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확산이 가속화되면서 데이터센터 신·증설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AI 반도체와 서버 수요가 급증하며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가격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주가가 급등하고 있는 반도체와 소재·부품·장비주들이 글로벌 증시 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AI랠리는 지난해 HBM 중심으로 한 AI서버 수요가 이끌었는데 올해 들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AI 서버에 이어 일반 서버로까지 AI 수요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김록호 하나증권 연구원은 “2017~2018년에 클라우드 서버데이터센터 투자가 활발했는데, 당시에 탑재되었던 메모리 사용 연수가 7~8년 경과하며 교체 수요가 발생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추론 AI의 본격화 및 다변화로 인해 고용량화 추세가 겹치며 메모리 수요의 증가를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덕분에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삼성전자까지 주가가 강한 상승세를 타면서 코스피 랠리가 시작됐다.
일본 소프트뱅크와 오픈AI가 손잡고 AI 인프라스트럭처를 대대적으로 구축하는 이른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두 배 이상 더 필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 글로벌 주문형 반도체(ASIC) 1위 업체인 브로드컴이 오픈AI로부터 100억달러 규모 반도체 주문을 수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대 월 90만장가량 D램을 공급하기로 오픈AI와 구매의향서(LOI)를 체결하면서 두 회사의 실적 기대감은 더 높아졌다.
오픈AI는 세계 반도체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한 수준을 넘어 시장 자체를 스스로 창출하고 있다. 오픈AI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엔비디아 GPU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칩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HBM뿐 아니라 GDDR7, LPDD R5x, eSSD 등 고성능 AI 메모리 수요 역시 동반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AI 시장 확대 국면에서 HBM 시장 지배력과 범용 메모리 생산능력(캐파)이 곧 기업 경쟁력에 직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스위스 UBS는 HBM시장의 올해 성장률을 전년 대비 96%, 내년은 55%로 각각 늘려 잡았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의 80%를 엔비디아가 점유하고 있어 가격 결정력과 물량 배분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며 “일부에서는 내년 HBM3E 경쟁 심화로 가격 하락 우려를 제기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전략적 파트너로 참여함에 따라 이러한 우려는 불식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또 “오픈AI가 월 90만장 규모의 고성능 D램 생산을 요구하고 있어 2026년부터 HBM 수요가 엔비디아 중심에서 미국 빅테크 기업들로 확대될 전망”이라며 “따라서 내년 HBM 가격 하락 우려는 기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단기적으로는 강력한 수요에 힘입어 D램과 낸드 현물가격 상승세가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PC 생산비용 중 D램 비중이 현재 7%에 달해 역사적 평균(4%)을 상회하고 있어, 가격 급등이 장기화되거나 관세 부과가 시작될 경우 수요 둔화 우려도 제기된다. 낸드 시장도 감산 효과와 대용량 HDD 부족으로 서버용 eSSD 수요가 늘면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내년(2026년) 낸드 수요 증가율은 13.8%, 생산 증가율은 14%로 만성적인 공급과잉 현상이 해소될 전망이다.
이미 9월 한 차례 오른 주가는 10월 삼성전자가 3분기 ‘어닝서프라이즈’를 발표하면서 또다시 고공행진하고 있다. 증권가 역시 목표주가를 계속 올리고 있다. KB증권이 13만원을 제시한 것을 비롯해 미래에셋증권, 키움증권, 신영증권도 모두 12만원대 목표주가를 제시했다.
월가 투자은행(IB) 메릴린치 역시 삼성전자 목표가를 11만원에서 13만원으로 올렸다. 메릴린치는 내년 주당순이익(EPS)이 13%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레거시 메모리 가격 회복,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점유율 회복, 파운드리 손실 감소 등을 감안해 삼성전자 목표가를 9만 1600원에서 10만 9000원으로 19% 높여 잡았다.
송명섭 iM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HBM4 시장 진입에 성공할 경우 PBR(주가순자산비율)은 현재 1.2배에서 과거 수준인 1.5배로 회복될 수 있다”며 “이 경우 FY26 기준 주당순자산가치(BPS)를 적용하면 목표주가는 10만 6000원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경기 회복이 동반될 경우 과거 고점 수준인 2배를 적용해 14만원까지 상승 여력도 있다”고 내다봤다.
