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어느 가족` vs 소설 `좀도둑 가족` | 모두의 가슴에 서 있을 눈사람을 위하여
김유태 기자
입력 : 2022.06.08 11:02:59
수정 : 2022.06.08 11:03:27
칸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행 비행기 좌석에 앉아 이 글을 시작해봅니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 가운데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가 있습니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은 5년 전 제71회 칸영화제에서 영화 <어느 가족>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 자신이 10년간 고민해 집필한 장편소설 <좀도둑 가족>을 원작으로 삼았습니다.
소설 원작자와 영화감독이 동일인인 두 작품은 어떤 비교지평을 형성할까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옆에 두고 읽으면서 <어느 가족>의 심연으로 들어가봅니다.
▶밀려난 사람들 너머의 ‘유리’
영화 <어느 가족>과 소설 <좀도둑 가족>의 줄거리는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언어화된 모든 문장을 스크린에 전시할 수 없는 한계가 있고, 고레에다 감독도 이와 관련해 소설 원작이 영화보다 더 확장적이며 영화는 소설에 비해 압축적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소설이 영화보다 더 풍요로운 이유지요.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은 총 6명입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백발의 하쓰에 할머니가 중심에 서고, 그의 아들 격인 오사무, 며느리 격인 노부요가 동거합니다. 여기에 명목상으로 노부요의 이복동생인 20대 중반 여성 아키, 오사무의 아들인 10세 소년 쇼타가 함께 삽니다. 겉으로는 3대가 함께 모여 사는 단란한 가정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하쓰에 할머니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10대 아키에게 함께 살자고 권했고, 오사무와 노부요는 하쓰에 할머니의 집에서 무전취식에 가깝게 빌붙은 처지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하쓰에의 연금을 노립니다. 쇼타는 주차장에 버려진 미아였는데 오사무가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밀려나다 더는 밀려날 곳이 없던 사람들인 셈이지요.
그런 오사무의 직업은 ‘좀도둑’입니다. 그것은 하쓰에 할머니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가업에 가깝습니다. ‘슈퍼를 가는 목적이 딱히 쇼핑은 아니었다. 그것은 중요한 가업이었다.’(12쪽) 오사무는 쇼타에게 ‘가업’을 잇기를 권유합니다. 쇼타가 자신을 아버지로 불러주길 바라면서, 그리고 사실 쇼타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느 날, 5명이 다닥다닥 모여 살던 이 낡은 집에 어린 여자아이 유리가 오게 됩니다. 유리는 “나라고 낳고 싶어서 낳은 줄 알아?”라는 말을 내뱉는 생모로부터 학대와 방치를 당하고 있었고, 오사무와 쇼타가 그런 유리를 유리의 집 앞에서 발견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데려가지요. 어린 유리의 배에 든 푸른 멍, 그리고 유리의 팔에 선명한 다리미 화상자국을 본 노부요는 자신의 불우했던 유년을 떠올리고는 유리에게 함께 살자고 권합니다. 가족이 이제 6명으로 늘었습니다. ‘선의의 유괴’는 과연 성공할까요.
