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옛 조선소 자리 아르세날레에 입장하자 거대한 흑인 여성 조각이 대지의 여신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제59회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The Milk of Dreams(꿈의 우유)’를 상징하는 이 작품은 미국 흑인 여성 시몬 리(Simone Leigh·55)의 청동조각 ‘브릭하우스(Brick House)’다. 높이 4.9m의 조각은 아프리카 진흙집 같은 하반신을 치마처럼 펼치고 상반신에는 눈이 뭉개진 흑인 여성을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인 미감으로 표현했다.
지난 2019년 뉴욕 하이라인파크에 처음 등장했던 이 작품은 올해 베네치아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은 체칠리아 알레마니 하이라인파크 예술총괄 큐레이터(44)가 발탁했다. 2018년 구겐하임재단이 후원하는 휴고보스상을 받은 작가 리는 올해 미국관을 대표해 본인 작품을 가득 채웠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싱글맘 작가는 아프리카 토속 관광엽서나 기록물 속 건축물과 민속품, 여성상을 백인 남성 위주 역사를 전복하고 흑인 여성주의로 ‘주권(sovereignty)’을 선언했다.
비엔날레는 세계 예술계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좋은 기회다. 국가마다 대표 작품을 통해 겨루는가 하면 본전시에서는 특정 주제의식을 세계 각국 다양한 작가들이 한꺼번에 뽐낸다. 세계적인 큐레이터와 미술품 수집가, 스타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굵직굵직한 전시가 잇따른다. 길을 걷다가 위를 올려다보거나 옆을 둘러봐도 예술품이 가득하다.
시몬 리의 본전시 대표 조각. 베네치아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가 시몬 리(오른쪽).
▶잊혔던 소수자 목소리로 미래 희망 제시
지난 4월 23일 개막한 ‘미술 올림픽’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는 130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여성 두 명이 나란히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는 이변이 일어났다. 작가상을 받은 시몬 리와 영국 국가관을 대표한 소니아 보이스(60)가 주역이다. 보이스는 1982년 영국서 출발한 급진적 정치·예술 운동(British Black Arts) 출신으로 영국 음악사에서 묻혔던 5명의 흑인 여성 가수들 영상과 조각, 자료를 통합해 ‘소리(sonic)’로 역사를 재해석한 점이 참신하다고 평가받았다.
코로나19 대유행 여파로 3년 만에 열린 올해 비엔날레는 본전시 초청 작가 58개국 213명 중 90%(192명)를 여성으로 선발했을 때부터 대대적인 변화가 예고됐다. 특히 본전시 작가의 절반가량이 이미 작고했다는 점도 이례적이었다. 평생공로상(황금사자상)도 여성 거장 2인 품에 안겼다. 칠레 산티아고 출신 세실리아 비쿠냐(72)와 독일 카타리나 프리치(66)가 공동수상했다. 프리치는 카스텔로 공원의 본전시 중앙관 입구에 늙은 암코끼리상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해 원시 모계사회를 환기시켰다. 이화령 바라캇컨템퍼러리 디렉터는 “이제라도 세계적인 예술의 장이 유연해진 지점은 충분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정준모 평론가는 “본전시는 근대 이후 여성 미술사의 맥락을 정리하듯 박물관학적인 전시로 구성됐지만 1980~1995년생 MZ세대가 60명에 달하고, 1965~1979년생 중견작가들도 30명에 달해 신진작가에게는 도약대를, 미술사에서 잊힌 작가들에게는 재활의 기회를 주는 비엔날레의 책무를 성실하고 균형 있게 반영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작가에게 주어지는 은사자상은 레바논계 미국 남성 작가 알리 체리(46)가 받았다. 본전시에서는 콜롬비아의 델시 모렐로스(51)가 흙에 꿀과 계피, 카카오 가루를 섞어 만든 설치물 ‘지상낙원’으로 후각을 강타했다. 안데스의 우주론과 아마존 문화에 공감해 인간과 주변 환경 간 관계를 모성 같은 공간으로 표현했다. 미국 작가 프레셔스 오코요몬(29)도 거대한 실내 정원을 꾸며 ‘세상이 끝나기 전 지구를 바라보기’를 유도했다. 거대한 작품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상념에 젖는다.