반도체ETF의 수익률 역시 급등하고 있다. KODEX 반도체 ETF는 10월 17일 기준 1개월 수익률이 25%, 3개월 수익률은 45%, 올해 수익률은 88%다.
삼성전자보다 오름폭이 더 컸던 SK하이닉스의 편입비중이 큰 덕에 일본이나 중국 반도체 ETF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통상적으로 반도체 랠리에선 변동성이 높은 소재·부품·장비의 주가도 뛴다. SOL AI반도체소부장 수익률도 3개월 32%, 올들어 68%를 기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 3분기 말부터 본격적인 상승세가 시작됐다면 중국 반도체는 이보다 빠른 2분기부터 주가에 시동이 걸렸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중국에 대해서 반도체 수출규제를 한 것이 오히려 중국 반도체 기술 자립으로 이어지는 반사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중국 정부의 AI와 반도체 지원책은 빠른 반도체 자립을 목표로 한다. 중국 정부는 지난 8월 AI 기술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공식 지정했다. 2027년까지 AI 단말기와 지능형 소프트웨어 보급률을 70% 이상, 2030년에는 90% 이상으로 확대하고, 2035년까지 전면적인 ‘스마트 사회’로 전환한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데이터, 컴퓨팅 파워, 오픈소스, 보안 등 8대 기반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다. 특히 ‘컴퓨팅 파워’를 독립된 핵심 인프라로 명시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정책적 위상도 기존 부품 공급자에서 ‘국가 디지털 생산력의 핵심’으로 격상됐다. 이에 막대한 개발비 부담을 이겨내며 적자 탈출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AI 가속기 기업 캠브리콘은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대비 4300% 급증하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자율주행 칩 업체 호라이즌 로보틱스도 중국 ADAS(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 시장 점유율 46%, 고급 자율주행 칩시장 32%를 기록했다.
박수진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캠브리콘과 호라이즌 로보틱스가 예상치를 크게 웃도는 실적을 기록하며 중국 AI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며 “반면 엔비디아는 중국 시장 점유율 하락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는 구조적 전환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기술 규제가 오히려 중국 내 기술 독립과 생태계 자립을 자극하고 있어 ‘기술 규제의 역설’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중국 반도체 관련 상장지수펀드(ETF)인 ‘TIGER 차이나반도체 FACTSET’은 최근 석 달간 40% 상승했다. 10월 들어 주가가 조정되고 있지만 올해 수익률로 봐도 25% 수준이다.
이호년 미래에셋자산운용 ETF운용 1팀장은 “미·중 기술 갈등 이후 엔비디아 공급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중국 내수 중심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며 “정부의 정책 지원이 이어질 경우 기술력 향상과 매출 가시화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재평가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중국에서는 SMIC 등 파운드리 뿐 아니라 나우라, 몬타지테크놀로지 등 장비업체와 설계기업 주가가 일제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캠브리콘의 급등세로 인한 지수 리밸런싱 등 단기 변동성 요인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팀장은 “알리바바와 샤오미가 자체 칩을 개발하는 상황에서 다른 반도체 기업들도 기술력을 입증해야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AI훈풍은 일본 반도체주의 주가도 끌어올리고 있다. 9월 들어 일본 반도체주는 크게 상승했으며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자민당 총재 당선으로 니케이225가 4.8% 급등할 때도 도쿄일렉트론·어드반테스트, 디스코, 레이저텍 등 대형 반도체 주가 증시 상승을 주도했다.
레이저텍은 반도체 검사·측정 장비 기업이다. 반도체 산업의 업황 회복 기대감이 커진 가운데, 검사·검증 장비 수요가 증가할 가능성에 투자자들이 주목하며 주가가 급등했다. 어드반테스트는 반도체 시험(테스트) 장비 분야에서 강한 입지를 가진 기업으로 AI 반도체나 고성능 반도체 수요 확대가 예상되는 가운데, 테스트 장비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되며 주가를 끌어올렸다.
도쿄일렉트론은 반도체 제조 장비 전반, 특히 전공정 장비 (리소그래피, 식각, 증착 등) 기업이다.
특히 키오시아홀딩스는 9월 2800엔이던 주가가 10월 16일엔 6880엔까지 상승할 정도로 단기간 내 급등한 종목이다. 다만 일본반도체 ETF 수익률은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TIGER 일본 반도체FACTSET ETF 수익률은 최근 한달 16%지만 올해는 35% 수준이다.
[김제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