2분기 매출액과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8%, 92% 증가하는 호실적을 냈지만 비만 치료용 임상시험 결과가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주가가 하루만에 14% 이상 하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 최대 건강보험사인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은 올들어 주가가 40% 이상 하락했다. 미국 내 헬스케어 비용 증가와 미국 정부의 보험금 환급 계획 변경 등으로 실적에 대한 불확실성이 생겼고, 지난해 브라이언 톰슨 유나이티드헬스그룹 부사장이 총격으로 숨진 이후 미국 내 보험 산업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의견이 많아졌다.
김충현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유나이티드헬스그룹에 대해 “가격 정책이 곧바로 실적에 반영되는 의료산업 특성상 이번 하반기에 급격한 실적 개선을 기대하는 건 구조적으로 어렵다”며 “실적 개선을 위해 보험료나 의료 서비스 요금이 인상될 경우 이로 인한 가입자 이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이어 “현재 가이던스를 지킬 수 있느냐가 추가 주가하락의 핵심으로 작용할 것인데 의료서비스 이용은 상반기보다 하반기가 더 큰 만큼 아직 불확실성은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 회장이 이끄는 버크셔해서웨이는 약 16억달러 규모의 유나이티드헬스그룹 주식을 매입했다. 기업의 가치가 낮아졌을 때 이를 매입해 장기간 보유하는 버핏 회장의 투자 스타일로 볼 때 이번에 매수한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의 주식을 오랜 기간 보유할 가능성이 높다고 시장은 평가한다. 버크셔해서웨이 외에도 도지앤콕스, 르네상승 케크놀로지스, 마이클 버리 등도 유나이티드헬스그룹 주식을 사들였다.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국내 투자자, 이른바 서학개미들도 유나이티드헬스그룹을 대거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서학개미들은 올 들어 지난 8월 15일까지 유나이티드헬스그룹 주식 5억 18만달러어치를 순매수했다. 이 기간 순매수 결제액 규모 순위 6위를 기록했다.
[홍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