개념미술의 대가 바바라 크루거(77)도 거대한 활자로 가득 찬 벽면 설치로 ‘YOUR VOICE(너의 목소리)’를 내라고 촉구했다. 한국 여성 작가인 이미래(34)는 짐승 내장을 연상시키는 초벌 도자조형위로 유약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기괴한 소리를 내는 기계설치로 눈길을 끌었다. 의료용 인체모형과 로봇을 늘어놓은 정금형(42) 작품은 직관적으로 의미 전달이 힘든 점이 아쉬웠다.
올해 본전시는 영국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활약한 초현실주의 홍일점 작가 리어노라 캐링턴(1917~2011)의 책 제목에서 나왔다. 세계대전을 딛고 초현실주의 등 현대미술이 번성했듯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셈이다. 베니스 페기구겐하임컬렉션에서 열리는 전시 ‘초현실주의와 마술’도 필수다. 캐링턴은 20세에 초현실주의 선구자인 45세의 막스 에른스트와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지지만 나치 폭정을 피해 에른스트가 부자 상속녀 페기 구겐하임과 결혼하자 낙심하고 멕시코로 떠났던 기구한 인물이다. 본전시처럼 인간과 동물, 기계와 뒤섞인 이미지가 가득해 조화로운 삶에 대한 희구도 엿보인다.
카스텔로 공원 국가관들 사이에 세워진 우크라이나 임시 광장.
▶총성 없는 전쟁 국가관… 우크라니아 반전 평화 메시지 압도
카스텔로 공원에 영구적인 국가관을 가진 29개국 외에도 아르세날레와 베니스 시내 곳곳에서 총 80개 국가관이 열렸다. 특히 올해는 카메룬, 네팔, 우간다 등 5개국이 처음 참가해 우간다가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올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으로 반전 평화 메시지가 강해졌다. 러시아관은 우크라니아 침공 이후 대표 작가와 큐레이터가 전시를 포기했고, 우크라이나관은 취재진으로 북적거렸다. 우크라이나 임시 광장에는 포대로 쌓은 탑 주위에 전쟁의 참상을 담은 우크라이나 작가들의 작품들이 놓여 전 세계를 향해 반전시위를 했다.
우크라니아관에서는 파블로 마코우(64)가 78개 깔대기를 삼각형 모양으로 설치해 물을 흘려 내리는 작품 ‘고갈하는 샘, 아쿠아 알타’로 인간성의 고갈을 은유했다. 또 우크라이나의 국제 예술단체 핀추크재단은 세계적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올라푸르 엘리아손, 데이미언 허스트 등이 협업한 전시를 스쿠올라 그란데 지구 특별전시관에서 펼쳤다.
벨기에관은 각국 어린이들의 천진한 노는 모습을 다양한 영상으로 한꺼번에 표현해 관람객들에게 미소를 전달했고, 프랑스관은 1960년대 식민지배서 벗어난 알제리 풍경을 재현한 공간에서 연극과 춤 등 볼거리로 유인했다.
한국관을 대표한 바라캇 전속 김윤철 작가(52) 작품 ‘GYRE(나선)’은 압도적인 이미지로 화제가 됐다. 거대한 에일리언 같은 기계가 우주의 신호를 받아 움직이는 전시장 전체가 거대한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관람객이 가득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한 영국 큐레이터는 “한국관은 대체로 기술만 앞세우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김윤철 작가의 크로마(바라캇컨템퍼러리).
