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뛸 때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어떤 이들은 돈을 날렸다고 주저앉고 어떤 이들은 운 좋게 돈을 거머쥐었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
그렇다 나는 경주마다. 나이는 올해 3세로 사람으로 따지면 15세는 됐을까. 과천경마장(서울경마공원)을 질주하는 내 동족들은 모두 나와 같은 모계 혈통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영국인들은 내 조상인 영국 암말과 수말인 아라비아 바이얼리 터크(Byerley Turk), 달리 아라비안(Darley Arabian), 고돌핀 아라비안(Godolphin Arabian)을 몇 대에 걸쳐 짝 짓게 했다.
이렇게 해서 1660년 1마일(1.6㎞)을 1분 내에 주파하는 혈통이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서러브레드(Thoroughbred)’종이라고 부른다. 물론 경주마에는 내 종족 외에 아랍종, 앵글로아랍종 등 두 종이 더 있긴 하다. 하지만 수적으로 볼 때 무시할 만한 수준이다.
우수한 족보를 자랑하는 나는 작은 머리, 두툼한 가슴, 곧은 등, 기다란 다리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특히 관절이 잘 발달돼 있어 오래 움직일 수 있다고 칭찬한다.
털 색깔은 적갈색인데 다른 친구들 몇몇은 검은색이나 회색인 것도 있긴 하다. 높이는 1m60㎝에 체중은 500㎏ 전후다. 내가 한 번 박차고 돌진하면 100m를 7초 이내에 끊을 수 있다. 우사인 볼트가 9초58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니 나보다 한 수 아래인 셈이다. 오늘날 대다수 경마장에선 내 종족인 서러브레드종만 뛸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바로 우리 종족이 박진감 있기 때문이다.
경마는 혈통전쟁이다
나의 이런 우수성 때문에 사람들은 경마를 혈통전쟁이라고 부른다. 사실 내 족보만 보면 웬만한 인간들의 가문은 저리 가라다.
1791년부터 서러브레드종에 대한 혈통서가 존재하고 있는데, 나 같은 경주마로 지정되려면 부계와 모계 모두에 걸쳐 8대 조상까지 서러브레드 품종임이 입증돼야 한다. 때문에 유전자 감정은 물론 혈액형 감정 등 까다로운 검사가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경주마들은 국제혈통서위원회(ISBC)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내 어렸을 적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보면 난 태어난 지 20~30분 만에 벌떡 일어섰다. 내 모친은 11달 내내 배에서 나를 길렀다고 한다. 난 두 살 때 경주마로 등록됐는데 이때부터 경마장에 살았다. 이를 입사(入舍) 생활이라고 한다. 과천경마장에 등록돼 출전할 수 있는 내 동료 경주마들은 총 1420마리다.
마주는 485명이고 관리사는 465명이다. 또 조교사는 53명, 기수는 54명이다. 마주가 보통 3마리 말을 갖고 있는데, 마주와 관리사 수는 비슷하다. 우리를 씻겨 주고 먹여 주는 관리사 1명이 우리들 3마리를 보살피는 식이다. 반면 우리를 훈련시키는 조교사와 경마에 참전하는 기수는 1명당 26마리 꼴로 몇 안 된다.
나는 2세부터 출전했는데 보통 한 달에 한번 꼴로 경주에 참여한다. 올해 3세니까 아직 경주마로서 삶을 마감하기에는 이르다. 사람들이 내 동족들을 보고 환호하는 것은 우리가 4~5세 때다. 전성기니까.
현재 마사회에 등록돼 있고 경기에 참여할 자격을 가진 경주마는 1666두수(마리)다. 하지만 같은 경주마라도 다 같은 경주마는 아니다. 경주마에도 등급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국내산은 6등급,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외국산은 4등급이다.
이를 1군부터 6군이라고 표시한다. 1군에 속한 경주마들은 과천경마장에선 2000m를 달리고 낮은 군에 속할수록 짧은 거리를 달린다. 물론 경주마 인증은 받았지만 아직 군에 포함되지 못한 말들도 많다. 야구선수로 치면 프로 선수부터 아마, 생활인까지 있는 셈이다.