▶배꼽의 집
하쓰에 할머니는 무려 50년간 이 낡은 목조 단층에서 살아왔습니다. 소설엔 이 집에 대한 묘사와 의미가 풍부합니다. 고레에다 감독이 영화에서는 다루지 못한 내용인데,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하쓰에 할머니 집은 출입구가 좁고 삼면이 고층맨션에 둘러싸인 구조입니다. 주변 집들은 모두 재개발됐지만 이 집만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주변 집이 버블시대에 모두 고층맨션으로 바뀐 뒤에도 이 단층집만 배꼽처럼 푹 꺼진 채, 버려지지도 개축되지도 않고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지워져버렸다.’(20쪽)
지워져버렸다는 것, 잊힌 것을 넘어서 그 집은 아예 세상으로부터 삭제당했습니다. 지워진 기억은 단지 이 집의 구조나 외형만은 아닐 겁니다. 잊힌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람이지요. 고레에다 감독은 소설에서 이 집을 일종의 ‘배꼽’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배꼽은 인간이 태어난 근원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잊기 쉬운 신체의 한 부분이란 특성을 떠올린다면 이 작품이 은유하는 심연은 깊어집니다. 배꼽의 집에는 또 하나의 어두운 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바로 쇼타가 자신만의 공간으로 여기는 벽장입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의 교과서, 그리고 보물들이 즐비한 곳인데, 그곳은 아무도 출입할 수 없고 여동생 유리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배꼽의 집, 그곳에서 자라는 두 아이는 마치 세상의 저편으로 밀려난 태초의 사람처럼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선의 저편, 악의 저편
하쓰에 할머니 집에 사는 인물은 모두 세상이 정한 전통적인 윤리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쇼타는 ‘학교에 다니냐’는 어른에게 “집에서 공부하지 못하는 애들이 학교에 가는 것”이라고 응수하고, 유리를 유괴한 어른들은 “감금도 아니고, 몸값 요구도 하지 않았으니 유괴가 아니다”라는 조금은 이상한 논리로 자신들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특히 아키는 사야카라는 이름으로 성(性) 산업에 종사하는데, 하쓰에 할머니와 대화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령 ‘옆가슴이 보이는 니트 원피스를 입고 상체를 숙인 뒤 가슴을 좌우로 흔들면서 3000엔을 낸 남성이 있는 거울 앞에 서는 일’을 하쓰에 할머니 앞에서 전혀 머뭇거림 없이 이야기합니다. 하쓰에 할머니도 아키의 선택을 나무라기는커녕 “그렇게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니 부럽다”고 말합니다. 전통적인 윤리가 전복된 셈이지요. 앞서 언급한 오사무의 좀도둑질, 그리고 쇼타로 이어지는 가업의 대물림도 비윤리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일본에서 역사적으로 비천한 취급을 받았던 피차별 인구인 부락쿠민의 현대판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부라쿠는 우리말로 동네를 뜻하는 부락(部落) 거주민의 일본어로, 부라쿠민들이 모여 사는 곳은 사회적으로 명시적으로 핍박이 가능하던 공동구역이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현대판 부라쿠민은 자본과 전통에 의해 끊임없이 소외당하면서 결국 선악의 판단이 결여된 세상으로 내몰립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서전에서 부라쿠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던 날을 회고하는데 피차별 부락 사람들이 많이 일한다는 도살장을 다니며 취재하던 날들을 되짚는 대목에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영상을 만들어왔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이들 6인은 선악 이전에 생존을 도모하는 중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세상에서 보면 일견 비윤리적이고 괴이하게 비춰지지만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영화 말미에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은유들: 매미 허물과 눈사람
소설과 영화엔 문학적 장치가 가득합니다. 허투루 넘겨봐선 안 되는 소재가 10가지도 넘게 나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은유는 쇼타와 유리가 공원에서 발견한 매미 허물과 눈사람입니다. 나무에 남겨진 매미 허물을 갖고 놀던 쇼타와 유리는 아직 매미가 되어 날아가지 못한 유충을 발견합니다. 유충 주변으로 개미떼가 몰려오고 있어 유충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두 아이는 걱정되기만 합니다. 빨리 허물을 벗어야 날아오를 수 있을 텐데요. ‘그 유충은 무사히 매미가 되었을까. 갑자기 내리는 비에 날개가 젖어 날아가지 못했을까. 결국 유충인 채로 개미에게 둘러싸여 죽어버린 건 아닐까.’ (216쪽)
이를 문학적인 은유로 여겨본다면, 쇼타와 유리야말로 아직 세상에 나아가지 못한 유충의 처지를 닮았습니다. 하쓰에 할머니의 집은 결국 매미 허물, 즉 날아오르기 위한 안락한 장소지요. 세상으로 날아오르기 전에 몸을 숨기고 안전을 도모하던 곳, 그러나 유충이 매미가 되는 순간 허물은 불필요해집니다. 후반부에 “일부러 경찰에 잡혔다”는 쇼타의 말처럼 두 아이는 이제 넓고도 두려운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유리가 합류하면서, 유리를 위해서라도 이제 하쓰에 할머니 집에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쇼타는 어린 나이에 알았던 것이지요.
마지막 장면에서 쇼타와 오사무는 다시 만나 눈사람을 만듭니다. 눈사람이란 세상의 해가 비치면 결국 녹아내릴 허상의 조각상입니다. 하지만 눈사람의 실재가 있지 않다고 해서 눈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마저 녹아내리지는 않습니다. 하쓰에 할머니 집에 모여 살던 6인의 가족은 자신들이 쌓아올린 추억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겁니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눈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