▶도시 전체가 미술관… 거장 전시 줄 이어
비엔날레 기간 세계적인 거장들의 전시가 유서 깊은 궁전과 저택에서 펼쳐져 과거와 현대 예술이 조우한다. 세계적 럭셔리 브랜드 구치·생로랑 등을 보유한 프랑수아 피노 PPR 회장의 피노컬렉션을 전시하는 그라시 궁전에서 첫 여성 화가 마를렌 뒤마(69) 회고전이 뜨거운 화제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공포영화처럼 기괴한 이미지의 인물화를 통해 예의바른 사회 이면에 억압된 성적 에너지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에 냉소적 시선을 드러냈다.
독일 표현주의 거장 안젤름 키퍼(77)는 베네치아 정부 건물인 두칼레 궁전 살라델로스크루티니오(개표실) 벽에 코로나 대유행의 삶과 죽음을 압도적인 규모의 대서사시로 펼쳐 장엄한 숭고미를 극대화했다.
1577년 화재로 불탄 방이 더욱 화려하게 재건된 것을 모티브 삼아 불에 타고 남은 잿빛 풍경에 작업복과 관, 곤돌라와 쇼핑카트, 신발 등 다양한 오브제를 붙였다. 작품을 올려다보다 발견한 천장에는 화려한 금빛 장식과 틴토레토 등 르네상스 대표 화가들의 명작이 대조돼 파괴와 창조의 순환이란 주제를 강화했다.
피노컬렉션에서 전시 중인 마를린 뒤마 작품.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에서 열린 안셀름 키퍼의 전시 장면(오른쪽).
산마르코광장 올리베티 쇼룸에서는 공간과 빛을 고찰하는 루치오 폰타나(1899 ~1968)·안토니 곰리(72) 2인전도 열렸다. 이탈리아 건축 거장 카를로 스카르파(1906~1978)의 공간디자인으로 명소인 곳이 곰리의 각진 조각과 어우러져 매력을 더했다. 인근에서는 무려 60년 전 미국관 대표였던 우크라이나 출신 여성 조각가 루이스 네벨슨(1899~1988)의 전시가 빛났다. 목조가구 조각이나 나무조각 등을 모아 나무상자 속에 맞추어 빛깔을 칠한 어셈블리지(아상블라주)가 지속가능성이 화두인 시대에 재조명되고 있다.
전시장도 유명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리노베이션으로 거듭나 볼 만하다. 인도계 영국 조각가 애니시 커푸어(68)는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팔라조 만프린 2곳에서 반타블랙을 사용한 기하학적 탐구와 피의 이미지로 물질과 존재 간 관계를 파고드는 초대형 작품을 펼쳤다.
14세기 성당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에서 스위스 출신 작가 우고 론디노네(57)가 펼친 ‘burn shine fly’ 전시가 인상적이었다. 프레스코화를 배경으로 하늘과 구름 색을 칠한 인간 조각 7명이 날아다니듯 떠있는 풍경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현지에서는 폴린 쿠르니에 자르뎅(42)이 주데카섬 여성 전용 감옥인 ‘카사 디 르클루조네 페미닐’ 수감자들과 만든 푸른 벽화와 영상 설치작이 입소문 났다.
한국의 거장들도 베니스의 고풍스런 건축물과 조화를 이룬 전시로 주목받았다. 병행전시로 선발된 하종현·전광영은 물론 그룹전에 참여한 박서보, 이건용까지 역대 최대 규모로 한국 작가들이 참여했다. 영국에서 활동해온 독립큐레이터 김승민은 “코로나 대유행 이후 작가들의 작품 세계가 극적으로 변화한 것을 보고 삶을 치유하는 예술적 감수성의 힘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비엔날레 관람 팁
미국 프랑스 영국 등 국가관은 물론 병행전시도 기존 관광지인 궁이나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경우 대기줄이 길게 형성되는 편이다. 개장 전 줄을 서거나 페기구겐하임컬렉션처럼 사전에 예약해야 방문 가능한 곳도 있다. 대부분 비엔날레가 끝나는 11월까지 열리지만 일부 전시는 여름에 끝나기도 한다. 일부 수집가들이나 미술 관계자들은 6월 개막하는 독일의 카셀 도쿠멘타·스위스 아트바젤과 연계한 일정을 짜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