나처럼 일찍 경주마로 출전하는 것은 행운이다. 2세 때 경주마 비중은 고작 2.7%에 불과하다. 하지만 3세 경주마는 44.1%로 훌쩍 늘어난다. 4세 말도 33.0%나 된다. 경주마 세 마리 중 한 마리 꼴로 3~4세인 셈이다. 노련미는 역시 4~5세 때 발휘한다. 선배들은 보통 7~8세에 은퇴를 한다. 간혹 9~10세 선배들이 출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극히 드문 일이다. 8~9세 선배는 고작 8마리에 불과하다. 제2의 삶은 씨수말이냐 씨암말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경주에서 좋은 기록을 갖고 있으면 사람들은 경주마를 씨수말이나 씨암말로 발탁한다. 하지만 이는 극히 운이 좋은 사례일 뿐 대다수 승마용 말로 살아간다. 아니면 놀이공원에서 마차를 끌기도 한다. 불행한 것은 큰 부상을 입었을 때다. 부상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배 중 이런 운명을 거친 말 중 하나가 ‘미스터파크’다. 2007년 3월에 태어나 2012년 6월에 사망했으니 고작 다섯 해를 살았다.
미스터파크는 최다 연승기록(17연승)을 세운 말로 명성을 떨쳤다. 2010년 그랑프리 우승컵을 차지했고, 2010년과 2011년에는 2년 연속으로 부산경남경마공원 대표마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2012년 6월 경주 도중에 인대가 파열되는 불상사를 겪었다. 사고 당시 곽종수 마주는 “수술을 통해서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살게 해줄 수 없느냐”고 수의사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수의사는 “9시간이 넘는 수술시간이 관건”이라며 “결국 수술 후 3일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주는 “미안하다 미안해”를 외쳤지만, 그는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됐다. 현재 미스터파크 선배는 자신이 태어난 제주도 트리플크라운 목장에 잠들어 있다.
너무나도 비차하고 슬픈 얘기다.
서울 과천 경마장
‘노던댄서’ 암말과 하룻밤 보내는데 11억원
웃긴 것은 사람들이 말보다 말 가격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비싼 경주마라는 것은 더 잘 달려 더 많은 상금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더 잘될 수 있냐 없냐는 좋은 부모를 타고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다. 부유층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나.
핵심은 교배에 있다. 사람들이 경주마 교배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자연교배가 아닌 인공수정이나 복제로 만들어진 말은 절대 경주마가 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다만 복제마들은 승용마나 폴로경기엔 쓸 수 있다는 규정은 있다.
내 조상 중에 씨수말로서 가장 명성을 떨친 분은 ‘노던댄서(Northern Dancer, 1961~1990)’다. 1987년 암말과 하룻밤을 보내는 대가로 받는 화대(종부료)가 100만달러(약 11억원)에 달했으니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싼 정액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노던댄서가 종마로서 부상했던 데는 탁월한 마주가 있어서 가능했다. 노던댄서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윈드필드(Wind Fields) 목장에서 1961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체고가 1m60㎝밖에 안 돼 사람들은 우리 조상을 꼬마라고 불렀다. 목장주 테일러(E.P. Taylor)는 노던댄서를 포함해 48마리 망아지를 경매시장에 내놓았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고 결국 목장주가 직접 훈련을 시켜가며 경주마로 길러주셨다더라. 내 조상 노던댄서는 1963년부터 1964년까지 2년간 통산 18전 14승을 거두며 58만달러를 벌어들였다.
그 후 1965년부터 캐나다 오샤와(Oshawa) 목장에서 씨수말로서 제2의 인생을 사셨다. 노던댄서는 사실 경주마보다 종마로서 족적을 남기신 셈이다.
노던댄서 조부는 니진스키(Nijinsky), 댄지그(Danzig), 스톰버드(Storm Bird), 더 민스트렐(The Minstrel) 등 명마를 포함해 총 635두 자손을 낳으셨고 그중 511두가 경주마가 되셨으며 410두가 우승마로 입지를 다지셨다.
그의 피를 직간접적으로 받는 경주마가 너무 많아 현재 전 세계 서러브레드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사람들이 씨암말보다 씨수말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은 경제성 때문이다. 암말은 고작해야 가임기간이 3세부터 16세이니 많아봤자 10마리를 넘기 힘들지만, 수말은 무제한이니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종마에서 나왔다고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보통 혈통이 좋은 말들은 우리나라에서 4000만~5000만원을 받을 수 있지만, 급이 떨어지면 400만~500만원에 팔린다고 마주들은 푸념한다. 일반적인 가격대는 2000만~3000만원이라고 한다.
그중 가장 값비싼 경주마로 대접 받았던 선배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칼리드 압둘라 왕자가 보유한 프랭클(Frankel)이었다. 2011년 영국 미디어인 가디언, 데일리 메일, 맨체스터 이브닝뉴스 등은 프랭클을 경마계의 우사인 볼트로 칭했다.
