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국내 미술 시장은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다. 아트페어와 갤러리는 물론 옥션을 통한 미술품 거래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국내 주얼리 시장에서 옥션은 여전히 생소하다. 유럽과 미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까운 홍콩에서도 주얼리 옥션은 이미 활성화된 유통방식으로 자리 잡았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사실 적절한 유지 관리만 따라준다면 주얼리는 감가가 낮고, 부피도 작아서 보관과 이동이 용이하다. 중고와 재판매에 최적화된 품목이란 이야기다. 게다가 정보의 공개와 투명성이 핵심인 옥션은 거래의 양성화를 지향한다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고가의 주얼리는 예술품이나 투자 대상이 아닌 사치성 소비재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문 인력과 인프라 부족, 공신력 있는 가치평가 체계도 미흡해 옥션 대중화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국내의 아쉬운 상황은 잠시 접어두고, 2022년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최상위 경매인 ‘매그니피슨트 주얼스(Magnificent Jewels) 경매’를 복기하며 2023년을 전망해보고자 한다. 국내 시장은 다이아몬드에 집중되어 있지만, 매그니피슨트 주얼스는 핑크 다이아몬드부터 스피넬, 디자이너의 작품까지 훨씬 폭넓은 구매 취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크리스티 주얼리의 수장인 라훌 카다키아는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시장 상황을 감안할 때 투자위험 회피(Hedge) 목적으로 적합한 투자 상품”이라며 매그니피슨트 주얼스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희귀하고 아름다운 최상급 보석으로 빛나는 피라미드의 꼭짓점, 이 시대 고액 자산가들의 주얼리 투자 세계를 들여다본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부의 불평등 심화는 주얼리 소비의 양극화로 이어졌다. 팬데믹 초반 해외여행에 제동이 걸리면서 부호들의 자본은 고가의 주얼리로 향했고,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압박 속에 희소성 높은 럭셔리 주얼리로 포트폴리오를 쏙쏙 채워나갔다.
2022년 매그니피슨트 주얼스 경매에서는 뉴욕, 홍콩, 제네바를 통틀어 ‘까르띠에’ ‘해리 윈스턴’ ‘반클리프 아펠’ 3대 메이저 브랜드와 주얼리 아티스트 ‘JAR(Joel Arthur Rosenthal)’가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까르띠에는 작년 11월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에서 각각 카슈미르 사파이어 반지와 미얀마 사파이어 반지로 낙찰가 톱5 안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시장에선 벨에포크(1890~1914년), 아르누보(1890~1910년), 아르데코(1915~1939년) 등 특정한 시대의 주얼리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르데코 주얼리는 이미 수백만달러대에 진입한 지 오래고, 디자인이나 보석의 품질, 소재의 유연성 면에서도 주얼리 역사상 최고의 시대로 꼽힌다. 인기는 높고 물량은 한정되어 있으니, 요즘은 점차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다. 아르데코 시대에 관심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특히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부쉐론’ 등 방돔 광장 보석상들의 제품을 눈여겨볼 것을 권한다.
한편 1970~1980년대를 빛낸 다채로운 컬러로 착용성이 높은 주얼리도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1935~1950년대 레트로 시대의 제품도 거래가 꾸준한 편이다. 빈티지 주얼리 디자이너 중에는 ‘벨페론(Belperron)’ ‘스털레(Sterle)’ ‘베르두라(Verdura)’에 이어 최근 ‘알렉상드르 레자(Alexandre Reza)’가 선전하고 있다.
작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다양한 산업에서 원자재 공급 가격이 폭등했다. 다이아몬드 시장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곧 러시아산 원석의 공급이 중단되었고 서방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로 공급량 부족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더해 미국의 금리 인상과 높은 달러 환율까지 겹치면서 작년 한 해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나마 최근 들어 달러 강세의 추세가 주춤하면서 가격의 하향 안정세를 찾아가는 양상이지만 이런 가격 변동은 뚜렷한 양극화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다이아몬드 품목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이엔드 시장에서는 타입 투에이(Type IIa·미량의 질소도 없이 탄소만으로 구성) D 컬러, IF 투명도 이상 빅 캐럿에 대한 선호도가 꾸준히 나타났다. 소더비 옥션만 해도 지난 11월 제네바 경매의 낙찰가 1, 2위 모두 타입 투에이 다이아몬드가 차지했다.
경기가 둔화될수록 컬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다는 소비자 심리 연구가 있다. 이를 입증하듯 지난 한 해 컬러 다이아몬드는 컬렉터들의 뜨거운 구애를 받았다. 무색 다이아몬드와는 달리 1캐럿조차 귀한 핑크 다이아몬드와 블루 다이아몬드는 극도로 공급이 제한되어 모든 매그니피슨트 주얼스 경매에서 낙찰가 상위에 랭크되었다.
