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30일, 한미 양국이 장기간의 관세 협상을 마무리하며 경제 파트너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미국이 8월 1일부터 부과하기로 예고했던 상호 관세 25%는 15%로 낮아지고, 자동차 및 부품에 대한 품목별 관세도 15%로 조정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협상에 대해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과 한국의 첨단 기술력이 맞물렸다고 분석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관련 브리핑에서 “우리 정부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 내에서 상호 호혜적 결과를 도출한다는 자세로 임했다”며 “추후 부과가 예고된 반도체·의약품 관세의 경우에도 다른 나라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총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협력 펀드에 대해 김 실장은 “한·미 조선협력 펀드 1500억달러가 선박 건조, 유지보수(MRO),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하며 우리 기업들의 수혜에 기반해 구체적 프로젝트에 투자될 예정”이라며 “반도체, 원전, 이차전지, 바이오 등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에 대한 대미 투자펀드도 2000억달러 조성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동 펀드의 투자 분야를 고려한다면 우리 기업이 전략적 파트너로 참여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미국 진출에 관심이 있는 우리 기업들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관세 협상) 합의를 통해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제거됐으며 우리 기업들은 주요국 대비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지난 8월 19일 대통령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진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기업과 정부가 총력 대응해 급한 불을 껐지만, 미국과 세부 조율해야 할 과제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평가했다. 강 실장은 “미국 관세 정책으로 통상 환경은 불확실성이 ‘뉴노멀’이 됐다”며 “수출을 많이 해 먹고사는 대한민국 입장에선 새로 바뀐 환경에 처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각 산업 분야의 현장 상황은 어떨까. 우선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이후 지난 8월 11일 관세청이 집계한 첫 대미 수출 실적(수출입 현황)은 14%가 넘는 낙폭을 기록했다. 미국은 지난 8월 7일부터 한국산 제품에 15%의 관세를 적용 중이다. 자동차 관세율은 25%에서 15%로 하향 조정에 합의했지만 아직 적용하지 않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8월 1~10일 수출액은 147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3% 줄었다. 주력 수출 품목은 대체로 선전했다. 반도체는 12%, 자동차 8.5%, 선박은 81.3%나 증가했다. 하지만 나머지 품목은 주저앉았다. 석유제품 19.4%, 철강제품 18.8%, 무선통신기기 4.5%, 자동차 부품 13%, 컴퓨터 주변기기 18.7%, 정밀기기 8.9%, 가전 제품 42.7%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국가별로는 중국(-10.0%), 미국(-14.2%), 유럽연합(EU·-34.8%), 일본(-20.3%)으로의 수출이 부진했다. 대신 베트남(4.1%), 대만(47.4%), 싱가포르(162.5%)로의 수출은 늘었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발 관세 충격으로 전 세계 교역이 둔화돼 수출이 줄었다”며 “반도체는 아직 관세가 0%여서 실적이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지난 8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반도체에 100% 관세를 예고했다. 한국이 EU와 같은 15%의 최혜국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 대미 수출 실적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국내 반도체 관련 기업들은 일단 주시하고 있다. 관세 협상에서 다른 경쟁국들과 동일한 대우가 논의됐지만 이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자국 반도체 산업 챙기기에 나서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난 8월 19일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반도체 관세를)200~300%까지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애플의 신규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할 땐 수입 반도체에 100% 관세를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관세를 면제받기 위해선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미국 내에 공장을 건설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기 내에 미국에 공장 건설을 약속하고 상무부에 신고한 후 감사원 감독 하에 건설을 진행하면 관세 없이 칩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에 일각에선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와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이 예정된 SK하이닉스의 관세 면제 가능성을 전망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견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나온 발언들이 행정부의 조율을 거친 게 아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확실한 건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전했다. 불확실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부진에 빠진 인텔에 대해 미국 정부의 지분 취득 논의 등이 보도되며 국내 반도체 업체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메모리 기업인 마이크론도 생산 설비가 대부분 대만과 일본에 있어 관세 부과 대상”이라며 “미국이 제품별로 개별 관세를 부과하더라도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느끼는 불이익이 해외 경쟁사들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업계에 따르면 올 1분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미국 시장 매출 비중은 각각 31.7%(별도), 72.5%(연결) 수준으로 집계됐다. 다만 이러한 수치는 계약 당사자인 고객사의 본사 소재지 기준으로, 직접 수출 비중은 이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관세 협상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역시 자동차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지난 4월부터 25%의 관세가 부과돼 손해가 컸다”며 “관세율이 15%로 낮아진다는 소식에 일단 안도하곤 있는데 최악을 피했다는 것이지 타격을 피한 건 아니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대미 수출은 지난 3월부터 5개월 연속 하락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7월 자동차산업 동향’을 살펴보면 7월 대미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4.6% 감소한 23억 2900만달러를 기록했다. 월별로 살펴보면 ▲3월 10.8%↓ ▲4월 19.6%↓ ▲5월 27.1%↓ ▲6월 16.0%↓로 집계됐다.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됐다지만 미국이 여전히 자동차 관세 25%를 유지하는 등 불확실성이 남은 영향으로 풀이된다. 반면 유럽 등 그 외 지역에선 대부분 수출이 늘었다.
