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20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찾아 ‘반도체 동맹’ 의지를 밝혔다. 두 정상은 이날 방명록 대신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반의 3나노 반도체 웨이퍼(얇고 둥근 실리콘 판)에 서명했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 있어서 핵심 화두는 한 장의 웨이퍼(원형의 반도체 기판)로 얼마나 많은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느냐다. 작은 면적에 더 많은 회로를 그릴 수 있으면, 반도체 크기를 줄이면서도 성능은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을 누르고 3년 만에 글로벌 매출 1위 자리를 탈환했다. 하지만 최근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에선 업계 1위인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의 시장점유율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실제 삼성전자는 글로벌 파운드리 1위 기업인 대만의 TSMC와의 시장 지배력을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1년 4분기 기준 TSMC는 글로벌 점유율 52.1%로 1위, 삼성전자는 18.3%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파운드리 점유율 1위인 TSMC는 총매출에서는 삼성전자, 인텔에 이어 3위에 랭크됐지만 영업이익은 선두를 달렸다.
TSMC의 올 1분기 매출액은 4910억8000만대만달러(약 21조100억원), 영업이익은 2237억9000만대만달러(약 9조5800억원)다. 매출액은 전 분기 대비 12%, 전년 동기 대비 36%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전 분기 대비 22%, 전년 동기 대비 49% 증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향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삼성, 미세공정서 한발 앞서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앞서 3나노미터(㎚·1나노=10억분의 1m) 공정이 적용된 최첨단 반도체 웨이퍼를 세계 최초로 선보이면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이 요동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 대만 TSMC에 맞설 삼성의 ‘비밀 병기’라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은 GAA 기반 3나노 1세대 반도체를 5~6월 중 양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GAA를 앞세워 2030년까지 메모리뿐 아니라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겠다는 ‘시스템반도체 2030비전’을 선언한 바 있다.
경쟁자인 TSMC 추격을 위해 171조원을 쏟아부을 예정으로, 첨단 파운드리 공정 연구개발과 생산라인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3나노 반도체는 주로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등 고성능과 저전력을 요구하는 차세대 반도체에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만큼 부가가치가 높다. 매번 기술 공정에서 TSMC를 쫓아가던 삼성이 이번에는 신기술로 제품 양산에 들어가는 의미도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GAA 공정 양산은 삼성이 추격자에서 벗어나 사실상 시장 선도자가 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증권가에선 TSMC가 올 하반기 핀펫 기반의 3나노 반도체를 선보일 것으로 전망한다.
이제까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1위 TSMC를 2위 삼성전자가 추격하는 구도였다면 이번에 3나노 개발에서 TSMC보다 기술력이 앞선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김동원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삼성 평택 반도체 공장 방문으로 세계 최대 반도체 팹(fab)인 평택 공장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며 “평택 P3 공장에서 세계 최초로 3나노미터 파운드리 GAA 1세대 생산라인 가동이 시작돼 대만 TSMC와 기술 선도 경쟁이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TSMC, 압도적 투자계획
TSMC는 ‘압도적인 투자’ 계획을 내놓은 상태다. 실제로 올해에만 400억~440억달러(약 50조9200억~56조100억원) 규모의 설비투자 계획을 밝혔는데, 이는 지난해(300억달러)보다 최대 47%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올해 삼성전자의 설비투자 규모가 12조~16조원 수준으로 점쳐지는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달러(약 15조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도 새 반도체 공장을 세우고 있다. 최근에는 싱가포르에 수십억달러 규모의 새로운 반도체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업계에서는 TSMC가 3나노보다 앞선 1.4나노 공정 개발에 서둘러 착수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대만 언론 등에 따르면 TSMC는 최근 3㎚ 공정 개발진을 1.4㎚ 공정 개발로 전환하고, 6월부터 정식 운영에 들어간다. TSMC는 올해 하반기 3㎚ 공정 양산을 계획하고 있는데, 양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첨단공정 개발에 나선 것이다.
