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이다. 온 세계가 인공지능의 놀라운 힘에 취해 있는 때에 이 말은 새삼 음미할 가치가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과학은 ‘계산’한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 최적화해 있다. 과학은 ‘도구적’이다. 이성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가장 확률 높은 경로를 찾는 수단으로만 사용한다.
불행히도 그 목적은 맹목이다. 화학적 지식을 수천만 명을 살리는 비료를 생산하는 데도, 무참히 사람을 학살하는 더러운 폭탄을 만드는 데도 쓴다. 어느 목적이든 과학은 최적의 길을 발견한다. 과학은 계산의 목적을, 그 존재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과학의 언어인 수학이나 알고리즘엔 그런 걸 위한 수식이 거의(어쩌면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에 인공지능은 어떤 질문이든 망설임 없이 쉽고 빠르게 답한다. 인공지능의 데이터 처리 과정에서 ‘전쟁’과 ‘평화’는 정확히 등가다.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일 뿐이다. 인공지능은 그 의미를 묻지 않는다. 수많은 자료를 학습해 그다음에 어떤 단어가 자주 나오는 지만 계산해서, 이를 질문에 맞춰 ‘기계적’으로 배열한다. 이 기계는 전쟁과 평화가 각각 인간의 삶에서 어떤 다른 결과를 빚는지에 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인공지능엔 주관적 느낌이나 지향해야 할 가치가 없다. 그건 생각의 몫이다. <전쟁과 평화>(문학동네)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야망에 불타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을 전쟁터에서 쓰러뜨린 후, “저 높고 끝없는 하늘”을 보여줌으로써 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탁월한 지성과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그는 목적을 위해 최단 경로로 질주하는 데서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이 계산적 영웅은 전투에서 무언가에 뒤통수를 맞고 기절했다가 깨어난다. 그 순간, 저 하늘이 그의 눈에, 그의 마음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에는 드높은, 맑지는 않지만 측량할 수 없이 드높은 하늘과 하늘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잿빛 구름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하고 엄숙할까. 내가 달리던 때와는 전혀 다르다. 안드레이 공작은 생각했다. 왜 나는 전에 이 드높은 하늘을 보지 못했을까? 그러나 이제라도 깨달았으니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렇다! 모두 허무하다. 모두 거짓이다. 이 끝없는 하늘 외에는, 그러나 이 하늘마저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정적과 평안 외에는,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다. 가장 적은 자원을 동원해 승리를 향해 가장 빠르게 질주하는 일이다. 볼콘스키는 눈을 뜨자마자 먼저 “프랑스 병사들과 포수들의 싸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빨간 머리 포수가 죽임을 당했는지, 포를 빼앗겼는지 지켰는지” 확인부터 하려 한다. 그러나 저 끝 없는 하늘이 그를 멈춰 세운다. 자기 야망과 전쟁의 소란이 이 거대한 우주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계산하고 질주하던 이성이 작동을 멈추고, 돌아보며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따져 묻는 영성이 눈을 뜬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과학은 대상(자연이나 인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부품’이나 ‘자원’으로만 바라본다. 과학은 끝없이 정보를 처리하고 결과를 산출하나, 정작 그 결과가 인간 삶에 근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생각은 계산하지 않고 명상한다. 그것은 질주하지 않고 가만히 멈춘다. 정지해서 되돌아본다. 무작정 빠르게 답하지 않고, 좋은 답이 떠오를 때까지 한참 기다린다.
만약 인공지능이 생각해 보고 언젠가 답해 줄게, 하고 한다면 우리는 이 기계의 사용을 멈출 것이다. 아마 10분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기다림 속에서만 성숙한다. 존재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고, 그 고요한 신비 속에 머무른다. 고정희 시인은 “산길을 뒤쫓던 계곡물 소리가/ 기나긴 능선에서 돌아서 가버린 뒤/ 이 깊고 적막한 영산의 골짜기에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청학동 높새바람 능선을 넘어와/ 백 년 묵은 슬픔들을 구름으로 날립니다”<천왕봉 연가 6>라고 했다. 어떤 이별의 의미는 슬픔의 눈물이 쌓이고 솟아올라 백 년 동안 뭉게구름으로 피어나도 끝내 다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의 진리가 깃들 때까지 우리를 ‘내맡기는’ 일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대부분 언어만 학습했다. 따라서 그것은 삶을 조금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수영에 관한 논문을 통해서는 수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수영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강물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은 수영에 대해 누구보다 빠른 답을 내놓을 수 있지만, 막상 물에 빠지면 가라앉는다. 그러나 생각하는 한, 인간은 진실에 민감하다. 심지어 거짓을 말할 때조차 그것이 실제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곰곰이 따진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38>(열린책들)을 보라. “내 사랑 자신이 정결하노라 맹세할 때/ 그 말 거짓임을 알아도 나 그녀의 혀 믿습니다./ 세상의 거짓된 간계를 미처 배우지 않은/ 철없는 청년으로 그녀가 나 생각하도록./ (중략) / 아, 사랑의 가장 훌륭한 모습은 가식에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노인은 나이 세기 싫어하는 법./ 그래서 나는 그녀와, 그녀는 나와 더불어 거짓을 말하고/ 서로 잘못된 가운데 우리 기꺼이 거짓에 속습니다.”
두 사람은 스스로 거짓을 말하고 있음도 알고, 서로가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안다. 거기다 자신이 상대를 속이지 못한 것마저 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더욱더 깊은 사랑을 느낀다. 그들에게 거짓은 “사랑의 가장 훌륭한 모습”이다. 그들은 한 걸음 물러나 상대방 말을 곱씹고, 그 안에서 머무르며, 그 의미를 돌아본다. 그들에겐 상대를 반복해 떠올리며 화를 내야 할 거짓과 달콤하게 즐겨야 할 거짓을 분별하는 힘이 있다. 멈추어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 연인의 말에 즉시 반응하는 기계가 사랑을 나누는 건 조금도 가능하지 않다.
생각은 언어 그 자체를 탐구하고, 그 언어가 실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결국 그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인지를 답하려 한다. 생각의 촘촘한 거름망을 거쳐서 인간은 연인으로 거듭난다.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는 연인의 그 말, 그 표정, 그 몸짓을 떠올리면서 지새우는 밤이 자주 찾아온다. 사랑이란 조금도 계산적이지도 않고, 전혀 효율적이지도 않다. 비틀비틀, 갈팡질팡, 좌충우돌, 느리게, 천천히, 한 꺼풀씩 그 의미가 드러난다.
기술 중독에 빠지면, 생각하는 힘은 약해지고, 영성의 눈은 닫힌다. 하이데거는 계산하는 이성의 발달이 사유의 빈곤을 가져왔다고 경고한다.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않고, 생성한다. 그 답을 옮겨 그대로 내뱉을 때, 인간은 출력하는 모니터가 된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자기 몸에 맞추고, 삶의 가치와 목적과 의미를 고뇌하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고, 자기 느낌과 취향을 존중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때다. 고요히 자기 안에 머무르면서 생각하는 시간만이 우리를 성숙시킨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