완성차 업계에선 8월 25일에 미국에서 열리는 첫 한·미 정상회담을 기대하고 있다. 자동차 관세 15% 인하 시점을 얼마나 앞당길 수 있을지가 주요 쟁점이다. 앞서 영국은 지난 5월 8일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한 이후 27.5%로 부과된 자동차 품목별 관세를 15%로 낮추는 데 54일이 걸렸다. 영국의 경우를 대입하면 한국은 9월 중순 이후에나 관세율 인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시기가 늦어질수록 피해가 불가피해 정상회담을 계기로 인하 시점을 앞당길 수 있을지 주목된다. 국내 완성차 업체의 마케팅 담당자는 “아직은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미국 내 판매 가격을 동결하며 버티고 있지만 25%의 관세가 지속되면 가격 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어 대미 수출 감소가 본격화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근 트럼프 정부가 발표한 대규모 감세법(OBBA) 시행도 우리나라 완성차 업체 입장에선 큰 고비 중 하나다. 이 법안엔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기한을 기존 2032년에서 오는 9월 30일까지로 앞당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미 관세 협상 이후 조선업 분야의 양국 협력은 가속화되는 모양새다. 우선 총 3500억달러의 투자·협력 펀드 중 조선 협력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의 비중이 1500억달러로 가장 큰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 관계자는 “마스가 프로젝트가 이번 관세협상 합의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며 “트럼프 대통령도 우리나라 조선업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미국에서 선박 건조가 최대한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스가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가동을 앞두고 양국 정부는 미 해군 함정 건조 등에 한국이 참여할 수 있는 세부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의회에선 한·미 조선 협력에 장애물이 되는 규제를 완화하기 위한 논의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HD현대,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 3사도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정부와 함께 마스가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미국 군수지원함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따내는 등 물밑 작업에 나섰다. 국내에선 정부와 조선 3사가 자금을 공동 부담해 미 해군 MRO에 특화된 조선소 설립(인수 등)을 추진하고 미국 현지에 조선소 설립(인수)도 추진한다는 방안이다. 미국의 조선업은 지난해 10여 곳의 조선소에서 7척을 건조한 게 전부일 만큼 붕괴했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고작 0.1%에 불과하다. 미국이 한국과의 관세 협상 테이블에 조선업 협력을 올린 이유다.
가장 발 빠르게 성과를 낸 기업은 한화오션이다. 지난해 말 1억달러를 들여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의 건조 능력을 연간 1.5척에서 2035년 10척으로 늘릴 계획이다. HD현대는 미국 현지 조선 그룹사 에디슨슈에스트오프쇼어(ECO·Edison Chouest Offshore)와 미국 상선 건조를 위한 전략·포괄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두 회사는 2028년까지 중형급 액화천연가스(LNG) 이중연료 컨테이너선을 공동 건조한다. 삼성중공업은 LNG 생산·저장·하역설비(FLNG)를 중심으로 현지 조선소와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8월 14일 경남 거제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 열린 초대형 LNG 운반선 명명식에 참석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마스가는 미국 내 조선소 투자, 숙련 인력 양성, 공급망 재건 등 미국 조선업의 재건을 지원하고, 우리 기업의 새로운 시장 진출 기회를 창출하는 상호 ‘윈윈’ 프로젝트”라며 “정부는 마스가 프로젝트를 뒷받침하기 위해 관계기관 협의체를 조속히 구성하고 미국 측과도 수시로 협의하면서 구체적 성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철강업계는 탄식이 이어지고 있다. 철강·구리·알루미늄 관세율 50%가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2018년부터 FTA를 통해 대미 수출 무관세 쿼터를 적용받아 0%였던 관세는 올 6월부터 철강·알루미늄, 일부 파생 상품에 50%가 부과되며 ‘팔래야 팔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업계에선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게다가 지난 8월 18일부터 과세 대상에 철강·알루미늄을 사용하는 407개 파생 상품이 무더기로 추가됐다. 각 제품에 사용된 철강·알루미늄 함량엔 50% 관세를, 나머지 부분엔 한국에 대한 상호 관세 15%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이번 조치는 한·미 관세 협상 타결 뒤 시행되는 것이라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가 선제적으로 밝힌 파생상품 리스트를 살펴보면 철강과 알루미늄 소재가 사용되는 변압기, 건설기계, 트랙터, 가전제품, 화장품 등 우리 수출업계에 직접적인 타격이 될 제품들이 포함됐다. 한국무역협회는 추가 품목의 대미 수출액이 지난해 기준 총 118억 9000만달러(약 16조 470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0호 (2025년 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