지난 10월 소더비 홍콩에서 11.15캐럿, 팬시 비비드 핑크, 인터널리 플로리스(IF) 투명도의 ‘윌리엄슨 핑크 스타’는 5800만달러에 낙찰되며 두 개의 신기록을 경신했다. 이에 질세라 다음 달, 크리스티 제네바에서는 18.18캐럿, 팬시 비비드 핑크, VVS2 투명도의 ‘포춘 핑크’를 앞세워 28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핑크와 블루에 비하면 비교적 공급량이 풍부한 옐로는 수십 캐럿의 다이아몬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지난 12월 소더비 뉴욕에 나와 1240만달러에 낙찰된 ‘골든 카나리’는 303.10캐럿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IF 다이아몬드로 기록된 바 있다. 크리스티는 5월 제네바 경매에서 205.07캐럿 ‘더 레드 크로스’ 다이아몬드로 143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예전 같으면 잘게 부서져서 나올 원석들이 기술의 발전으로 온전하게 채굴될 확률이 높아지면서 앞으로는 더 큰 사이즈의 컬러 다이아몬드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핑크, 블루, 옐로 다이아몬드의 도매 시세를 추적하고 분석하는 팬시 컬러 다이아몬드 인덱스(FCDI)에 따르면 컬러 다이아몬드의 시장 가치는 최근 연간 9~12%의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2022년 11월 현재, 지난 12개월간 옐로 다이아몬드 가격은 모든 사이즈와 컬러 등급에서 평균 3.4% 상승했고 핑크는 3.7%, 블루는 1.8%를 기록했다.
선명한 색, 아름다움, 희소성이 생명인 컬러 스톤. 현재 이 시장의 블루칩은 ‘비가열 카슈미르 사파이어’ ‘비가열 미얀마 루비’ ‘노-오일 콜롬비아 에메랄드’다. 여기에 미얀마와 스리랑카의 비가열 사파이어가 가세하고 있는 모양새다. 즉 소위 ‘전통 귀보석’ 중에 처리되지 않은 비비드한 색이 대세라고 볼 수 있다. 지난 11월 소더비에서 20.16캐럿 미얀마 사파이어가 캐럿당 13만7525달러로 기존의 기록을 갈아 치웠고, 20.58캐럿 미얀마 핑크 사파이어도 캐럿당 가격에서 역대 기록을 경신했다.
하지만 빅3의 수급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대안으로 거론되는 ‘잠비아 에메랄드’ ‘모잠비크 루비’ ‘마다가스카르 사파이어’의 잠재 가치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는 전통 블루칩과 격차가 크고 소비자들의 이해와 수용에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최상급은 럭셔리 브랜드에서 매년 발표하는 하이 주얼리의 주역을 꿰차면서 점차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한편 최근 들어 색다른 변화의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스피넬’ ‘파라이바 투르말린’ ‘임페리얼 토파즈’ 등 희소가치가 높은 파인 젬스톤들이 아시아 시장의 수요 증가로 매출이 점차 상승하고 있는 추세다. 지난 5월 소더비 제네바 경매에서 ‘부들스(Boodle’s)’의 파라이바 투르말린 귀걸이는 추정가의 7배가 넘는 가격에, 반지는 추정가의 2.6배가 넘는 가격에 팔렸다.
스피넬 또한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로 가격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보석이다. 오랫동안 루비와 혼동될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색으로 유명하지만 최상급 루비를 대체하는 경쟁 구도가 아니라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파인 젬스톤들은 희소성을 바탕으로 선명한 컬러와 사이즈가 가치 평가의 척도가 된다.
2023년 현재 동시대 디자이너 주얼리 시장에서는 ‘JAR’가 단연 원톱이다. 최상급 젬스톤, 정체성이 뚜렷한 독창적인 디자인, 극소량 제작이라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JAR는 수십 년간 컬렉터들의 욕망을 자극해왔다. 아시아권에서는 홍콩의 ‘에드먼드 친(Edmond Chin)’과 ‘월리스 챈(Wallce Chan)’, 대만의 ‘신디 차오(Cindy Chao)’, 인도의 ‘비렌 바갓(Viren Bhagat)’이 블루칩 디자이너군에 랭크되어 있고, 독일의 ‘헤멀레(Hemmerle)’와 뉴욕의 ‘타팽(Taffin)’도 활약 중이다.
이 시장에서는 최상급 젬스톤은 기본이고 독창적인 스토리와 디자인, 소재에 대한 탐구 정신이 필수다. JAR는 일찍이 최상급 컬러 스톤을 티타늄과 알루미늄에 세팅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월리스 챈과 에드먼드 친도 비전형적인 소재를 하이 주얼리에 접목시킨 선구자로 명성을 쌓았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디지털 소비에 가속이 붙으면서 옥션 회사들도 온라인 경매에 집중하고 있다. 소더비는 2023년 1월 18일 영국 왕실의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착용했던 1920년대 자수정 목걸이를 온라인 경매에 올렸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주얼리 컬렉터 또한 온라인 고가 거래에 익숙한 젊은 층으로 대거 확대되었다. 디지털로 무장하며 문화 생태계의 새로운 중심이 된 밀레니얼 컬렉터들은 기성세대를 답습하지 않고 ‘다이아몬드에 덜 집중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각종 컬러 스톤과 동시대 주얼리 디자이너에도 주목하는 모습이다.
경제대국 미국의 기준금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경신하며 통화 긴축발 경기 침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또 코로나 시대의 부산물인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초래한 불황의 암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불안한 국제정세의 지속, ‘위드코로나’로 그간 억눌렸던 해외여행의 재개는 주얼리 시장의 성장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최상급 보석과 타임리스 디자인, 장인 정신이 돋보이는 하이엔드 주얼리는 당분간 굳건할 전망이다. 역대 최고 호황을 누린 미술 시장에 비하면 주얼리는 아직도, 목마르다.
윤성원 주얼리 칼럼니스트·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