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베트남 호찌민을 처음 방문했던 것은 1994년 봄이었다. 베트남의 산업 현황과 글로벌 경쟁력을 분석하기 위해서 4일간 방문했던 당시에는 호찌민의 잠재적 가능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교통, 전기, 교육과 같은 기초적인 인프라가 너무나 낙후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돌이켜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하루 15달러의 비용으로 영어 통역을 해주었던 젊은 인재가 필자가 공식적인 통역비와는 별도로 주었던 40달러의 수고비를 끝내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던 일이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만난 베트남 전문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정직성과 자존감 때문에 아마 40달러라는 금액이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금액이었기 때문에 거절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처럼 20년 전의 베트남은 정직하고 부지런한 인력을 제외하면 별다르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후 필자는 매년 한두 차례씩 베트남을 방문했고, 올해도 1주일간 호찌민을 방문해서 한국에서 진출한 기업 및 현지 기업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번 방문처럼 베트남이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적은 없었다. 필자는 무엇 때문에 베트남에서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생산거점 넘어 소비시장으로 탈바꿈
외면적으로는 베트남의 잠재적 가능성이 이제 본격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으로 베트남의 1인당 국내 총생산액은 2200달러 정도인데, 단순히 비교하면 1983년 한국의 1인당 국내 총생산액과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경제적 관점에서 베트남은 한국 대비 약 30년 이상 뒤처져 있는 시장이다. 하지만, 베트남의 1억 인구를 고려하고, 베트남에 진출하는 외국 기업들의 투자금액 및 숫자, 그리고 경제력이 있는 상위 계층의 소비력을 감안한 상대적 시장 매력도를 생각하면 베트남은 현재 한국의 1990년대 초반 정도까지 발전한 상태다. 물론 베트남이 향후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최첨단 산업에 필요한 지적 역량을 갖출 수 있을지, 경제적 투명성과 정치적 선진화의 속도가 어떻게 달라질지 등에 대한 이슈가 남아 있지만, 2016년의 호찌민은 필자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히 달라져 있었다.
베트남의 충격은 사실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업들의 내면적 모습 때문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베트남에 진출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 중에서 필자가 항상 강조해왔던 창조적 현지화(Creative Localization)를 통하여, 베트남 시장에서 1등이 아닌 세계 시장에서 1등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베트남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 중 상당수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의 부지런한 노동력과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활용하여 세계 시장으로 수출하려는 목적이거나, 혹은 거의 1억명에 가까운 인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년 10% 가까이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 내수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목적이다.
▶한국이 ‘아시아의 스위스’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필자가 이번에 방문한 기업들은 이런 목적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베트남을 활용하여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번에 심층 취재를 위해서 방문했던 CS Wind는 풍력타워 제조 시장에서 베트남 인력들을 활용하여 세계 최고 지표와 기술력을 창조하고 있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풍력타워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총시간을 측정하는 생산성 지표에서 세계 최고는 1945년에 덴마크에서 창업한 베스타스가 보유한 850시간이었다. 하지만, CS Wind는 2013년에 이미 550시간으로 단축시켜서 세계 최고에 올랐으며, 그 이후 불과 3년 만에 해당 지표를 다시 240시간으로 단축시켰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력들 중에서 세계 최고 실력을 축적한 인재들을 캐나다와 중국 같은 해외 공장에 선생님으로 파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세실업 역시 필자가 1993년부터 경험해왔던 봉제공장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있었다.
특히, 봉제라인의 반복 생산을 기반으로 한 단위 생산성 지표는 다른 경쟁 기업들과는 거의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격차를 만들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이 아시아의 스위스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위스 역시 겨우 700만명이라는 인력과 절대적으로 부족한 영토를 가지고 1인당 국민소득 8만4000달러라는 세계 최고 부자의 나라가 되었다. 스위스가 이렇게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네슬레, 노바티스, 크레딧스위스, UBS와 같은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 중국, 유럽과 같은 거대한 시장도 없고, 인구의 절대적인 숫자 역시 턱없이 적다. 한국이 부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위스처럼 한국 기업들이 세계 최고의 경영 역량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의 나라 인재를 활용하여 남의 나라 시장에서 매출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들이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해외시장에 대한 접근 방법과 발상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베트남과 같은 시장을 단기적 관점에서 저임금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시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베트남 시장을 바라보고, 한국의 인재들이 가지고 있는 창의적 사고 역량을 활용하여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1억 가까이 되는 인구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베트남 시장이지만, 최저 임금이 매년 10% 이상 오르고 있는 이러한 시장을 생각해보면, 큰 베트남 내수시장과 저임금 노동시장만을 바라보고 시장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과거 가파른 임금상승 문제 때문에 중국에서 철수했던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조만간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베트남을 창조적 현지화 전략을 실험하는 전진기지로 활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이룬 성공을 바탕으로 제 2, 제 3의 베트남을 나날이 경쟁이 심해지는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이 진정한 부자 나라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는 이제 한국 기업들의 창조적 현지화 전략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남규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7호(2016년 04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