TSMC를 압박하는 건 삼성전자뿐만이 아니다. 인텔 역시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하면서 첨단공정 도입을 선언하고 2024년 하반기 1.8㎚ 공정 반도체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현재 인텔은 ‘인텔7’이라고 부르는 7㎚ 공정 양산 안정화에 들어갔다. 또 올해 하반기에는 인텔4(4㎚ 공정) 반도체도 생산하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TSMC 계획은 순조롭게 이뤄질 가능성이 적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5㎚ 이하 미세공정에서 회로 폭을 1㎚ 줄이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해서다. 2㎚ 이후 공정들이 소수점으로 진행되는 건 이 때문이다.
모리스 장 대만 TSMC 회장. <사진 연합뉴스>
▶삼성, 우량 고객사 확보가 관건
물론 미세공정에서 앞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당장 삼성은 GAA 공정 자체가 매우 난도가 높아 수율(합격품 비율) 확보와 안정화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 동행한 퀄컴은 앞서 4나노 물량 일부를 삼성 파운드리에 맡겼다가 TSMC로 옮긴 적이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 파운드리의 낮은 수율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시장에선 삼성의 3나노 이전 세대 공정 기술 성숙도를 낮게 평가한다.
특히 4나노의 경우 수율(양품 비율) 개선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반면 TSMC의 공정 기술력은 세계 1위로 꼽힌다. 특히 파운드리 수율(전체 생산품 중 양품 비율)이 삼성전자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이유로 TSMC와 삼성전자의 시장 점유율 차이가 벌어질 것으로 내다본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매출)은 56%, 삼성전자는 16%로 예상된다. 지난해와 비교했을 때 TSMC는 3%p 증가, 삼성전자는 2%p 감소한 수치다.
파운드리는 서비스업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객사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고객사가 삼성 파운드리 품질에 의구심을 갖게 되면 첨단 공정 전환과 별개로 추가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삼성으로선 애플이나 엔비디아, 퀄컴 같은 메이저 업체를 고객으로 확보해야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3나노 공정 제품을 공급하는 곳은 지명도가 낮은 업체로 알고 있다”면서 “삼성전자가 3나노 공정의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하면 TSMC와의 격차를 줄일 가능성도 있지만 TSMC가 이미 미국 팹리스(설계업체)들로부터 많은 수주를 해놓은 상태여서 단기간에 격차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 미국은 세계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톱10 중 6곳을 보유한 ‘설계 강국’이자, 한국 반도체의 핵심 고객이다. 이 설계 기술이 바탕이 되는 반도체 위탁생산 일감은 TSMC에 대부분 쏠려있다.
하지만 업계에선 이번 한미 정상의 삼성 방문과 3나노 공정 공개는 삼성이 미국의 팹리스 업체를 향해 ‘최신 반도체가 필요할 때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반도체 동맹을 바탕으로 TSMC에 쏠린 미국 고객사들을 유치해 삼성 파운드리 사업을 키워야 한다”며 “이번 방문에 파운드리 업계 최고 고객인 퀄컴이 동행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5월 20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 조만간 양산에 돌입하는 차세대 GAA 기반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에 사인하고 있다. <사진 연합 뉴스>
‘반도체 장비와 원료의 안정적 확보’도 필요하다. 미국은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같은 핵심 장비 기업을 갖고 있다. ‘세계 톱 장비 업체’로 꼽히는 네덜란드 ASML도 미국 기술을 바탕으로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등 첨단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미국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삼성전자가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M&A)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종희 삼성전자 디바이스 경험(DX) 부문장 겸 대표이사 부회장 직속으로 신사업 태스크포스(TF)가 꾸려졌는데 M&A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한 부회장은 지난 1월 “여러 사업 분야에서 M&A를 검토하고 있다”며 “조만간 좋은 소식이 나올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삼성전자 인사도 M&A에 초점이 맞춰졌다.
삼성전자는 최근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출신 반도체 업계 M&A 전문가인 마코 치사리를 영입해 미국 반도체혁신센터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BoA 산하 메릴린치에서 인피니언의 사이프러스 인수, AMS의 오스람 인수 등을 성사시켰고 미국 파운드리 기업 글로벌파운드리에서는 M&A 책임자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