현재 5살인데, 당시 가격이 1억파운드(1693억원)에 달했다고 하더라. 당시 영국 유력 마필 중계소인 맥케이 블러드스탁은 “프랭클은 영국 최대 경마 대회에서 연승을 이어가고 있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상승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때 그 선배가 벌어들인 상금만 80만5000파운드(13억원)에 달했고 종부료만 회당 10만파운드(1억6000만원)였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선 마주들이 이 정도 가격은 쳐다볼 수도 없다고 푸념한다. 대한민국 경마사상 가장 값비싼 경주마는 2억9000만원에 낙찰됐었다.
그것도 2013년이다. 그 이유 역시 혈통이었다. 앞에도 말했지만 17연승을 기록한 미스터파크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부친은 엑톤파크, 모친은 미스엔텍사스였다. 부친은 미스터파크, 금비, 미스엑톤 등 스타 명마를 줄줄이 낳은 덕분에 교배료만 회당 700만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 동족 중 한 마리가 벌어들이는 상금은 얼마나 될까. 1993년부터 현재까지 상금을 가장 많이 획득한 경주마는 터프원으로 14억7874만원에 달한다. 이어 지금이순간이 11억8347만원, 탑포인트가 11억7010만원이었다. 특히 터프원은 26회 출전해 19번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우승을 하면 사람들은 기뻐한다. 이를 두고 마주들은 오르가슴과 비슷하다고 하더라.
상금은 마주가 일단 받아 이를 기수와 관리인이 적정 지분으로 나눠 갖는 구조다. 우승은 물론 첫 테이프를 끊는 말이다. 첫 번째로 들어온다고 해서 이를 일착이라고 하는데, 일착을 하면 적게는 몇백만원 많게는 3억7800만원(대통령배 경주)을 마주가 벌 수 있다고 한다.
현재 1등 마주는 9마리를 보유하면서 통상 상금 64억7900만원을 벌어들인 어떤 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이런 투자수익률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마주 중 40%는 1년 내내 일착을 못하는 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사료 값과 관리비로 매달 130만원이 들어가니, 1년이면 1500만원이나 써야 한다. 말 두 마리를 갖고 있는 마주가 만약 일 년 동안 말들이 1착을 못하게 되면 일반적인 샐러리맨 연봉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다.
그래서 평생 우승을 못하는 우리 동족을 가리켜 사람들은 변마(便馬)라고 조롱한다. 똥말이라는 뜻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1174년 헨리 2세 경마를 만들다
난 언제나 이런 고민을 한다. 나는 왜 달리고 있을까. 경마장을 달리다 보면 문뜩 드는 생각이다. 경마(Horse Racing)란 용어는 1174년 영국의 헨리 2세 때 스미스필드(Smithfield)에서 개최된 경주에서 처음 쓰였다고 한다.
현대 경마는 1780년 영국에서 더비(Derby)가 창설되면서부터라고 하는데 이후 호주 미국 등으로 점차 확산됐다. 처음에는 귀족들이 말의 품종 개량을 위한 취미로 했지만 지금은 대중적인 오락으로 정착했다. 사실 우리 종족은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경마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은 왕실이 대대로 마주로서 참여했다. 왕실 소유 로열 에스코트 경마장에서 열리는 에스코트 레이스는 영국 왕실이 주최하는 경기라고 한다. 경마가 열리는 나흘 동안 여왕님과 왕실 가족들이 마차로 장내를 행진해 준다. 한때 엘리자베스 2세는 기수로 직접 경마에 출전할 정도로 애착이 강하셨다.
미국에선 트리플 크라운 경주가 있다. 켄터키더비,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 벨몬트 스테이크스 경주가 그것이다.
이 모두를 우승하면 트리플 크라운을 거머쥐었다고 언론에선 호들갑이다. 또 호주에선 1861년부터 멜버른컵을 진행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거른 적이 없을 정도로 인기다. 매년 11월 첫째 주 화요일에 멜버른 플레밍턴 경마장에서 열리는데, 대회 당일에는 10만~15만명에 달하는 관객이 몰려들 정도다.
두바이 월드컵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마대회로 꼽힌다. 1996년 아랍에미리트의 왕자이자 국방부 장관인 셰이크 모하메드가 창설한 대회다. 짧은 역사에도 유명해진 까닭은 총상금이 600만달러로 단일 경주로는 세계에서 상금이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